부여 신선 한옥
나무 이야기 본문
1. 초피나무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여름 내내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푹 고아 만든 추어탕의 감칠맛을 잊지 못한다. 문제는 비린내. 전라도 쪽에서는 된장을 풀고 경상도에서는 초피(조피, 제피, 쟁피, 죄피) 가루를 넣어 해결한다.
그래서 고즈넉한 시골동네의 밭둑에는 한두 그루의 초피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가을에 종자를 따다가 절구로 빻아서 쓰며 까만 알갱이보다는 종자 껍데기에 향기가 더 있다. 깜박 초피가루 준비를 잊어버린 아낙은 잎사귀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도 비린내를 없애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초피나무는 조피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산초나무가 이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흔히 혼동한다. 그러나 추어탕에 넣을 셈이라면 산초나무 열매로는 톡 쏘는 독특한 맛을 얻지 못한다.
산초나무에도 향기가 있으나 초피나무보다 훨씬 약하여 향신료로 쓸 때 는 역시 초피나무라야 한다. 초피를 추어탕에 쓰는 것은 주로 경상도 지방이므로 산에서는 임금님 만나기 보다 어렵다. 반대로 전라도나 충청도 쪽으로 가면 초피나무가 오히려 더 많다.
어떻게 구분할까?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초피나무는 가시가 서로 마주나고 잎이 동그스름하며 가장자리가 잔잔한 물결모양이다. 이에 비하여 산초나무는 가시가 어긋나며 잎은 끝이 뾰족해지면서 길쭉하고 가장자리는 톱니모양을 하고 있다.
간단하게는 가시가 마주나면 초피나무, 어긋나면 산초나무로 보면 다. 초피나 산초는 가지 끝마다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달리므로 다산(多産)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에서는 왕비의 거실을 초방(椒房)이라 하였으며 연산군이 궁녀를 자꾸 맞아들여 말썽이 나자 아부 잘하는 신하가 '산초 열매가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고 임금의 후궁 맞이를 옹호하였다.
한방에서는 건위제, 구충제, 염증약, 이뇨제 등으로 널리 사용한다. 또 최근에는 초피에서 O-157를 비롯한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밝혀지고 있어 더더욱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물푸레나무
우리의 식물이름은 직설적이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 자라는 중대가리나무는 열매가 스님의 머리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풀 종류인 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홀아비꽃대 등은 함부로 이름을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러나 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의 아름다운 우리 이름의 대표주자다. 한자로 쓸 때의 수정목(水精木), 수청목(水靑木)도 같은 의미다.
실제로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어린 가지의 껍질을 벗겨 담그면 하늘 빛 파란 물이 우러난다. 껍질을 진피(秦皮)라 하는데, 《동의보감》에 보면 눈에 쓰이는 귀중한 약이었다.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밝게 한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과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고 했다. 필자는 직접 물푸레나무가지를 꺾어다 여러 번 실험을 해 보았지만 효과는 별로였다. 내 몸이 인스턴트 현대의약품에 찌들어버린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이런 껍질쓰임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린 가지는 질기고 휨이 좋아 도리깨 등의 농사용 도구에 쓰였고,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눈 속에 빠지지 않은 덧신으로서 설피를 만들어 쓰는 재료였다. 적당한 굵기로 자란 물푸레나무는 낭만적인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무시무시한 쓰임이 있다. 옛 사람들이 죄인을 심문할 때 쓰는 신장(訊杖)이라는 몽둥이가 대부분 이 나무였다.
《고려사》에 보면 ‘물푸레나무 공문‘이란 말이 있다. 사회기강이 흐트러진 고려말, 관리들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곤장질을 하여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빗댄 말이라 한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한때 물푸레나무 보다 가벼운 버드나무나 가죽나무를 몽둥이로 쓰기도 하였으나, 죄인들이 자백을 잘 하지 않는다고 물푸레나무로 되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눈약으로 쓰이고 농사에 쓰이는 기구를 만들며, 고달픈 삶을 이으려 눈 위를 오갈 때로부터 영문도 모르고 관청에 불려가 볼기짝 맞을 때까지 애환을 함께 한 서민의 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다. 그러나 이제는 물푸레나무를 통한 아픈 기억들은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날의 쓰임새는 통쾌한 홈런을 날리는 타자의 야구방망이, 정구채 등 각종 운동구를 만드는 나무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크고 작은 계곡 쪽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다. 어릴 때는 껍질이 매끄럽고 띄엄띄엄 흰 반점이 생겨 있다. 그러나 나무가 굵어지면서 아래 부분부터 조금씩 세로로 갈라지다가 아름드리가 되면 흑갈색의 깊은 골이 생긴다. 달걀모양의 잎이 잎자루 하나에 대여섯 개씩 붙어있고 가지와 잎은 모두 마주보기다. 꽃은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서 하얗게 핀다. 열매는 납작한 주걱모양의 날개가 붙어 있고 크기는 싸인 펜 뚜껑만 하다.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무더기로 달려 있다가 세찬 겨울바람을 타고 새로운 땅을 찾아 제각기 멀리 나라간다.
비슷한 나무에 들메나무가 있다. 차이점은 한 대궁에 달려있는 여러 개의 잎 중 꼭대기 잎이 가장 크며 금년에 자란 가지에서 꽃대가 나오는 것이 물푸레나무, 잎의 크기가 모두 같으며 작년 가지의 끝에서 꽃대가 나오면 들메나무다. 또 잎이 작고 좁으며 대부분 작은 나무로 자라는 쇠물푸레나무도 야산이나 산등성이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3. 붉나무
나무이름은 붉은 단풍이 드는 나무란 뜻으로 붉나무가 되었다. 단풍이라면 단풍나무만 연상하지만 곱게 물든 붉나무의 단풍을 한번만 보면 왜 이름을 붉나무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 진한 붉음이 우리를 감탄케 하는 나무이다.
개화 이전의 우리네 서민들의 풍물을 그린 글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만큼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필품이었으며, 특히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나타나는 소금장수한테서 잊지 않고 소금을 확보해 두어야만 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봉상왕의 조카 을불(乙弗)은 왕의 미움을 받아 소금장수로 떠돌아다니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왕을 몰아내고 15대 미천왕(300~336)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소금장수이야기이고 가장 출세한 소금장수이다. 그 만큼 옛날 소금장수는 없어서는 안될 '귀하신 몸'이었으며, 특히 더벅머리 총각 소금장수는 시골처녀들을 가슴 설레게 하였다 한다.
그런데 가진 소금은 바닥나고 소금장수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구할 수 없을 때 대용으로 염분을 구하려는 우리 선조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특정의 벌레에서 염분을 얻는 충염(蟲鹽), 신나물을 뜯어 독 속에 재어두어서 얻는 초염(草鹽), 쇠똥이나 말똥을 주워 다가 이를 태워서 얻는 분염(糞鹽) 등 이름만 들어도 소금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붉나무 열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붉나무 열매는 가운데에 단단한 씨가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에 해당하는 부분이 가을이 깊어 갈수록 소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게 된다.
여기에는 제법 짠맛이 날 정도로 소금기가 들어 있는데 긁어모아두면 훌륭한 소금대용품이 된다. 한자로 염부목 혹은 목염이라 하는 것은 붉나무의 열매가 소금으로 쓰인 것을 나타낸다. 또 붉나무에는 오배자(五倍子)라는 벌레 혹이 달리는 데 타닌을 50~70%나 함유하고 있으며, 가죽 가공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원인 동시에 약제였다. 붉나무에 기생하는 오배자 진딧물이 알을 낳기 위하여 잎에 상처를 내면 그 부근의 세포가 이상분열을 하여 혹 같은 주머니가 생기고 오배자 진딧물의 유충은 그 속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 주머니를 오배자라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오배자 속의 벌레를 긁어 버리고 끓은 물에 씻어서 사용하는데, 피부가 헐거나 버짐이 생겨 가렵고 고름 또는 진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하며 어린이의 얼굴에 생긴 종기, 어른의 입안이 헌 것 등을 치료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토산물로서 붉나무 벌레 혹을 생산하는 지역이 원주, 평창, 양양, 정선, 강릉이라 하여 약제로 널리 쓰였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한낱 평범한 붉나무도 한때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영광의 세월을 말없이 되뇌어 보고 속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자락의 양지 바른쪽이면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란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잎나무로서 크게 자랐을 때는 지름이 10여cm에 이르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 달리는 데 하나의 잎자루에 7~13개의 작은 잎이 서로 마주 보면서 붙어있다. 잎자루의 좌우에는 좁다란 날개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혼동하는 옻나무나 개옻나무는 잎자루에 이런 날개가 없으므로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잎은 타원형이며 끝이 차츰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이고 가지의 꼭대기에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연한노랑 빛의 꽃이 핀다. 꽃이 지면 속에 단단한 종자가 들어있는 열매가 지천으로 달리는 데 황갈색의 잔털로 덮여 있다. 익으면 맛이 시고 짠맛이 도는 흰빛 육질이 생긴다.
4. 싸리나무
싸리나무는 광주리,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구에서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 나아가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이태조의 화살대로 애용되는 등 옛 선조 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나무였다.
또 귀중한 쓰임새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횃불의 재료이다. 요즘 TV의 역사극을 보면 기름 묻힌 솜뭉치 횃불이 등장한다. 그러나 들깨나 쉬나무 열매에서 어렵게 기름을 얻어 호롱불로나 간신히 사용하던 그 시절에 늘 솜뭉치에 쓸만한 기름은 아무리 왕실이라 하더라도 조달이 가능하지 않다.
소나무 관솔도 일부 사용하였을 것이나 싸리나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성종이 죽자 연산 원년(1495)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을 보면, "발인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노비에게 들리게 한다"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하였음을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 나간 군인이 싸리나무를 모르면 생쌀 먹기가 일쑤였다. 싸리나무는 나무속에 습기가 아주 적고 참나무에 막 먹을 만큼 단단하여 비 오는 날에 생나무를 꺾어서 불을 지펴도 잘 타며 화력이 강하고 연기마저 없으니 최첨단 군수물자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도 싸리나무로 불 지피는 공비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싸리나무는 20여종이나 되는데 모두 자그마하게 자라는 난쟁이 나무이고 가장 흔한 종류는 싸리와 조록싸리이다.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잎이 달리는데 작은 잎이 예쁜 타원형이면 싸리, 잎의 끝이 차츰차츰 좁아지는 긴 삼각모양이면 조록싸리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는 건물의 기둥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 팔공산의 동화사 등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구시가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오늘날 아무리 크게 자라도 사람 키 살짝인 작은 나무이지만 수백 년 수천 년 전에는 혹시 아름드리로 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 많은 현대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예상대로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이겠으나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든 느티나무를 처음에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5. 탱자나무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 참판 댁의 설명을 보면, '사랑 뒤뜰을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일을 다 맡는 김 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라고 생울타리를 그려놓은 구절이 있다.
탱자나무는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로부터 울타리로 널리 심었다. 충남 서산에는 사적 11호인 해미읍성이 있는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깊은 도랑을 파고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일명 탱자성이란 의미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하였다. 강화도에 있는 천연기념물 78호와 79호의 탱자나무 역시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심은 것 중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자연상태 그대로 두면 더 크기도 하나, 대개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이로 키운다. 약간 모가 난 초록색 줄기가 길고 튼튼하며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쉽게 접근을 거부하는 듯 제법 위엄을 준다. 그러나 늦봄에 피는 새하얀 꽃은 향기가 그만이고, 가을이 되면 동그랗고 노란 탱자열매가 가까이 오지도 말라고 겁주는 가시에 어울리지 않게 일품이다.
중국의 고전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안영의 기를 꺾기 위해 제나라의 도둑을 잡아놓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 '귤나무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橘化爲枳).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고 응수했다.
동의보감과 본초도감에 보면 탱자열매는 피부병, 열매껍질은 기침, 뿌리껍질은 치질, 줄기껍질은 종기와 풍증을 낫게 한다하여 모두 귀중한 약재로 쓰였다.
나무 자체는 별로 쓰임새가 없을 것 같으나 북채를 만드는 나무로는 탱자나무를 최고로 친다. 소리꾼은 탱자나무 북채로 박(拍)과 박 사이를 치고 들어가면서 북통을 '따악'하고 칠 때 울려 퍼지는 느낌의 바다에서 희열을 맛본다고 한다.
중국 원산으로 경기 이남의 따뜻한 지역에 심고 있는 잎이 떨어지는 넓은잎가시나무이다. 잎 모양이 독특하여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작은 잎이 붙어 있고, 또 잎과 잎 사이의 잎자루에는 좁다란 날개가 달려있다.
쓰임새는 생울타리이며, 제주도 등지에서는 귤나무를 접붙이는 밑나무이다. 험상궂은 가시와 초록색 줄기 및 잎자루의 날개가 탱자나무를 다른 나무와 구별해 내는 요점이다
6. 사시나무
전래 민요에 나무 이름을 두고 ‘덜덜 떨어 사시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불 밝혀라 등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방귀뀌어 뽕나무, 그렇다고 치자 치자나무, 거짓 없다 참나무 등 재미있는 노래 가사가 있다.
크게 겁을 먹어 이빨이 서로 부딪칠 만큼 덜덜 떨게 될 때 우리는 흔히 사시나무 떨 듯이 떤다고 한다. 왜 허구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사시나무와 비유될까? 사시나무 종류에 속하는 나무들은 다른 나무보다 몇 배나 가늘고 기다란 잎자루 끝에 작은 달걀만 한 잎들이 매달려 있다. 자연히 사람들이 거의 느끼지 못하는 미풍에서 제법 시원함을 가져오는 산들바람까지 나뭇잎은 언제나 파르르! 떨게 마련이다.
영어로도 ‘tremble tree’라 하여 우리와 같이 역시 떠는 나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일본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산명(山鳴)나무, 즉 산을 울게 하는 나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이름에 떤다는 뜻은 넣지 않았다. 다만 일반 백성들은 묘지의 주변에 둘레나무로 사시나무를 심게 하였다. 죽어서도 여전히 벌벌 떨고 있으라는 관리들의 음흉한 주문일 것이다.
사시나무는 모양새가 비슷한 황철나무를 포함하여 한자이름은 양(楊)이며 껍질이 하얗다고 백양(白楊)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버드나무 종류와 가까운 집안 간으로서 둘을 합쳐 버드나무과(科)라는 큰 종가를 이룬다.
백제 무왕 35년(634) 부여에 궁남지(宮南池)를 축조 할 때 ‘대궐 남쪽에 못을 파고 사방 언덕에 양류(楊柳)를 심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복원하면서 궁남지에는 온통 능수버들만을 심었다. 양류에는 버들만이 아니라 사시나무도 포함되어 있으니 조금은 다양한 조경을 하여도 좋을 것 같다. 훈몽자회에는 가지가 위로 향하는 것은 양(楊), 밑으로 처지는 것은 류(柳)라 하여 엄밀히 구분하였다.
중부 이북에 주로 자라는 낙엽활엽수로 지름이 한 아름정도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회백색으로 어릴 때는 밋밋하며 가로로 긴 흰 반점이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얕게 갈라져서 흑갈색이 된다. 잎은 뒷면이 하얗고 가장자리에 얕은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딴 나무로서 봄에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는 긴 원뿔모양의 삭과(蒴果)로 봄에 익으며 종자에 털이 있다.
동의보감에 사시나무 껍질은 ‘각기로 부은 것과 중풍을 낫게 하며 다쳐서 어혈이 지고 부려져서 아픈 것도 낫게 한다. 달여서 고약을 만들어 쓰면 힘줄이나 뼈가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여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사시나무라는 좀 생소한 이름보다 흔히 백양나무라고 부른다. 수입하여 심고 있는 은백양이나 이태리포플러는 물론 외국의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작가나 나무를 수입하는 업자들도 원어 ‘aspen’을 사시나무가 아니라 백양나무로 일컫는다. 그러나 백양나무란 정식 이름이 아닌 사시나무 종류의 속칭(俗稱)일 따름이다
7. 닥나무
'죽을 때 제 이름 부르고 죽는 나무는?.‘ 정답은 닥나무, 옛 어린이들의 수수께끼다. 버들처럼 유연성이 좋은 몇 나무 이외 대부분의 나무는 분지르면 ‘딱‘소리가 나므로, 사실 닥나무는 맞다. 우스개 소리일 따름이고 질긴 껍질을 옛 사람들이‘닥‘이라고 하는데, 닥을 얻는 나무란 뜻으로 닥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는 죽어서 이름이 아니라 호랑이처럼 껍질을 남겨주었다. 덕분에 인류에게 오늘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 원동력, 인쇄문화를 이끌어 온 영광스런 나무가 되었다. 기껏 4~5m남짓한 자그마한 체구에 볼품없는 잎사귀 몇 개를 달고 있는, 나무나라에서는 그저 그런 존재지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다른 나무가 일궈내지 못한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다.
원시에서 문명생활로 접어들 즈음 사람들은 무엇인가 기록하여 남겨둘 강한 욕망을 가졌다. 처음 바위를 쪼아 그림으로 표현하다가 문자를 발명하면서 나무껍질이나 동물가죽, 비단에다 쓰고 그렸다. 그러나 한계가 있게 마련, 보다 값싸게 한꺼번에 많은 문자를 쓸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다.
서양에서는 이집트의 나일강변에 야생하는 파피루스(papyrus)라는 갈대와 비슷한 식물을 저며서 서로 이어 사용하였다. 종이라고 하기에는 영 엉성하였지만 오늘날 paper의 어원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후한(後漢)의 채륜이 서기 105년에 마(麻)부스러기·헝겊조각·어망 등을 재료로 종이를 만들게 된다. 최근에는 그 이전인 전한(前漢) 시대에도 종이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져 종이 발명시대는 좀더 올려 잡고 있다. 어쨌든 종이 만드는 기술은 서양보다 동양이 한 수 위다.
종이가 필요한 곳이 점점 많아지면서 제조기술의 발전과 함께 원료확보가 문제였다. 주위에 흔히 보는 등나무, 뽕나무, 소나무, 버들의 나무껍질에서 갈대, 율무, 짚, 솜에 이르기까지 섬유를 가진 식물이면 거의 종이의 원료가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식물섬유를 찾아가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종이와 ‘찰떡궁합’ 닥나무를 찾아낸다.
이 나무의 껍질에는 인피섬유(靭皮纖維)라는 질기고 튼튼한 실 모양의 세포가 가득 들어 있다. 환경적응력이 높아 어디에나 잘 자란다. 매년 새 움에서 나온 가지를 잘라 사용하므로 작은 관목으로 알고 있으나, 그대로 두면 지름 6~7cm까지도 자란다. 한 나무에 달걀 모양의 보통 잎과 가장자리가 깊게 패인 잎이 같이 달린다. 암꽃은 마치 짧은 실을 수없이 달고 있는 작은 구슬 같은 모양으로 오뉴월에 핀다. 열매는 초여름에 주홍색으로 익는다. 닥나무와 거의 비슷한 나무에 꾸지나무가 있으나 식물학적인 분류이고 종이 만드는 쓰임은 같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오랜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늦가을 닥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통에 넣고 찐 후 껍질을 벗겨낸다.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 겉껍질을 제거하면 하얀 안 껍질만 남는다. 다시 솥에 넣고 나뭇재를 섞어서 삶는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서 절구로 찧거나 떡판에 올려놓고 두들겨서 껍질이 흐물흐물해지게 만든다. 통에 넣고 물을 부어 잘 섞은 다음 닥 풀을 첨가하여 발로 김을 뜨듯이 한 장 한 장 떠낸다.
이렇게 닥나무종이는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기술이 집약적인 산업이었지만 품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되는 나무였다. 당연히 공급이 달려 닥나무의 확보에 애를 써야 했다. 백성들에게 재배하기를 권했으며 조정에서는 재래종 닥나무 재배 독려에 그치지 않고 재료 다변화를 꾀했다. 벌써 조선 초기 품질 좋은 ‘왜닥나무’를 수입 해다 널리 심기를 권장했다. 가지가 세 개로 계속 갈라지는 삼지닥나무와 싸리 비슷하게 생긴 산닥나무가 그때 수입되었다. 흔적이 남아 오늘 날 남부지방의 절 근처에서 쉽게 만난다.
우리나라에 종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낙랑시대까지 올려 잡기기도 하나 널리 보급된 것은 삼국시대인 6~7세기 정도로 본다. 실제 현물 종이가 찾아진 것은 755년경에 만들어진 토지대장 ‘신라민정문서’와 비슷한 시기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종이 만드는 기술은 한층 발달하였다. 견지(繭紙)라는 고려 종이는 닥나무로 만들었음에도 비단처럼 얇고 매우 질겨서 중국에서도 고급종이로 여겨졌다. 종이 산업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번성했고, 서울 세검정 부근에 관영 종이 공장이 설치되는 등 널리 보급된다. 서양 종이에 자리를 내 줄때 까지 닥나무 종이는 우리문화의 가운데 있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열매는 발기부전을 낫게 하고 힘줄과 뼈를 든든하게 하며 양기를 돕고 허약함을 보하며 허리와 무릎을 데워준다. 잎으로 달인 물에 목욕을 하면 가려움증이나 종기를 낫게 하며 살이 돋아나게 한다.’고 했다.
닥나무는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바깥 모양과는 달리 종이라는 인류 최대 발명품의 한 가운데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매는 옛사람들의 정력 강장제였고 잎으로는 가장 흔한 피부병을 낫게 하는 이래저래 고마운 나무였다.
8. 마가목
마가목은 삭풍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높은 산의 꼭대기 근처에 터를 잡았다. 메마른 땅 찬바람을 원래부터 좋아하였을 리는 없고, 평지에 심어보면 잘 자라는 것으로 보아 경쟁자에게 차츰 밀려서 쫓겨난 ‘비운의 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이 나무에도 햇빛이 들기 시작하였다. 꽃과 열매, 잎의 모양새까지 산꼭대기로 쫓아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우선 생김새부터 알아보자. 마가목은 오래된 것이라야 키가 7~8m에 지름 한 뼘 남짓에 지나지 않은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거의 갈라지지 않고 적갈색으로 약간 반질반질한 감이 있다. 잎은 전체적으로 아카시아 잎처럼 생겼으나 작은 잎 하나하나는 뾰족뾰족하며 가장자리에는 날 세운 겹 톱니가 있다.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한창 녹음이 짙어갈 즈음 하얀 꽃이 떡살을 여러 개 늘어놓은 것처럼 무리 지어 핀다. 녹색 잎과 흐드러지게 피는 흰 꽃들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나무의 품위를 한층 높여준다. 꽃은 향기롭고 벌이 좋아하는 꿀샘이 풍부하여 벌꿀을 따는 식물로도 손색이 없다.
여름이 끝나 가는 8월 말쯤이나 9월초에 때늦게 울릉도에 들어간 관광객들은 가로수로나 성인봉의 등산길에 굵은 콩알 크기의 붉은 열매를 나무 가득히 달고 있는 마가목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된다. 육지에도 마가목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지만 울릉도의 성인봉이 마가목 자생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콩알 크기의 빨간 열매를 한 송이에 수백 개씩 매달고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주렁주렁 늘어진 모양은 짙푸른 후박나무 잎새와 어우러져 흔히 말하는 ‘환상의 명콤비’를 이룬다.
잎과 꽃, 열매 모두가 아름다운 나무-그래서 세계적으로 80여종이나 되는 마가목은 일찍부터 관상 가치에 눈을 뜨고 개발하여 유럽, 중국, 미국에서 우리가 수입하는 마가목 종류도 상당수 있다.
마가목이란 이름은 새싹이 돋을 때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솟아난다고 마아목(馬牙木)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마가목은 정공등(丁公藤), 남등(南藤)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설명으로 보아서는 마가목과 같은 나무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민간약으로 마가목의 열매와 껍질이 여러 가지 약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매는 말려 두었다가 달여서 복용하거나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몇 년 전 근거 없이 마가목이 성인병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잘리고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수난을 당한 슬픈 과거가 있다. 최근 북한에서는 마가목으로 부터 `마가목산'이라는 호흡기질환 생약치료제를 개발하여 크게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마가목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진짜 마가목과 당마가목을 비롯하여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작은 잎의 숫자가 9~13개이고 잎의 뒷면이 앞면과 마찬가지로 그냥 녹색이면 마가목, 작은 잎의 숫자가 13개를 넘고 잎 뒷면이 흰빛이 돌면 당마가목이다.
9. 다래나무
햇빛이 내려 쪼이는 한낮에는 아직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 지리산 실상사 입구에는 ‘고무반티(재생플라스틱 함지박)’에 손가락 굵기 만한 검푸른 열매를 수북이 담아놓고 지나가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아줌마들이 있다.
맛만 보고 가라는 꾐에 못 이기는 척하고 몇 알을 입 속에 넣어보면 달큼한 맛에다 깨알처럼 씹히는 씨앗까지 감칠맛이 일품이다. 이것이 바로 머루와 함께 야생과일의 대명사 다래이다. 단맛이 잔뜩 들어 있는 목화의 풋 열매를 다래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달다’에서 다래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다래는 그냥 생식하는 것 외에도 과일주를 담그면 달콤한 맛 때문에 먹기가 좋고 비타민C와 타닌 등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강장․보혈․불면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꿀에 넣고 조린 다래정과(正果)는 우리의 전통과자로서 지체 높은 옛 어른들의 간식거리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심한 갈증과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멎게 하며 요결석을 치료한다. 장을 튼튼하게 하고 열기에 막힌 증상과 토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곡우를 지나 나무의 생리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다래나무도 건강식품으로 수액을 뽑아먹는다. 굵어야 팔뚝 남짓한 다래나무 줄기에서 물을 뽑아내는 것이 귀찮다고 아예 덩굴을 싹둑 잘라버린다. 여기에는 마치 깊은 상처를 입어 피가 용솟음치듯이 수액이 넘쳐흐른다. 보고 있으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너무 섬뜩하여 마음 약한 사람은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래나무 수액채취는 나무의 제발 삼갔으면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숲 속에 자라는 덩굴나무로 길이 10m를 훨씬 넘고 팔뚝 굵기에 이르기도 한다. 어린 가지에 잔털이 있으며 숨구멍이 뚜렷하고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타원형으로 크기는 갓난아이 손바닥만하다. 잎 표면은 갈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뒷면은 연한 초록빛이고 가장자리에는 바늘모양 톱니가 촘촘하다. 암수 딴 나무로서 꽃은 여름에 흰빛으로 피고 마치 작은 매화꽃과 같이 생겼다.
다래나무 종류에는 이외에도 개다래와 쥐다래가 있다. 둘 다 다래나무와는 달리 잎이 마치 백반병(白斑病)이 든 것처럼 흰 잎이 띄엄띄엄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 개다래의 열매는 끝이 뾰족한 것이 쥐다래와의 차이점이다. 개다래는 달지 않고 혓바닥을 톡톡 쏘는 맛이 있어서 약용으로 쓸 따름이지 먹지는 않는다.
수입하여 재배하고 있는 키위(kiwi)도 다래의 한 종류이다. 언제부터인가 키위를 참다래라고 부르고 있어서 우리 산에 자라는 다래는 억울하게도 하루아침에 모두 가짜가 되어버렸다. 키위는 키위라고 그대로 부르고 참다래는 우리의 다래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다래나무와 족보는 멀지만 잎이나 덩굴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노박덩굴이 있다. 다래나무는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짧은 바늘처럼 촘촘한데 반하여 노박덩굴은 물결모양 톱니인 것이 차이점이다. 물론 딱딱하고 샛노란 노박덩굴의 열매를 보면 다래와의 차이점을 금세 구분할 수 있다.
10.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여름날 연노랑 꽃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진다. 잎이 아까시나무를 닮아있어서 헷갈리기 쉽고 식물학적으로도 같은 콩과의 집안간이다. 중국을 고향으로 하는 이 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하여 중국인들도 매우 귀히 여겼다. 주나라 때 조정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이 마주 보고 앉아서 정사를 논했다고 한다.
권력과 가까이 있던 ‘실세나무’로서 관리와 선비들이 즐겨 심었다. 멀리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왕궁에도 심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름드리 회화나무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 또 과거에 급제하면 공부하던 집의 마당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의 기념식수도 회화나무였다. 다른 이름은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scholar tree라고 쓴다.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다. 반대로 아무 곳이나 이익이 있는 곳에는 가지를 뻗어대는 곡학아세를 대표하는 나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어쨌든 옛 선비들이 이사를 가면 먼저 마을 입구에다 먼저 회화나무를 심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더불어 뒤쪽에는 기름을 포함한 열매가 수없이 매달리는 쉬나무를 심어 붉을 밝히고 글을 읽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이렇게 회화나무는 여러 이유로 궁궐은 물론 서원, 문묘, 이름난 양반동네에서는 회화나무를 흔히 만난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 함께 전설이나 유래가 알려진 회화나무 노거수를 전국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필자가 잊을 수 없는 회화나무는 충남 서산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내에 자라는 600년 노거수다. 조선 말기 병인사옥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으므로 교수목(絞首木) 또는 호야나무 등으로 불려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 그 꽃을 괴화라고 하는데 괴(槐)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느티나무도 흔히 괴목이라 하므로 옛 문헌에서는 앞뒤 관계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중국의 고전소설 남가태수전에는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꿈속에 괴안국(槐安國) 태수가 되어 호강을 누린다.
어느 날 꿈을 깨어보니, 바로 자기 집 뜰의 회화나무 아래 개미나라를 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나무가 회화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느티나무가 흔치 않고 중국에서는 느티나무를 괴(槐)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로서 지름 두세 아름, 키가 수십m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어린가지는 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 특징이며 나이를 먹으면 나무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아카시아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나 끝이 점점 좁아져서 뾰족해진다. 꽃은 가지의 끝에 여러 개의 원뿔모양 꽃대에 복합하여 달리며 여름에 연한 노랑꽃이 핀다. 곧 염주를 몇 개씩 이어놓은 것 같은 열매를 달린다.
본초강목에는 회화나무 종자, 가지, 속껍질, 진은 치질이나 불에 덴 데 쓰인다하였고, 특히 꽃은 말려서 고혈압, 지혈, 혈변, 대하증 등에 널리 이용되었다. 꽃에 들어있는 루틴(rutin, 일명 비타민P)이라는 물질은 모세혈관을 강화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다. 꽃을 솥에 달여 나오는 루틴의 노란 색소로 물을 들인 한지에 부적을 쓰면 효험이 더 있다고 알려져 있다.
11.산사나무
산사나무의 잎은 가장자리가 깊게, 때로는 얕게 율동적으로 잎맥을 가운데 두고 비대칭적으로 파져 있다. 대개의 나뭇잎이 갸름한 달걀모양이거나 작은 잎 여러 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고 어떻게 보면 정돈되지 않은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산사나무는 복잡한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잎을 한번만 보아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산사나무의 북한 이름은 무슨 나무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찔광나무이다. 우리는 한자이름인 산사목(山査木)에서 따온 이름이고 북한은 지방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경우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 막 들어설 즈음 산사나무는 위가 편평한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동전만한 꽃이 십 여 개씩 모여 달린다. 연초록의 신록과 하얀 꽃이 그야말로 함박 웃는 여왕이 입모습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질 만큼 계절과 잘 어울리는 꽃을 달고 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채 들어가면 앙증맞은 아기사과처럼 생긴 열매는 새빨갛게 익기 시작한다. 어린이들의 구슬 크기만 하고 흰 얼룩점이 있는 열매는 띄엄띄엄 몇 개씩 감질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 개씩 새빨간 구슬 모자를 뒤집어 쓴 것 같다. 초가을에는 초록빛 잎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다가 가을이 깊이 가면서 잎이 떨어지면 붉은 열매사이로 쳐다보는 가을하늘과 퍽 잘 어울리는 열매이다.
모양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열매는 산사자(山査子)라 하여 이것으로 빚은 산사주(山査酒)는 알려진 약용 술이다. 잘 익은 산사열매를 깨끗이 씻어 응달에서 말린 다음 주둥이가 큰 병에 담고 3배 정도의 소주를 부어 뚜껑을 꼭 닫는다. 서늘한 곳에서 6개월 이상 두어 술이 익으면 체에 걸러 건더기는 건져내고 맑은 술은 다른 병에 옮겨둔다. 신맛이 약간 있고 떫은맛을 느끼게 하나 조금씩 마시면 위장에 좋다고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산사나무 열매는 ‘소화가 잘 안되고 체한 것을 낫게 하며 기가 몰린 것을 풀어주고 가슴을 시원하게 하며 이질을 치료한다’고 하여 소화기 계통의 약제로 쓰였다. 또 가을에 잘 익은 열매를 따서 씨를 발라내고 햇볕에 말린 다음, 종이봉지에 넣고 잘 봉해서 습기 없고 통풍이 잘 되는 장소에 매달아 두고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였다.
순조원년(1800) 임금의 몸에 발진이 생기자 의관에게 ‘인동 두 돈쭝과 산사자 한 돈쭝으로 차를 만들어 들이라’고 하였고, 또 순조2년에는 ‘산사자를 가미한 가미승갈탕(加味升葛湯)을 올리고 중궁전에는 산사차와 함께 가미강활산(加味羌活散) 한 첩을 올렸다’고 한다. 임금님과 왕비 모두 홍역의 증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부 일부 및 섬 지방을 제외한 거의 전국에 걸쳐 분포하며 높이 6m 정도로서 굵기는 한 뼘 정도까지 자란다. 나무껍질은 어릴 때는 매끄러우나 나이가 들면서 세로로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어린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산사나무 종류는 유럽에도 널리 분포한다. ‘May flower'라고 부르기도 하며 잎과 꽃, 열매에는 약리작용을 하는 유효성분이 있어서 강심제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12.주엽나무
한림별곡에 ‘조협나무에 붉은 실로 붉은 그네를 매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 이전부터 인가가까이 흔히 심었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한자이름은 조협목(皁莢木)이고 조협나무를 거쳐 주엽나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주염나무 혹은 쥐엄나무라고도 한다. 쥐엄이란 쥐엄떡(인절미를 송편처럼 빚고 팥소를 넣어 콩가루를 묻힌 떡)에서 유래된 말이다. 열매가 익으면 속에는 끈끈한 쨈 같은 것이 있어서 먹으면 달콤한 맛이 나므로 쥐엄떡과 비유되어 이런 이름이 생긴 것으로도 이야기한다.
주엽나무의 가지에는 가시가 없어도 굵은 줄기에는 흔히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붙어있다. 대학 구내의 주엽나무에는 별나게 가시가 많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은 언제나 힘이 남아돌아, 버티고 서있는 학내의 나무가 아니꼬운지 이유도 없이 ‘2단 옆차기‘가 잘 들어간다. 여자 친구한테 딱지라고 맞는 날이면 회갈색의 매끄러운 껍질이 만만해 보이는 주엽나무가 그들의 화풀이 희생양이 된다.
살아있는 삼라만상은 잘못도 없이 매 맞으면 반격을 가할 궁리를 하게 마련이다.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드리는 다른 나무와는 달리 주엽나무는 매우 효과적인 대책을 세운다. 다시는 발을 올려보지도 못하게 줄기의 일부가 변하여 사슴뿔처럼 생긴 무시무시한 가시를 만들어 낸다. ‘이 녀석아! 이래도 또 발길 질 할래?’라고 겁을 주어 버린다.
이 가시는 꼭 외부 자극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모든 주엽나무에 반드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아주 귀하게 여긴다. 한자로 조각자(皁角刺) 혹은 조협자(皁莢刺) 라고 하는데, 동의보감에 보면 부스럼을 터지게 하고 이미 터진 때에는 약 기운이 스며들게 하여 모든 악창을 낫게 하고 문둥병에도 좋은 약이 된다고 한다.
한편 주엽나무의 열매는 조협, 열매의 씨는 조각자(皁角子) 혹은 조협자(皁莢子)라 하여 ‘뼈마디를 잘 쓰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하며 구규(九竅)를 잘 통하게 하고 가래침을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여러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주엽 열매를 오래 전부터 약으로 사용하였다.
전국에 걸쳐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키가 20여m, 지름은 한 아름까지 굵어진다. 대부분의 나무가 나이를 먹으면 껍질이 세로로 깊게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나 주엽나무는 매끄러운 줄기가 특징이며 가끔 예리한 가시가 달린다. 잎은 어긋나기이고 아카시아 잎처럼 생겼으며, 작은 잎의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특징적인 것은 잎자루에 마주보기로 붙어있는 잎이 대부분의 다른 나무들은 홀수이나 주엽나무는 짝수이다.
꽃은 초여름에 황록색으로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이가 거의 한 뼘에 이르고 너비 2~3cm의 비틀어진 큰 콩꼬투리의 열매를 맺는다.
주엽나무와 줄기 및 잎의 모양은 매우 비슷하나 열매의 꼬투리가 비틀리거나 꼬이지 않으며 가시가 더 굵은 것을 조각자나무라 하여 원래 한약제로 쓰는 별개의 나무가 있다.
13.무궁화나무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옛 영화 전송가에서 여주인공 안나 카슈피가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라고 잔잔히 노래하는 장면이 있다. 무궁화는 이처럼 삼천리강산을 휩쓴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평화의 꽃으로 만발하기를 기다리고 바라는 우리의 나라꽃이다.
멀리는 중국의 요순시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며 신라 때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도 근화지향(槿花之鄕)이란 말이 들어있다.
근화나 목근(木槿)으로 불리던 이름은 고려 때 비로소 무궁화(無窮花)란 꽃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이 꽃은 꽃피기 시작하면서/하루도 빠짐없이 피고 지는데/사람들은 뜬세상을 싫어하고/뒤 떨어진걸 참지 못한다네/도리어 무궁이란 이름으로/무궁하길 바란 것일세...‘하였다.
그러나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구한말 애국가 가사가 만들어질 때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시작된 질곡의 근세를 살아온 세대들은 무궁화가 바로 애국의 상징이었고 삼천리강산이 무궁화 꽃으로 덮이는 이상향을 그리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어 정부가 수립되고 자연스럽게 무궁화는 나라꽃으로 정해지면서 국기봉이 무궁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아울러 정부와 국회 포장이 무궁화 꽃 도안으로 채택되었다.
무궁화는 사람 키를 조금 넘는 높이에 팔뚝 굵기가 고작인 작은 나무이고 가지가 잘 갈라져 포기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 잎은 엄지손가락 길이에 달걀모양으로 깊게 3갈래로 갈라지며 어긋나기로 달린다.
꽃은 5장의 커다란 꽃잎이 서로 반쯤 겹치기로 펼쳐져 작은 주먹만 한 꽃이 피며 꽃잎 안쪽에는 짙은 붉은 색 무늬가 생긴다. 무궁화는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에는 벌써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이틀 정도면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여름에 피기 시작하면 늦가을까지 거의 3~4개월이나 피는 셈인데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민족을 이어온 우리의 끈기를 상징하는 꽃으로도 생각한다.
수많은 품종이 있고 장려하는 종류만도 20여종이 넘는다. 색깔로 본다면 분홍색, 보라색, 흰색이 있으며 홑꽃과 겹꽃도 있다. 원산지가 중동, 인도, 중국남부라는 등 논란이 있으며 본래 우리 땅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종나무가 아니라 수입나무이다.
불행히도 나라 꽃 무궁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꽃의 순서를 매겨 보았더니 장미, 국화, 백합에 이어 겨우 4위를 차지하는데 불과하였다한다. 꽃이 질 때가 지저분하고 하루살이 꽃이며 진딧물이 많다는 등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서 나라꽃이란 막강한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무궁화 심기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북한은 진달래에서 함박꽃나무로 나라꽃을 바꾸었고, 중국도 모란에서 매화로 바뀌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공감한다는 전제라면,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면서도 민족의 얼이 서려있는 나라꽃을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14.작살나무
가을의 초입부터 낙엽이 뒹구는 늦가을 까지 우리 산의 가장자리에는 귀여운 보라구슬을 송골송골 매다는 자그마한 나무가 눈길을 끈다. 고운 자수정의 빛깔을 그대로 쏙 빼 닮은, 대자연이라는 장인이 만들어 놓은 조각품의 극치다. 가을 산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는 작살나무 열매가 바로 이들이다.
작살나무는 원래 습기가 많은 개울가에서 올망졸망한 크기의 다른 나무들과 사이좋게 살아간다. 그는 주위의 키다리 나무들과 햇빛을 받기 위한 ‘키 키우기’ 무한경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지 않는다. 큰 나무들이 위로 올라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아래 공간을 ‘틈새시장’으로 활용한다. 우선 알차게 이리 저리 가지 뻗음을 해두고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살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조상이 남겨준 유전자 설계대로, 적게 들어오는 햇빛으로 광합성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 비정한 식물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다. 괜스레 덩치만 키웠다가 실속도 못 차리고, 주위 나무들로부터 견제만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봄에서 여름까지 아름다운 가을 열매를 만들기 위하여 조용히 준비를 한다. 이 시기에는 엇비슷한 이웃나무들의 푸름에 섞여서 전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전문가의 눈이 아니면 찾아 낼 수도 없다. 숲 속의 초록빛이 한층 짙어진 한 여름의 어느 날, 비로소 작살나무는 잎겨드랑이에 연보랏빛 깨알 같은 꽃들을 살포시 내민다. 나무나라의 쓸 만한 백성이 여기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첫 신호다. 그러나 꽃이 너무 작아 벌과 나비로부터도 거의 주목 받지 못한다. 이어서 달리는 좁쌀 크기의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과 함께 차츰 연보랏빛으로 변신하면서 숨겨둔 아름다움을 조금씩 내보인다. 가을이 완전히 깊어지면 지름 2~5mm에 동그란 열매로 성숙한다. ‘올챙이 시절’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수정 구슬로 장식한 아름다운 작살나무 미인을 비로소 사람들이 알아주게 된다. 혼자가 아니라 가녀린 가지가 휘어질 듯 수십 개씩 옹기종기 붙어있다. 여름 끝 무렵에 달리기 시작하여 낙엽이 앙상한 가지에서 삭풍이 휘몰아쳐 나뭇가지를 온통 훑어버릴 때까지, 열매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는 것도 이 나무의 자랑거리다. 하늘이 더욱 높아진 맑은 가을날 햇빛에 반사되는 작살나무 열매의 보라 빛 해맑음은, 우리나라 특유의 코발트 빛 가을 하늘과 환상적인 어울림을 갖는다.
중국 사람들은 작살 열매의 아름다움을 보라 구슬, 자주(紫珠)라 하였다. 금세 열매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다. 반면에 일본 이름은 ‘무라사끼시끼부(紫式部, ムラサキシキブ)’다. 11세기경에 씌어진 원씨물어(源氏物語)라는 그들의 유명한 고전 소설 저자와 같은 이름이다. 불과 25살에 과부가 된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 일본인들이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은 그녀 이름을 작살나무에 그대로 붙인 것이다. 그만큼 작살나무 열매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라 빛 아름다움과 썩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같은 나무를 두고 우리만 ‘작살’이라는 조금은 삭막한 이름으로 부른다. 고기잡이에 쓰이는 작살은 단단한 나무막대기에 삼지창 모양의 날카로운 쇠붙이를 꽂아서 쓴다. 무슨 일이 잘못되어 아주 결딴나거나 형편없이 깨지고 부서질 때 우리는 흔히 ‘작살난다’고 말한다. 이 나무의 가지는 정확하게 서로 마주나기로 달리고 중심 가지와의 벌어진 각도가 60~70°정도로, 약간 넓은 고기잡이용 작살과 모양이 닮았다. 작살나무란 이름은 가지 모양에서 따온 것을 짐작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말 작살나무로 작살을 만들어 쓰는 것은 아니다. 비중이 박달나무와 거의 맞먹을 만큼 무겁고 단단하긴 하지만 물의 부력 때문에 작살을 만들 수는 없다.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만나는 작살나무는 다 자라도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정도의 작은 나무다. 좋아하는 자람터는 습기가 많은 구석진 곳이지만 조금 메마른 땅도 심어두면 운명처럼 적응하고 잘 자란다. 조그만 정원이라도 가진 분들이라면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작살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을에 종자를 따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봄에 심으면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다.
작살나무는 좀작살나무와 새비나무를 포함하여 3종류가 우리나라에 자란다. 서로 비슷하게 생겼으나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구별해 낼 수 있다. 작살나무는 잎의 가장자리 전부에 톱니가 있고, 열매의 지름이 4~5mm 정도로 다른 종류에 비하여 좀 굵은 편이다. 좀작살나무는 잎의 가장자리 절반 이상에만 톱니가 있고 열매는“좀” 자가 붙은 것처럼 지름이 2~3mm 정도로 작살나무보다 훨씬 작다. 우리 주위에 흔히 심은 것은 열매가 더 앙증맞은 좀작살나무다. 새비나무는 작살나무와 거의 같이 생겼으나 잎의 표면에 털이 있고, 주로 남해안의 섬 지방에만 자란다. 이들 외에 열매가 우유 빛인 흰작살나무도 원예 품종으로 개발되어 심고 있으나, 작살나무는 역시 보라구슬을 달고 있어야 제격이다.
15.머루
고려시대의 가요인 청산별곡에
‘살어리 살어리랏다/청산에 살어리랏다/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고 하였다.
강원도아리랑에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산중의 귀물(貴物)은 머루나 다래, 인간의 귀물은 나 하나라…’하여 머루와 다래는 예부터 산 속 깊숙이 자라는 야생과일로 사랑을 받아왔다.
머루는 힘들여 가꾸지 않더라도 얼기설기 나무 덩굴을 이루고 알알이 열매를 매단다. 그래서 복숭아나 자두처럼 집 앞에 심어놓고 풍류를 즐기는 양반들의 간식이 되는 귀족과일이 아니라 머루는 아무나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배고픈 서민들이 양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마음 놓고 따먹을 수 있는 고마운 서민의 과일이었다.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 먹기에 부담스러우면 머루주를 담아 약용으로 마시기도 하였다. 어린 새순이나 연한 잎을 나물로 먹었으며 줄기는 단단하고 탄력성이 좋아 지팡이 재료로도 애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머루라고 부르는 나무는 머루 이외에도 왕머루, 까마귀머루, 새머루, 개머루가 있다. 특히 머루와 왕머루는 아주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렵다. 잎의 뒷면에 적갈색 털이 있는 것은 머루이고, 털이 없으면 왕머루이다. 그러나 실제로 산에서 이 둘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우리나라 산에는 왕머루가 훨씬 많으니 우리가 그저 머루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왕머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머루와 포도는 생김새에서도 짐작이 가듯이 친형제나 다름이 없다. 머루의 잎이 5개로 얕게 갈라지는데 비하여 포도는 3~5개로 얕게 갈라지는 것이 주요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머루를 나타내는 한자에 영욱(蘡薁), 목룡(木龍)이라는 말이 있으나 재배하는 포도(葡萄)와 엄밀하게 구분하여 쓰지 않았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인 포도는 유럽에서 개량하여 기원전 3천년부터 벌써 심기 시작하여 인류최초의 재배과일이다. 우리나라에 포도가 들어온 시기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의 와당(瓦當)이나 전(塼)에 흔히 포도 무늬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을 통하여 삼국시대 이전에 벌써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 이색의 목은집에 포도가 비치기도 하며 조선조에 들면서 과일로 재배되기도 하였으나 그리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포도가 일반화 된 것은 개화이후이다.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포도 알에 얽힌 꿈을 보는 듯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고 읊조리고 있다.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포도의 설명에 보면 ‘열매에는 자줏빛과 흰빛의 2가지가 있는데 자줏빛이 나는 것을 마유(馬乳)라 하고 흰빛이 나는 것을 수정(水晶)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쓰임새는 ‘뼈마디가 쑤시고 저리는 병(습비,濕痺)과 임질을 치료하고 오줌이 잘 나가게 하며 기를 돕고 의지를 강하게 하며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포도뿌리는 ‘달여 그 물을 마시면 구역과 딸꾹질이 멎고 임신한 후 태기가 명치를 치밀 때에 마시면 곧 내려간다.’하였다. 설마 요즈음처럼 화학비료에, 농약에 찌든 포도뿌리를 달여 먹으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16. 미루나무
‘공동경비구역 JSA‘는 몇 년 전 남북화해 무드를 타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린 영화로 유명하다. 민족의 비극이 응어리져 있는 이곳 판문점, 1976년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광복절이 며칠 지난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 내 연합군 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였는데,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세계의 눈은 모두 이 미루나무에 모아지고 죄 없는 우리 국민들은 혹시라도 전쟁이 날까봐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듯하다가 며칠 후 간신히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미루나무가 지구상에 나타나고 이만큼 집중조명을 받은 일은 전에도 앞으로도 두고 두고 없을 것이다.
개화 초기에 구라파에서 수입할 때 사람들은 아름다운 버드나무란 뜻으로 미류(美柳)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국어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 어느 날 미루나무가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양버들’이란 나무도 대량으로 같이 들어오면서 두 나무의 이름에 혼동이 생겼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버린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줄기는 곧고 잔가지는 모두 위를 향하여 마치 빗자루를 세워둔 것 같은 모양의 나무가 양옆에 사열하듯이 서있는 길을 어쩌다가 만나게 된다. 이 나무는 양버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루나무라고 알고 있다. 지금의 가로수가 은행나무나 버즘나무인 것과는 달리 개화기의 신작로(新作路)에는 키다리 양버들이 흔히 심겨졌다.
나병을 앓으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쓴 한하운은
‘전라도 길‘에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이라 하였다.
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의 옛 황토 길의 양옆에 심겨진 양버들을 두고 시인은 버드나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고 차량이 많아지면서 가로수로 적당치 않아 거의 없어졌다.
전국에 심고 있는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로서 키가 30m, 지름이 한 아름도 훨씬 넘게 자랄 수 있다. 나무껍질은 세로로 깊이 갈라져서 흑갈색으로 되고 작은 가지는 둥글며 노랑 빛이지만 2년 가지는 회갈색으로 된다. 잎은 대체로 삼각형이며 넓이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에 가장자리는 잔톱니가 있다. 암수 딴 나무로 꽃은 꼬리모양 꽃차례에 달리고 작은 종자가 노랗게 익는다.
생장이 빨라 나무는 연하고 약하여 힘 받는 곳에는 쓸 수 없다. 주로 성냥개비, 나무젓가락, 가벼운 상자, 펄프원료로 이용되는 것이 전부다. 원래 산에 심어 나무로 이용하자는 목적이 아니었으니 가로수로 제 기능을 다 하였다면 이 정도 쓰임새로도 아쉬움이 없다.
미루나무와 양버들은 일반인들이 혼동할 만큼 비슷하게 생겼다. 미루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지며 잎의 길이가 지름보다 더 길어 긴 삼각형 모양이고, 양버들은 윗가지가 퍼지지 않아서 커다란 빗자루 같으며 잎은 길이가 지름보다 더 짧아 밑변이 넓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태리포플러도 미루나무와 혼동되는데, 새잎이 붉은 빛이 돌고 하천부지 등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것은 주로 이태리포플러이다.
17.석류
중국의 한 무제 때인 기원전 126년 장건(張騫)은 13년간에 걸친 서역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석류를 처음 가져왔다. 이후 중국에 널리 퍼졌고 아름다운 꽃과 독특한 열매 때문에 수많은 시가(詩歌)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고 고려자기의 문양으로도 쓰인 것으로 보아 고려 초 이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석류꽃은 꽃받침이 발달하여 몸통이 긴 작은 종(鐘)모양을 이루며 끝이 여러 개로 갈라지고 6장의 꽃잎이 진한 붉은 빛으로 핀다. 이런 꽃 모양을 보고 송나라의 왕안석은‘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萬綠叢中紅一點)...’이라고 노래하였다. 석류꽃의 아름다움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뭇 남성 속의 한 여인을 말하는‘홍일점’의 어원이 된 것이다.
석류 열매가 익어 가는 과정은 아이에서 어른까지 차츰 커져 가는 음낭과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 석류꽃과 열매의 이런 특징들은 다산(多産)의 의미와 함께 음양의 상징성이 있어서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여러 가지로 쓰였다.
조선시대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唐衣), 왕비의 대례복, 골무, 안방가구 등에 석류문양이 단골 메뉴로 들어갔다. 또 비녀머리를 석류꽃 모양으로 새긴 석류잠(石榴簪)을 꽂았는가 하면 귀부인들이 차고 다니던 향낭(香囊)은 음낭을 상징하는 석류열매 모양으로 만들었다.
석류는 중국이나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Exodus 28:33)에는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의 겉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이 있다. 포도와 함께 석류는 성서에도 여러 번 등장하며 솔로몬 왕은 석류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한다. 기독교의 종교화(宗敎畵)에서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로서 묘사되기도 하며 15세기 유명한 이태리화가 보티첼리의 ‘성모의 석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인도의 전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자기 새끼를 1천명이나 가진 마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잔인하게도 사람들의 아이를 보기만 하면 거침없이 잡아먹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엄마들은 부처님에게 달려가 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부처님은 수많은 마귀의 새끼 중에 딱 한 마리만을 골라 몰래 숨겨버렸다.
마귀는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면서 비로소 그 많은 자식 중에 단 한 마리를 잃었어도 마음의 쓰라림은 꼭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새끼를 돌려주면서 부처님은 아이 대신 석류를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석류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남부지방에 잘 자라며 높이 3~5m정도의 작은 나무이다. 가지가 많이 나오고 잎은 마주나며 잎자루가 짧다. 꽃은 5~6월에 피고 가지 끝의 짧은 꽃자루에 1~5개씩 달리며 대부부분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다. 열매는 얇은 칸막이가 된 6개의 작은 방이 있으며 종자는 새콤달콤한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먹을 수도 있고 청량음료의 재료로도 사용된다. 동의보감에는 목안이 마르는 것과 갈증을 치료하는 약제로 석류가 쓰인다고 한다.
18.광대싸리
광대란 가면극, 인형극,·줄타기, 땅넘기 재주,·판소리 따위를 잘하던 직업적 예능인을 통틀어 이르던 옛말이라고 국어사전에 씌어 있다. 지금의 연예인을 낮추어 부르는 다른 말이기도 하며 흉내를 잘 내고 재담을 잘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광대싸리는 언뜻 보아 나무의 모양새가 싸리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바로 광대처럼 싸리나무 흉내를 잘도 내었다고 광대싸리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북한 이름은‘싸리버들옻‘이다. 우리가 짐작도 할 수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다르다. 아마 신성한 노동계급의 하나인 광대를 불경스럽게 나무 이름에 붙일 수는 없었을 터이다. 이 나무가 속하는 대극과(大戟科)의 나무 무리를 북한에서는 버들옻과(科)라고 하니 싸리를 접두어로 하고 과 이름을 뒤에 붙인 합성어인 것 같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자라는 작은 나무이고 키가 2~3m에 손가락 굵기가 고작이나 드물게는 발목 굵기에 이르기도 한다. 잔가지가 많으며 끝이 밑으로 늘어진다. 메추리 알 보다 약간 큰 긴 타원형의 잎이 어긋나기로 달리고 앞면은 진한 녹색이며 뒷면은 흰빛이 돈다. 싸리나무는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 잎이 달리는 3출엽(三出葉)이 특징이나 광대싸리는 잎이 하나 씩 달리므로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아무리 싸리 흉내를 잘 내었어도 금세 찾아 낼 수 있다.
어린 싹을 나물로 먹기도 하며 민간약으로는 소아마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도 쓰인다. 그러나 가장 큰 옛 쓰임새는 화살재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는 전통 화살은 흔히 산죽으로 불리는 조릿대, 신이대, 이대 등으로 만든 대나무 화살이었다. 산죽은 종류에 따라 함경북도까지 분포하나 추운 지방으로 갈수록 품질이 나빠져 싸리나무와 광대싸리를 대신 사용하였다.
광대싸리는 다른 이름으로 서수라목(西水羅木)이라고도 한다. 두만강이 동해로 빠지는 끝자락, 지금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나진 선봉지구에 ‘서수라’라는 곳이 있다. 조선 세종 때 북동방면의 여진족 습격에 대비하여 개척한 육진의 출발점 경흥 땅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 서수라를 지키는 군사들은 대나무 화살이 아니라 주로 광대싸리 화살을 사용하였으므로 ‘서수라의 화살’에 쓰는 광대싸리가 바로 서수라목이 된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 31년(330)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광대싸리 화살을 주었다(致其楛矢)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호(楛)는 싸리나무로도 볼 수 있으나 휨이 잘 되지 않고 단단한 광대싸리가 맞을 것 같다. 고구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광대싸리나 싸리나무를 화살대로 쓴 반면에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 지면서는 주로 대나무 화살을 사용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신라 경명왕2년(918)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공작부채와 죽전(竹箭)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뒤편으로 돌아가면 경복궁 중건 때 지어진 빈전(殯殿, 발인 때까지 왕과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으로 지어진 태원전(泰元殿)이 있던 곳이다. 독재정권시절의 유명한‘30경비사’가 자리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복원공사를 하느라 주변이 모두 흐트러져 흔적을 찾기도 어려우나, 자그마한 돌다리 옆에 궁궐 내에서는 가장 큰 광대싸리가 겁도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권력이 총구가 아니라 화살에서 나오던 시절에는 꽤나 대접을 받았을 것이나, 지금은 그냥 평범한‘잡목’취급을 받아 복원공사를 하면서 흔적도 없이 잘려 나가 버렸다.
19.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
지금부터 3~40여 년 전의 우리나라 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취사와 난방에 나무를 사용하던 시절이니 산에 나무가 남아 날 수가 없어서다. 경제발전이 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산을 푸르게 하고 목재로서도 값어치가 있는 나무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 일의 연구를 맡은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 고 현신규 교수는 우선 자람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빠른 이태리포플러를 수입하여 심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수분이 많은 평지나 강가에 밖에 심을 수 없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 산에서도 빨리 자라는 나무가 없을까? 고심하던 그는 새 나무를 만들어내는 일에 눈을 돌린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유럽이 원산지인 은백양 암나무에다 수원의 여기산 부근에서만 자생하는 재래종 수원사시나무 수나무를 인공적으로 교배하여 새로운 나무를 탄생시켰다. 여러 번의 실제 적응시험에서 이태리포플러보다 오히려 산지에서는 더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지구상에 처음 탄생한 나무는 아빠 이름인 수원사시나무에다 엄마 이름에서 따온 ‘은‘을 붙여 은수원사시나무란 새로운 이름이 만들어졌다. 학명에도 두 수종을 교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간에 x를 넣어 'Populus alba x glandulosa'로 나타내었다.
은수원사시나무는 1968년부터는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었고, 1972년 식목일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이 나무 심기를 권장하자 전국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979년에는 박대통령이 은수원사시나무란 이름보다는 개발자 현신규교수의 성을 따 ’현사시나무‘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나무 이름을 붙이는 원칙을 무시한 의견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대통령의 말씀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관공서를 중심으로 현사시나무로 바뀌어 불리면서 은수원사시나무는 이름 둘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널리 심겨진 탓에 오늘날 우리가 겨울 산에서 하얀 껍질의 꺽다리가 줄줄이 버티고 서 있는 멋쟁이 나무로 흔히 만난다.
그러나 심은 지 30여년이 된 지금은 빨리 자라는 나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이 나무를 베서 이용하려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나무의 재질이 당초의 예상보다 좋지 못하고 가장 큰 사용처 였던 나무젓가락 수요도 줄어들면서 목재로서의 값어치는 상당히 떨어져 버렸다.
그 외 또 다른 문제도 생겼다. 봄날의 골칫거리 꽃가루(?)가 날린다는 것이다. 사실 은수원사시나무에서 흩날리는 하얀 솜털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가 아니라 씨앗의 깃털이다. 이 깃털이 코나 눈으로 직접 들어가면 재채기나 잠깐 가려운 증상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깃털이 날아다는 그 자체를 싫어하니 이 나무를 곱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은수원사시나무는 꽃가루가 맺지 않는 암나무만 골라 심을 수가 없다. 원래 사시나무 종류는 암수가 다른 나무인데, 은수원사시나무는 은백양 암나무와 수원사시나무 수나무를 교배하였으므로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같이 달리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통령까지 나서서 장려하던 은수원사시나무는 이제 심기를 중단한 상태이며 다 자란 나무들도 이용할 사람이 없어서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쓰임 정도로 산자락의 한 구석에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중북부 지방에 널리 자라는 진짜 사시나무와 황철나무를 비롯하여 수입하여 심고 있는 미루나무, 양버들, 은백양, 이태리포플러등이 모두 사시나무의 집안 식구들이다.
사시나무 종류들은 모두 자람이 빠르고 아무 곳이나 잘 자라므로 옛사람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 하얀 나무껍질을 갖는 경우가 많아서 백양(白楊)이란 이름으로 고문헌에 흔히 등장한다. 그래서 나무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사시나무란 이름보다 백양나무란 이름에 더 익숙하다.
20. 감탕나무
제주도와 남해안에 걸쳐, 주로 난대림에 자라는 감탕나무란 이름의 나무가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나무다. 하지만 나무나라에서는 감탕나무과(科)라는 3백종이 넘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집안의 맏형이다. 우리나라에는 먼나무,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 대팻집나무, 수입종인 낙상홍과 함께 ‘감탕나무속’이란 작은 가계를 만들었다. 서양에서는 ‘Ilex'라고 하여 호랑가시나무를 대표로 내세우는 유명한 집안이다. 이들은 꽝꽝나무를 제외하면, 모두 작은 콩알 굵기의 빨간 열매와 반질거리는 도톰한 잎이 특징이다. 특히 감탕나무는 초록 잎을 캔버스로 하고 열매는 정열적인 붉은 물감을 뿌려둔 것처럼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찍부터 감탕나무의 값어치를 인정하여 널리 심고 가꾸어 온 탓에 조경수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감탕나무속의 나무들은 모두 암수가 다르므로 열매가 달리는 것은 당연히 암나무다. 감탕나무는 아름드리로 크게 자랄 수 있어서 가까운 친척 중에는 가장 우람한 체격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는 보길도 앞의 작은 섬 예작도에 가슴높이 둘레 2.7m, 뿌리목 둘레가 3.3m, 높이 11m나 되는 감탕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감탕나무의 잎은 어긋나기로 붙고 두터우며 톱니가 없어 매끄럽다. 잎 표면은 짙은 녹색으로 광택이 있고, 잎 뒤는 노란빛이 도는 담녹색이다. 대팻집나무와 낙상홍은 낙엽수로서 중부지방까지 자랄 수 있으나 나머지 수종들은 상록수이며 추운 것을 싫어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다.
감탕나무란 이름은 감탕에서 유래되었다. 감탕이란 아교와 송진을 끊여서 만든 옛 접착제를 말한다. 나무껍질에서 끈끈이로 썼던 ‘감탕’을 얻을 수 있다하여 감탕나무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 이런 쓰임이 흔적도 없어졌지만, 옛날에 자원식물로의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감탕의 쓰임에 대한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인들은 새를 잡은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이 나무를 ‘떡나무’란 뜻의 '모찌노끼(もちのき)'라고 부른다. 5,6월경 감탕나무나 먼나무의 껍질을 벗겨 가을까지 물속에 담가둔다. 필요 없는 겉껍질은 분리되거나 썩어버리고 점액물질이 포함된 안 껍질만 남는다. 절구로 찧은 다음 물로 3~4회 정도 반복하여 씻어내면 황갈색의 끈적끈적한 점액물질만 남는데, 이것을 정제한 것을 새떡(도리모찌, とりもち)이라고 하였다. 이름 그대로 새를 잡는데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감탕나무의 일본이름은 원래 새떡나무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접두어 ‘새’가 빠지고 떡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에도시대(1603~1867)에는 통에 넣어 시장에 내다팔기도 할 만큼 흔히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새잡이에 감탕나무 껍질을 사용하였는지는 증명할 만한 명확한 자료가 없다.
도리모찌로 새를 잡는 방법은 이렇다. 새가 좋아하는 먹이를 뿌려놓고 도리모찌를 두껍게 발라둔다. 먹이를 먹으려고 날아온 작은 새들은 서서히 발목까지 빠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퍼덕거리다가 결국 날개까지 점액이 묻어서 꼼짝없이 붙잡힌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필자가 보아온 우리의 참새 잡이는 조금 참혹하였다. 지게에 얹어 짐을 담은 ‘발채’를 높이 한 뼘 남짓한 가느다란 받침목으로 받쳐서 비스듬히 누이고 위에 돌을 올려놓는다. 밑에 먹이를 뿌린 다음 긴 줄을 늘어트린다. 문틈으로 망을 보고 있다가 참새가 들어가면 잽싸게 줄을 잡아당겨 압살시키는 방법이다. 어찌 보면 감탕나무로 만든 도리모찌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일본식 보다, 순식간에 압살시켜버리는 우리의 참새잡이 방식이 참새의 입장에서 보면 더 깔끔하다고 할지 모른다.
21.이나무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국립공원,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나무 앞에 ‘이 나무가 이나무입니다’라는 팻말이 하나 붙어있다. ‘이나무’란 독특한 이름의 나무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제목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미있는 발상이다. 남부지방에 가면 이나무란 나무가 실제로 있다. 국공립공원에서 흔히 만나는 과 이름, 학명, 용도...로 시작되는 천편일률적인 나무 설명 팻말에 신물 난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나무는 재질이 부드러우면서 질기고 나무속은 거의 흰빛에 가깝다. 목재는 세로로 쪼개기를 해보면 나뭇결이 어긋나지 않고 곧 바로 잘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톱을 쓰지 않아도 비교적 매끈한 판자나 각재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손으로 모든 가공을 하던 시절에는 이런 나무 성질은 의자를 비롯한 각종 기구를 만드는데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옛 이름은 의나무(椅木)이었다가 차츰 발음이 쉬운 이나무로 변한 것이다.
이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제주도와 남서해안을 따라 주로 자라고, 북으로는 충청남도까지 올라오는 낙엽활엽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식물학적으로는 이나무과라는 작은 집안을 대표하는 얼굴나무다. 학명 ‘Idesia polycarpa’에서 종의 이름은 많다는 뜻의 ploy와 과일을 말하는 carp가 합쳐서 만들어져있다.
이나무는 자람 터인 난대림의 숲속에서 쉽게 만 날수 있는 흔한 나무는 아니다.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띄엄띄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걸쳐 가지마다 머루 송이처럼 길게 매달리는 붉은 열매가 모습을 들어 낼 때 비로소 그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나마 암수가 다른 나무이므로 수나무는 그냥 숲속의 나무로 남아 있어서 더 더욱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황록색의 작은 꽃이 피고 나면, 지름 8mm남짓한 붉은 열매가 매달린다. 열매는 단맛도 새큼한 맛도 기름 끼도 없는 그냥 그런 맛이다. 자손 퍼트림을 새들에게 의존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가을날에는 맛있는 다른 나무의 열매가 충분해서다. 그러나 이나무는 새를 끌어드리는 전략이 다르다. 열매는 겨울바람이 더세 져 다른 열매들은 대부분 떨어져 버려도 거의 그대로 매달려 있도록 설계했다. 늦게 까지 열매가 남겨두어 한 겨울날의 배고픈 산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함으로서 경쟁자들을 따돌리자는 것이다. 아울러서 당분이나 기름과 같은 고단위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여 많은 열매를 매달겠다는 깊은 뜻도 함께 숨어있다.
이나무의 매력은 이렇게 열매가 달릴 때만은 아니다. 우선 나무 전체의 모습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아하다. 층층나무와 비슷하게 가지가 방사상으로 돌려나기하면서 규칙 바른 수관을 만든다. 껍질은 잿빛이 조금씩 섞이기도 하지만 속살처럼 대체로 밝은 빛에 가까우며, 나이를 웬만큼 먹어도 갈라지지 않고 젊은 피부를 그대로 갖고 있다. 몸매도 쭉 뻗었다. 그러나 미인박명,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나무 줄기는 하늘소가 유난히 좋아하는 탓에 오래 된 고목 보기가 어렵다.
거의 한 뼘이나 됨직한 붉은 빛이 강한 긴 잎자루 끝에는 하트모양의 커다란 잎사귀가 붙어 있다. 잎의 뒷면은 하얗고 가장자리에는 둔한 톱니가 있다. 손바닥을 펼친 크기만큼이나 넉넉하여 옛 사람들은 잎이 넓은 오동나무를 연상하여 의동(椅桐)이라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밥을 쌀 만큼 큰 잎사귀를 가진다고 하여 반동(飯桐)이다. 이래저래 자랑거리가 많은 이나무는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22.먼나무
가을이 무르익어 갈 즈음, 제주도에 들어간 관광객들은 콩알 굵기의 빨간 열매를 수천 개씩 달고 있는 아름다운 가로수에 감탄한다. 안내원을 붙잡고 물어본다. ‘저 나무 먼(무슨) 나무?’ 돌아오는 답이 ‘먼나무’다. 우스개가 아니라 진짜 이름이 먼나무다. 그래서 먼나무는 영원히 이름을 모르는 나무라고도 한다.
멀리서 보아야 진짜 나무의 값어치를 알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일까? 그러나 가까이 보아도 매혹의 자태는 잃지 않는다. 그 보다는 잎자루가 길어 잎이 멀리 붙었다고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잎자루 길이는 생김새가 비슷한 감탕나무와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감탕나무는 잎자루가 짧아 잎이 가깝게 붙어있다.
먼나무는 진한 회갈색의 매끄러운 껍질을 가지고 약간 반질반질한 맛이 나는 두꺼운 잎을 달고 있는 늘 푸른 나무다. 아름드리로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이며, 우리나라의 제주도를 포함하여 일본남부에서 타이완을 거쳐 중국남부까지 따뜻한 곳에 자람 터를 마련했다. 대부분의 조경수들은 꽃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먼나무는 여름에 손톱크기 남짓한 연보라 꽃이 피기는 하지만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먼나무의 매력은 꽃이 아니라 열매다. 가을이면 연초록빛의 잎사귀 사이사이로 붉은 열매가 커다란 나무를 온통 뒤집어쓰고, 겨울을 거쳐 늦봄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다. 늘 푸른 나무 천지로 자칫 심심해지기 쉬운 제주의 겨울나무에 악센트를 주는 매력은 먼나무 열매 덕분이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열매는 물론 암나무에만 달린다.
거의 반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열매를 힘들게 매달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종족보전을 위한 투자다. 아무리 열매를 많이 매달아도 멀리 옮겨가는 수단을 개발해 두지 않으면 기껏 어미나무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 끝이다. 더 멀리 미지의 땅에 자손을 퍼뜨리기 위하여서는 새와의 전략적인 제휴가 필요했다. 산새들새는 겨울 내내 배고픔에 시달린다. 겨우살이에 필요한 만큼 먹을거리를 제공할 터이니 종자는 멀리 옮겨달라는 계약이 성립한 것이다. 아무리 이익을 주고받은 계약이라도 상대를 꼬여낼 매력이 있어야 한다. 새들이 색깔을 알아채는 방식은 사람과 비슷하여 파장이 긴 빨강색에 더욱 민감하다. 금세 눈에 띄도록 짙푸른 초록 잎 사이로 수많은 빨강 열매가 얼굴을 내미는 디자인을 했다. 물론 새의 소화기관을 지나는 사이, 종자는 그대로 남도록 하는 설계도 잊지 않았다. 먼나무의 이런 영특함 덕분에 겨울 제주의 풍광이 더 아름다워진다.
먼나무는 감탕나무, 대팻집나무, 호랑가시나무, 일본에서 수입한 낙상홍등과 함께 'Ilex'로 불리는 유명한 집안의 자손이다. 서양호랑가시나무로 대표되는 이들 집안은 대부분 붉은 열매로 가문을 빛내는 나무들이다.
우리는 먼나무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은 흑자색감탕나무란 뜻으로 ‘クロガネモチ’라고 한다. 잎자루와 어린 가지가 검정보랏빛을 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름에서 나무의 특징은 알아 챌 수는 있지만 먼나무란 우리의 이름이 더 낭만적이고 멋스럽다.
23.담팔수
제주도 서귀포 구시가지에 자리 잡은 천지연 폭포, 울창한 난대림 숲으로 둘러싸인 폭포의 주변은 일상의 번뇌를 잠시나무 잊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수많은 상록수로 하늘을 가리는 숲 속에는 담팔수(膽八樹)라는 생소한 이름의 나무 몇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담팔수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 오키나와, 타이완, 중국남부 등 난대에서 아열대에 걸쳐 자라는 늘 푸른 나무다. 아름드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름 20cm에 높이 10여m까지는 자란다. 잎은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길고 너비도 손가락 굵기보다 약간 넓은 긴 타원형이다. 잎이 도톰하고 가장자리에 잔잔한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는 초록빛을 나타내는 것은 흔히 보는 늘 푸른 나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담팔수 잎은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1년 내내 초록 잎만으로는 너무 심심하다고 빨간 잎을 가진 단풍이 몇 개씩 꼭 섞여있는 것이다. 담팔수가 특허 낸 잎갈이의 방식이다. 늘 푸른 나무라고 하여 한번 만들어진 잎이 평생 그대로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여느 나무처럼 가을철 한꺼번에 잎이 지지 않을 따름이지 늘 푸른 나무도 나무마다 자기 방식대로 잎갈이를 한다. 소나무 종류는 오래된 잎이 황갈색으로 물들어 차츰 낙엽 지는 현상을 볼 수 있고, 사철나무도 봄이 새잎이 나오면 묵은 잎은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담팔수는 진초록의 잎사귀 중에서 계절에 관계없이 하나 둘씩 빨갛게 단풍이 든다. 1년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잎갈이를 계속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담팔수란 이름과 연관을 지운다. 제주도 관광가이드는 여덟 잎 중에 하나는 항상 단풍이 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나뭇잎이 여덟 가지 빛을 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이 명확한 기록을 해두지 않은 이상 이름의 연유는 어차피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담팔수(膽八樹)란 중국이름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모습에서 이름까지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두는 매력적인 남국의 나무, 보호받고 아껴야 할 값어치가 있는 나무다.
여름에 들어서는 6~7월에 걸쳐 꼬리모양의 긴 꽃차례에 작은 꽃이 하얗게 핀다. 열매는 안에 딱딱한 씨가 들어 있는 핵과이며 손가락마디만 것이 처음에는 초록색이다가 익으면 검푸른 빛이 된다. 속명(屬名) Elaeocarpus는 Elaeo가 올리브, carpus 는 열매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일본이름은 ‘호루도노끼(ホルトノキ)’인데, 포르투갈의 나무란 뜻이다. 올리브가 일본에 처음 들어올 때 포르투갈 기름이라고 불렀으며, 열매가 얼핏 보아 올리브 열매처럼 생긴 탓이라고 한다. 담팔수는 자라는 지역이 비슷한 소귀나무와 너무 닮아 있다. 소귀나무는 붉은 단풍잎이 섞이는 일이 거의 없고 잎의 가장자리가 담팔수와는 달리 매끈하여 톱니가 없다.
담팔수는 자연상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사람들이 잘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겨우 살아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특별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는 천지연 폭포 서쪽 언덕에 자라는 4그루이다. 높이가 약 9m 정도이며 뒤쪽이 급한 경사지여서 가지가 물가를 향해 퍼져 있다. 원래 5그루 이었으나 2002년 루사 태풍 때 한 그루가 없어져 버렸다. 아열대 식물인 담팔수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이므로 자생지는 식물분포학상 연구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이외에도 천제연폭포 계곡 서쪽 암벽에는 ‘제주도 시도기념물 14호 천제연 담팔수나무‘가 있으며, 안덕계곡과 섶섬에도 자라는 곳이 있다.
24.굴거리나무
굴거리나무는 중북부지방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다. 남해안에서 섬지방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는 난대지방에 주로 자라는 늘 푸른 나무로서 잘 만날 수 없어서다. 아름드리가 되는 큰 나무는 아니지만 높이 10여m, 지름은 10~30c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만나는 나무는 팔목 굵기에 높이 3~4m가 고작이다. 잎은 아기 손바닥 넓이에 길이가 20cm남짓한 긴 타원형이고 두꺼우며 가지 끝에 방사상으로 모여 달리고 있다. 잎 표면은 짙은 녹색이고 뒷면은 흰빛이 돈다. 손가락 길이만한 잎자루가 언재나 붉은 색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자람 터인 남부지방의 등산길에서도 쉽게 만나지는 나무는 아니다. 집단적으로 자라는 곳은 따로 있다. 알려진 자람 터로는 가장 남쪽으로 제주도 돈네코계곡이고 가장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내장산이다. 내장산의 굴거리나무는 케이블카를 타면 5분이 채 안되어 군락이 시작되는 연자대 전망대에 내려준다. 내장사 절 쪽으로 내려가는 길옆으로 다른 활엽수와 섞여서 자라는 모습은 분포분한지라는 식물분포학적인 중요성외에도 잎 떨어진 겨울 내장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천연기념물 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나무의 한자 이름은 우리와 중국, 일본 모두 교양목(交讓木)이다. 일본인들의 이름 해석은 이렇다. 새잎이 나오기 시작하여 제법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묵은 잎은 일제히 떨어져 버린다. 마치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던 가장이 다 자란 자식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버리고 은퇴하는 모습과 비유할 수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녹나무 종류도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독 굴거리나무에게만 이런 해석을 내리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다. 일본인들은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맞으면서 집안을 장식할 때 굴거리나무 잎을 깐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굴거리나무에 얽힌 특별한 민속은 없지만, 제주도의 유명한 민속학자 진성기씨가 수집 편찬한 <제주민요 선집>의 자탄가(팔자노래 43)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물랑 지건 산짓물 지곡/낭기랑 지건 돔박낭(동백나무)지라/
나 인성은 굴거리 인싱/밖앗드론 넙은 섶 놀려/쏙엔 들언 피 골라서라’
뒷부분을 잠깐 훑어보면 ‘나 인생은 굴거리나무 인생인데, 바깥으로는 넓은 잎 휘날려도 속에는 피가 괴었더라.’라는 내용이다. 푸른 잎사귀로 장식된 나무속에는 붉은 빛이 들어있어서일 것이다. 굴거리나무는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잎이 나올 때 잎겨드랑이에 꽃이 핀다. 암꽃은 연초록, 수꽃은 갈색으로 때로는 붉은 색이 강한 적갈색을 띤다. 가지 끝에 모여 달리는 잎자루 역시 붉은 빛이니 속으로 피멍이 들어가는 아픈 가슴을 이렇게 비유한 것 같다. 그만큼 흔하고 팔자타령에 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필자는 나무이름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본다. 옛 사람들이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흔히 굿판을 벌린다. 이 나무는 ‘굿거리’를 할 때 잘 쓰여서 굴거리나무가 된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된다. 또 굴거리나무는 만병초의 잎과 비슷하여 예부터 약제로 쓰이던 나무이다. 병이 들면 약도 먹고 굿도 하였을 것이니 굿거리에 쓰인 나무일 가능성은 더욱 높다.
원래 대극과란 집안에 들어 있었으나 최근 굴거리나무과란 새로운 가계를 만들어 독립하였다. 좀굴거리나무와 달랑 둘이 만든 단출한 집안이지만 나무의 여러 형태가 대극과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이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25.히말라야시다
히말라야시다는 이름 그대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을 고향으로 하는 나무다. 대체로 히말라야는 눈 덮인 만년빙하를 상상하나 산맥의 끝자락은 습하고 따뜻한 아열대에 가까운 지역이 많다. 인도에서 본다면 서북쪽, 산맥 자락의 따뜻한 땅에 수 만 년 전부터 둥지를 틀었다. 원산지에서는 대부분의 침엽수가 그러하듯, 무리를 이루어 자기들끼리의 숲을 만든다. 나무 하나 하나는 땅에 거의 닿을 듯이 아래부터 늘어진 가지가 사방으로 길게 뻗으며 위로 갈수록 차츰 짧아져서 전체적으로 원뿔모양의 아름다운 자태를 만든다. 히말라야시다는 자연 상태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자연미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를 마음대로 잘라주어도 별 탈 없이 다시 가지를 뻗고 잎을 내밀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주는 특징이 있다. 심하게는 푸들 강아지 마냥 가지 몇 개만 남겨서 동글동글 잘라주어도 그대로 잘 참고 자라준다. 이런 나무의 특성은 고향인 인도에서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조경수로서 추운 지방을 제외하면 세계 어디에나 심고 가꾸는 나무가 되었다. 일본 원산인 금송(金松)과 아라우카리아(araucaria)라는 열대 침엽수를 넣어 세계 3대 미수(美樹)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경 수입하여 대전 이남의 따뜻한 지방에 주로 심고 있다.
대구의 동대구로에 심겨진 히말라야시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가꾸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이 이 나무를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그때 처음 조성된 동대구로에 가로수로 심어 오늘의 히말라야시다 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나무가 크게 자라면서 시민들의 안타까움도 아랑곳없이 바람에 잘 버티지 못하고 큰 덩치가 맥없이 넘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원인은 천근성(淺根性) 나무로 뿌리가 옆으로만 뻗고 깊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원산지에서야 무리 지어 자라므로 설령 센바람이 분다고 하여도 서로 의지하여 잘 버티어 주고, 원뿔형의 나무모양은 무게중심이 거의 땅에 있어서 뿌리가 얕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로수로 심은 히말라야시다는 통행하는 자동차나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래쪽 가지를 자꾸 잘라버려 무게 중심이 위쪽에 가 있다. 집단 자람의 특성도 무시하고 한 나무씩 심어 두었으니 바람에 버틸 힘이 없다. 궁여지책으로 긴 쇠파이프 말뚝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주었지만 보기도 싫을뿐더러 태풍이라도 지나갈 때면 시민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관리해 주는 가로수라도 자기 자라던 상태 그대로에 가장 가까운 모양을 유지하여야만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지켜주지 않은 탓이다. 한마디로 가로수로서 히말라야시다는 적당하지 않아서다.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 높이 30m, 지름은 아름드리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잎은 짧은 가지에서는 모여나기 하고 새 가지에서는 한 개씩 달리며 길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바늘모양이다. 잎이 달리는 모양이 언뜻 보아 잎갈나무와 비슷하므로 개잎갈나무라고도 부른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서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걸쳐 새끼손가락만 한 수꽃은 빳빳이 위로 향하여 핀다. 수컷을 상징하는 것 같아 약간 에로틱해 보이기도 한다. 노란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서 수정되는 풍매화로서, 꽃필 때면 나무 근처에 세워둔 자동차 보닛을 꽃가루가 노랗게 덮어버린다. 암꽃은 연한 보라 빛으로 피는데, 짧은 가지에 달리며 너무 작아 찾아내기 어렵다. 수정된 암꽃은 이듬해 늦가을 초록빛을 띠는 회갈색으로 익는다. 솔방울은 타원형이고 당당히 하늘을 향하여 붙어있고 익으면 비늘이 벌어져 종자가 떨어진다.
26.시로미
제주도 한라산의 등산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급경사를 넘어 멀리 정상이 보일 때쯤에 넓은 고원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시로미라는 이름의 땅에 붙어 자라는 작은 나무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로미는 멀리 중국의 진시황과 인연이 있는 나무다.
우선 인연의 끈을 당겨본다. BC 246년 중국 대륙에 최초로 통일국가를 건설한 진(秦)나라의 시황제는, 이후 36년에 걸쳐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전제군주로도 유명하지만 만리장성의 축조, 아방궁, 분서갱유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임금이다. 시황은 나이가 들자 어리석게도 영원히 늙지 않은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다. 선남선녀 500인을 선발하여 서불(西福)이라는 신하의 인솔 하에 멀리 동쪽나라로 보냈다.
2천2백년 전 중국을 떠난 불로초 선단은 우리나라 제주도로 온 것이다. 일행은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여 돌아가는 길에 서귀포의 정방폭포 절벽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서귀포란 이름도 서불이 돌아간 포구란 뜻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정방폭포 옆에는 서불전시관이 건립되어있고, 2005년 가을 부터는 서귀포시에서는 ‘불로초 축제’를 열고 있다.
서불 일행이 찾으려 하였던 불로초는 오늘날의 무슨 식물인가?. 여기에 시로미가 등장한다.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니 물론 짐작일 뿐이다. 원로 식물학자 고 이창복 서울대 교수는 생전에 진시황의 불로초는 시로미일 것이라고 자주 말해 왔다. 시로미의 여러 특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로미는 우리나라 가장 남쪽인 한라산과 북쪽 끝자락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만 자라는 특별함이 있다. 그것도 산자락이 아니라 표고 1,500m이상의 춥고 매몰찬 바람이 불어대는 극한지에서 자란다. 어려움을 극복한 인고의 정성이 나무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으니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나무와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서려있다. 나무는 높이가 20∼30cm에 불과하고 적갈색의 가지가 옆으로 뻗으며 많은 포기를 형성하여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자기들만의 동네를 만든다. 시로미는 늘 푸른 활엽수 나무의 범위에 넣는다. 그러나 잎을 보면 활엽수라는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다. 시로미의 잎은 침엽수인 주목이나 젓나무의 잎 모양에 닮아있기 때문이다. 길이 5∼6mm, 너비 0.7∼0.8mm로서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대체로 10:1정도이다. 다만 잎에 살이 많아 주목의 잎 보다 조금 통통해 보일 뿐이다. 꽃은 가지 끝 잎의 겨드랑이에 달린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며 5월에 자주색의 꽃이 피고나면 곧 지름 5∼6mm의 동그란 열매가 달린다. 처음 초록색으로 출발하여 가을이면 보랏빛이 들어간 검은 색으로 익는다.
익은 시로미의 열매가 바로 강장제-온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영양을 도와 체력을 증진시키는 약-라고 알려져 있다.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술을 담구거나 잼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약간 시고 달콤한 맛이 나는데, 시로미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제주도의 가을 시장에는 시로미열매를 내다파는 아줌마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로미는 자라는 장소에서 나무크기와 잎 모양까지 모두 평범한 나무들이 갖고 있지 않은 다름이 있으니, 그의 정수(精髓)인 열매는 진시황의 불로초로 변신할 만큼 귀중한 약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서불 일행이 구해간 시로미 불로초를 진시황이 자셨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불로장생은 고사하고 불과 마흔아홉의 나이로 순행 길에서 객사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27.돈나무
돈나무란 이름의 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돈과 관련되는 나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돈을 되지 돈(豚)으로 보고 역시 돈나무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돈과 연관을 맺을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돈나무가 자라는 곳은 남부지방이지만 가장 많이 있는 곳은 제주도다. 제주 사투리로 똥낭이라고 한다. 바로 똥나무란 뜻이다. 된 발음이 거북하여 정식 식물이름을 정할 때 순화된 발음 돈나무가 되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차피 돈과 똥은 발음상으로나 실제로나 그렇게 먼 사이가 아니다. 살아가는 데 둘 다 반드시 필요하지만 잘못다루면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돈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와 제주도, 일본, 타이완, 중국남부 일부에 걸쳐 자라는 자그마한 늘 푸른 동양의 나무다. 다 자라도 높이 몇m에 불과하고 지름이 한 뼘이면 아주 굵은 나무에 속한다. 바닷가의 절벽에 붙어 바람에 넘쳐오는 바닷물을 몸으로 뒤집어쓰고도 끄떡없다. 웬만한 가뭄에는 버틸 수 있는 강인한 체력까지 타고난 나무다. 몸체의 여기저기서 가지를 잘 내밀어 자연 상태 그대로 두어도 모양새가 아름다운 나무를 만든다. 사람이 조금만 손을 봐주면 더욱 예쁜 몸새를 자랑하므로, 정원이나 공원에 심어 조경수로 가꾸기에 제격이다. 그래서 중북부 지방에서 흔히 회양목이 심겨지는 자리에 남부지방에서는 돈나무로 대신한다.
잎은 어긋나기지만 가지 끝에 모여 달리는 경향이 강하다.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는 매끈한 잎은 작은 장난감 주걱모양으로서 예쁘고 앙증맞게 생겼다. 도톰하고 윤기가 자르르하여 잠깐씩 비춰주는 남쪽나라의 겨울 햇살을 붙잡기에 모자람이 없다. 돈나무 잎을 비비거나 가지를 꺾으면 악취가 풍기고, 특히 뿌리껍질을 벗길 때 더 심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모양새와 어울리지 않은 냄새는 돈나무의 특기다. 일본사람들은 이런 돈나무 냄새가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여 춘분 때 문짝에 걸어두는 풍습이 생겼다. 그래서 돈나무의 일본 이름은 문짝이란 뜻으로 도베라(トベラ)라고 한다.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5월에 흰 꽃이 피었다가 질 때쯤이면 노랗게 변한다. 꽃에는 약간의 향기가 있으니 이때만은 잠시나마 냄새나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다. 가을에 들면 구슬 굵기의 동그란 황색열매가 달리고 완전히 익으면 셋으로 갈라져 안에는 끈적끈적한 빨간 끈끈이로 둘러싸인 종자가 얼굴을 내민다. 이 점액이 곤충을 꼬이는 포인트다. 날아오는 여러 곤충 중에는 특히 파리가 많다. 끈끈이는 점점 지저분해 지고 나중에는 냄새까지 풍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끈끈이로 종자를 둘러싸도록 진화하였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제법 굵은 종자를 곤충이 멀리 옮겨줄 수도 없으니, 일방적으로 곤충에게 베푸는 것 밖에 없는 셈이다. 자연계에서 이렇게 공짜 서비스만 하는 일은 흔치 않다. 땅에 떨어졌을 때 종자를 보호하는 의미도 있을 터이고, 지나가는 동물의 털에 묻어 멀리 옮겨달라는 깊을 뜻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제주도 사람들은 열매의 이런 특성을 보고 똥낭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끔 똥낭이 돈나무가 된 사연은, 제주도에서 이 나무의 이름을 처음 들은 일본인이 ‘똥’자를 발음 못하고 ‘돈’으로 알아들어서 돈나무가 되었다는 풀이도 한다.
돈나무는 돈나무과(科)라는 큰 집안에 달랑 혼자만 들어있다. 3천종이 넘는 대식구를 거느린 장미과와 비교하면 외아들로 이어지는 너무나 외로운 가계다. 학명은 Pittosporum tobira라고 하는데, 속명(屬名)인 Pittosporum의 뜻은 종자가 끈적끈적하다는 뜻이다. 역시 열매의 끈끈이가 돈나무의 트레이드마크인 모양이다. 종명(種名) tobira는 일본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28.단풍나무
계절은 우리에게 풍경의 변화로 다가오거나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에서 금세 알아차린다. 겨울을 바람으로 만난다면 가을은 아무래도 나뭇잎의 색깔 변화와 함께 마주한다.
평지에는 늦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금강산의 바위 틈새기 단풍나무들이 온통 붉어져 이름마저 풍악산(楓嶽山)으로 불리면서 설악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파도처럼 밀려 내려온다. 내장산에서 그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가을을 마감하면서 온통 우리의 산은 살아있는 수채화가 된다.
꿈 많은 소녀의 책갈피에서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소년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있고, 아름다운 내일을 그리는 청춘에게는 내년의 푸름을 연상하면서 가버리는 한해를 아쉬워하는 것이 단풍잎이다. 비에 젖은 후줄근한 단풍잎에서 고개 숙인 장년의 서글픔을 읽게 되고, 청소부의 빗자루 끝에 이끌려 쓰레기통으로 미련 없이 들어가 버리는 도시의 단풍잎에서 노년의 아픔을 맞게 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자기만 갖는 단풍의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단풍이 생기는 과정을 잠깐 알아보자. 잎의 엽록소에 붙어 있던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변하면서 함께 생성된 당(糖)이 가을엔 뿌리로 옮겨간다. 가을밤 기온이 떨어지면 당 용액이 약간 끈적끈적해져 뿌리까지 못 가고 잎에 남아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anthocyanin)과 황색계통의 카로틴(carotene) 및 크산토필(xanthophyll)로 변한다. 이들 성분에 따라 붉은 단풍 혹은 노랑단풍이 들고 참나무처럼 갈색 단풍은 더 복잡한 생화학적인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붉은 단풍의 안토시아닌 성분은 다른 나무의 생장을 억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기 자손을 널리 퍼트리기 위한 계책으로는 너무나 이기적이다.
단풍은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준비로 애지중지 키워온 잎에다 떨켜를 만들어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이다. 냉엄한 자연의 법칙이라지만 아름다운 단풍을 생각한다면 비정함에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을 단풍으로 대표되는 단풍나무 종류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나무를 포함하여 약 20여종이 나 있다. 이들은 독특한 색깔의 단풍이외에도 가지나 잎이 정확하게 마주보기로 달리며 열매는 시과(翅果)라 한다. 잠자리 날개처럼 생겨서 종자가 바람에 멀리 날라 갈 수 있도록 한 설계이다. 단풍나무 종류에 따라 날개의 크기나 마주보는 각도가 다르다.
흔히 말하는 단풍나무는 잎이 5~7갈래로 깊게 갈라져 갓난이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생긴 나무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는 당단풍이라 하여 단풍나무보다 잎이 조금 더 크고 가장자리가 덜 깊게 갈라지며 9~11갈래인 것이 다르다. 또 당단풍은 보다 추운 지방에 자라므로 높은 산의 단풍은 대부분이 이 나무이다. 그러나 옛 문헌에서 말하는 단풍은 색목(色木)이라 하여 주로 신나무를 일컬었다.
단풍나무 종류는 단풍을 감상하는 것으로 용도폐기가 되는 나무가 아니다. 옛날에는 가마, 소반 등에 이용됐고 요즈음은 피아노의 엑션 부분을 비롯하여 테니스 라켓, 볼링 핀으로 쓰이며 체육관의 바닥재로는 최고급품으로 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일부도 단풍나무종류로 글자를 새겼다. 단풍나무가 가장 대접을 받는 나라라는 캐나다이다. 꼭 단풍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목재로서, 시럽으로서 쓰임새가 나라의 국부(國富)에 크게 기여하므로 아예 국기에 설탕단풍을 밑바탕으로 하였다.
29.화살나무
화살나무는 이름처럼 나뭇가지에 화살의 날개 모양을 한 얇은 코르크가 세로로 줄줄이 붙어 있다. 이름에 나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므로 누구라도 쉽게 찾아낸다. 코르크날개는 왜 달고 있을까? 나지막한 키에 새순이 맛있고 부드러워 산토끼 등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쉬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상들의 속 깊은 배려로 생각된다. 우선 나비 5밀리미터 정도의 얇은 날개를 보통 4개씩 달고 있으니 본래보다 훨씬 굵어 보여 먹으려는 동물들이 질리게 한다.
날개의 코르크성분은 수베린(suberin)이라 하여 탄소를 2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식동물이 좋아하는 전분이나 당분이 전혀 없으며, 퍼석퍼석하여 씹으면 소리만 요란하고 맛이라고는‘너 맛도 내 맛도’없다.
야들야들한 먹이만 좋아하는 녀석들이 양분도 없는 화살나무가지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머리 좋은 조상이 기막힌 유전자 설계를 해준 덕분에 화살나무는 날개를 갖지 않은 형제나무들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았다.
한자 이름은 귀전우(鬼箭羽)라 하여 귀신의 화살 날개란 뜻이고, 혹은 위모(衛矛)라고도 하여 창을 막는다는 의미가 들어있어 모두 화살나무의 날개를 두고 한 말이다.
날개의 코르크는 한약제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는‘헛소리를 하고 가위눌리는 것을 낫게 하며 뱃속에 있는 충을 죽인다. 월경이 잘나오게 하고 대하, 산후어혈로 아픈 것을 멎게 한다.’하여 주로 부인병에 쓰였다한다.
사람 키보다 조금 더 자라는 정도의 관목이다. 잎은 마주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으로 크기는 달걀넓이만 하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이른 봄에 나오는 새순은 나물로서 먹을 수 있다. 가을에 빨갛게 물드는 단풍은 색이 너무 고와서 진짜 단풍나무가 시샘한다.
늦봄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피고 나면 가을에 콩알만 한 열매가 황적색으로 익는다. 열매껍질은 넷으로 갈라지고 가운데에서 긴 끝에 새빨간 육질로 쌓인 종자가 매달린다. 속에 들어있는 진짜종자는 하얗다. 특이한 모양의 날개와 가을의 붉은 단풍, 아름다운 주홍색의 루비 같은 열매를 감상하기 위하여 정원수로 빠지지 않는다.
화살나무와 잎, 꽃, 열매 등의 모양은 거의 같으나 날개만 달리지 않는 종류에 회잎나무가 있다. 삼신할머니가 화살나무에 붙여 주었던 날개를 깜박 잊어버려, 모양새는 꼭 같으나 한쪽은 회잎나무라는 다른 이름을 달게 되었다.
흔히 보는 사철나무와 화살나무는 촌수가 가깝다. 화살나무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라서 상록수인 사철나무와는 촌수가 먼 것 같지만 꽃이나 열매모양이 거의 비슷하여 한눈에 집안사이 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화살나무와 모양이 약간씩 다르나 크게 보아 같은 무리에 넣는 나무에는 참회나무, 회나무, 나래회나무, 참빗살나무 등이 있다. 이들 서로간의 구분은 열매로만 가능하며 열매가 둥글고 5개의 능선으로 갈라지면 참회나무, 5개의 아주 짧은 날개가 있는 것은 회나무, 4개의 긴 날개가 있고 날개 끝이 약간 휘면 나래회나무, 열매에 날개가 없으며 4개의 능선이 있으나 거의 벌어지지 않는 것은 참빗살나무이다.
30.은행나무
지금으로부터 약 2억5천만 년 전, 우리 인류는 아직 태어날 꿈도 꾸지 않았던 아스라이 먼 옛날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터를 잡기 시작한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있었던 혹독한 빙하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생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의연히 살아남은 은행나무를 우리들은'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른다.
은행이란 이름은 씨가 살구(杏)처럼 생겼으나 은빛이 난다하여 붙인 것이다. 때로는 거의 흰빛이므로 백과목, 심어서 종자가 손자 대에 가서나 열린다 하여 공손수(公孫樹),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하여 압각수(鴨脚樹)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은행잎은 독특한 모양새와 가을에 보는 노오란 단풍의 정취 만 아니라 잎에서 추출한 엑기스로 여러 종류의 신약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혈액순환제로 유명한 기넥신, 징코민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열매는 노랗게 익으며 말랑말랑한 과육은 심한 악취가 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종자이고 종자껍질이 은빛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만 자란다. 본래의 고향은 중국이고 불교의 전파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언제부터 우리의 친근한 나무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위엄이 당당할 만큼 오래 사는 나무로 유명하다. 전국에는 약 8백여 그루의 은행나무 거목이 보호되고 있는데 5백 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
살아온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다른 나무가 갖지 못하는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 우선 나무를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 속에는 독특하게 머리카락 굵기의 1/10정도 되는 작디작은 ‘보석’이 들어 있다. 수산화칼슘이 주성분인데 현미경아래서 영롱한 빛을 내어 은행나무에 또 하나의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명륜당의 은행나무와 곽재우장군 생가의 은행나무 등에는 유주(乳柱)라 하여 여인의 젖무덤을 연상하는 특별한 혹이 생기기도 한다.
꽃은 봄에 잎과 함께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서 핀다. 바람에 실린 꽃가루가 암꽃까지 날아가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가루는 진기하게도 머리와 짧은 수염 같은 꽁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물의 정충처럼 스스로 움직여서 난자를 찾아 갈 수 있다.
이를 알 리 없는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인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은행나무는 암수 종자를 함께 심는 것이 좋고 그것도 못 가에 심어야 하는데, 이유는 물속에 비치는 그들의 그림자와 혼인하여 종자를 맺는 까닭이라 하였다.
흔히 은행나무는 잎이 활엽수처럼 넓적한데 왜 소나무와 같이 침엽수에 넣느냐고 의문을 나타낸다. 엄밀히 말하여 은행나무는 침엽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나무의 세포모양을 보면 침엽수와 거의 같고 오직 한 종류밖에 없으므로 편의상 침엽수로 분류할 따름이다.
나무 색은 연한 황갈색을 띠면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예부터 고급 나무로 널리 이용되었다. 바둑판, 가구, 상, 칠기심재 등으로 사용되었고 불상을 비롯한 각종 불구(佛具)에도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31.담쟁이덩굴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 심지어 매끄러운 벽돌까지 가리지 않고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라는 덩굴나무다. 줄기에서 잎과 마주하면서 돋아나는 공기뿌리의 끝이 작은 빨판처럼 생겨서 아무 곳에나 착 달라붙는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이름은 흔히 담장에 잘 붙어 자란다고‘담장의 덩굴’이라고 부르다가 담쟁이덩굴이 되었다. 한자 표현은 돌담에 이어 자란다는 뜻으로 낙석(洛石)이라고 하는데 같은 뜻이다.
옛 양반가를 둘러치는 흙 담에는 담쟁이덩굴이 올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고풍스런 맛이 난다. 흙 담에서 시멘트 담으로 넘어오면서 담쟁이덩굴은 차츰 퇴출을 당했다. 줄장미와 능소화가 담장의 나무를 대신하였고 담장이덩굴은 숲속의 나무 등걸을 타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담쟁이덩굴은 담이 아니더라도 회색 빛 콘크리트 건물을 뒤덮으면 건물의 품위도 올라가고 아울러서 중요한 기능이 있다. 여름에는 햇빛을 차단하여 냉방비를 30%까지는 줄일 수 있으니 요즈음처럼 온 나라가 에너지 문제로 난리일 때는 더욱 역할이 돋보인다.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버려 빛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미국이 자랑하는 단편작가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가난한 화가 지망생인 존시는 폐렴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면서 이웃집 담쟁이덩굴의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기의 생명도 다한다고 생각한다. 비바람이 휘몰아친 다음날 틀림없이 나목(裸木)으로 있어야 할 담쟁이덩굴에 마지막 잎새가 하나 그대로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다시 삶의 의욕을 갖게 된다. 기운을 차린 존시에게 친구 수우는, 그 마지막 잎새는 불우한 이웃의 늙은 화가가 밤을 세워 담벼락에 그려 넣은 진짜 이 세상의 마지막 잎새 임을 일러주는 내용이다.
담쟁이덩굴 잎은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 시샘하듯이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 단풍은 단번에 잎을 떨어트리게 하는‘떨켜’가 잘 생기지 않으므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겨울에나 들어서야 모두 없어진다. 그래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어차피 하나라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담쟁이덩굴이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라는 것을 두고 비열한 식물로 비하하였다. 인조 14년(1636) 김익희란 이가 올린 상소문에 ‘빼어나기가 송백(松柏)과 같고 깨끗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은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빌붙기를 등나무나 담쟁이같이 하고 엉겨 붙기를 뱀이나 지렁이 같이 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이요’하여 담쟁이덩굴은 등나무와 함께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오래된 줄기는 회갈색인데 발목 굵기 정도로 자라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넓은 달걀모양이며 끝이 3개로 깊이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나 얕게 갈라지기도 하여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잎의 크기는 아기 손바닥만 하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고 잎자루가 매우 길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황록색으로 핀다. 열매는 작은 포도 알처럼 달리고 하얀 가루로 덮여 있으며 검은빛으로 익어서 포도와 집안 간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담쟁이덩굴도 미제가 있다. 미국담쟁이덩굴이라하여 최근 조경공사에 많이 차츰 많이 심고 있다. 잎이 모두 5출엽이며 가장자라에 톱니가 있는 것이 재래종 담쟁이덩굴과 차이점이다.
동의보감에는‘작은 부스럼이 잘 삭아지지 않는 데와 목안과 혀가 부은 것, 쇠붙이에 상한 것 등에 쓰며 뱀독으로 가슴이 답답한 것을 없애고 외상과 입안이 마르고 혀가 타는 것 등을 치료한다.’고 하며 잔뿌리가 내려 바위에 달라붙어서 잎이 잘고 둥근 것이 좋다고 한다.
32.피라칸다
가을이 짙어 가면서 공원 한 구석에서부터 생 울타리까지 빨간 열매로 온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들과 흔히 만난다. 바로 피라칸다(Pyracantha)란 나무다. 라틴어로 ‘pyr’는 불을 나타내며, akanthos는 가시의 뜻이라고 한다. 또 영어 일반이름 fire thorn도 역시 ‘불 가시’를 나타내며 중국에서 피라칸다 종류를 화극(火棘)이라고 부르는데. 또한 불 가시다. 나뭇가지에 가시를 달고 있으면서 열매가 익을 때는 나무 전체가 불꽃처럼 붉게 물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겨울날, 멀리서 열매가 잔뜩 붙어있는 피라칸다를 보고 있으면 이런 이름들이 나무의 특징과 잘 나타낸 것으로도 느껴진다.
피라칸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입나무다. 처음 중국원산의 피라칸다를, 일본을 거쳐 광복 후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널리 심었다. 피라칸다는 가시를 가지고는 있으나 탱자나무처럼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가지를 촘촘히 잘 뻗고 건조한 땅이나 공해가 심한 도로변에도 잘 자란다. 그래서 꼭 출입을 막겠다는 목적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경계 표시로 심는 생 울타리로는 제격이다. 금상첨화로 아름다운 열매를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달고 있으니 삭막한 겨울풍취를 부드럽게 가꿔주는 데도 제 몫을 다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상록수이면서 붉은 열매는 매다는 나무들 중에, 추운 지방까지 버틸 수 있는 나무를 찾는다면 피라칸다 이외는 마땅히 심을 나무가 없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는 흔한 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그냥 피라칸다라고 부르는 나무는 모두 6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중국 피라칸다로 대표되지만, 최근에는 서양피라칸다와 히말라야피라칸다가 들어와 사실은 3파전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중국 피라칸다가 아무래도 자꾸 밀려나는 형국이다. 서양피라칸다와 히말라야피라칸다는 중국피라칸다에 비하여 열매가 더 많이 달리고 더 굵고 붉은 열매를 가졌다. 중국 피라칸다의 누르스름한 열매는 간색(間色)을 싫어하는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아 새빨간 열매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중국 피라칸다의 본명은 착엽화극(窄葉火棘), 좁은 잎 붉은 열매가 달리는 가시나무란 뜻이다. 가을에 딴 열매를 말린 것을 적양자(赤陽子)라고 하여 소화를 돕고 염증을 치료하는 약제로 쓰인다고 한다. 높이 1~2m정도 밖에 자라지 않은 늘 푸른 관목이지만 중부지방에서는 겨울에 잎이 지기도 한다. 가시가 달린 가지가 서로 뒤엉킬 만큼 많이 뻗는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어 밋밋하다. 새끼손톱 크기의 작은 흰 꽃이 위가 편평한 우산 모양 꽃차례에 달린다.
서양피라칸다(Pyracantha coccinea)는 높이 7m정도까지 자라며 가지가 많이 뻗지 않아 생 울타리 나무로서는 중국 피라칸다보다 못하다. 잎은 길이3~4.5cm、나비0.8~2.5cm로서 좁은 타원형이며 다 자란 잎에는 앞뒤 모두 털이 없다. 가장자리에 얕은 톱니가 있다. 꽃은 6월쯤에 우산모양의 꽃차례로 하얗게 피고 꽃의 크기는 지름 1cm 정도 된다. 열매는 빨갛게 익으며 지름 7~8mm정도로서 잎이 잘 보이지 않은 정도로 많이 달린다.
중국 피라칸다는 키가 작고 잎이 더 길며 열매가 주황색인 반면, 서양피라칸다는 키가 크고 잎이 타원형에 가까우며 열매가 선명한 붉은 색이므로 쉽게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히말라야피라칸다(Pyracantha crenulata)와 서양피라칸다는 비슷하여 구분이 어려운데, 서양피라칸다가 더 붉고 열매가 거의 모여 있는 경향이 강하다.
33.키위
19C중엽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거대한 봉건제국 청나라는, 밀려오는 서양 문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수많은 외국인 들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남경을 비롯한 양자강 유역에는 서양인들이 많이 살았다. 넓은 터에 정원을 가꾸고 살기를 즐겨하여 여러 가지 중국 식물들로 정원을 채웠다. 이때 그들의 눈에 띈 덩굴나무가 바로 키위다. 등나무처럼 덩굴을 올려 그늘을 만들고 때로는 담장을 덮은 재료로 키위는 제격이다.
차츰 정원에 심어면서 그들이 처음 붙인 이름은 chinese gooseberry, 갈색 털 복숭이 열매는 거위나 먹을 과일쯤으로 생각한지 모른다. 톡 쏘는 맛이 너무 자극적이라 열매를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그늘을 만들어 주는 덩굴나무 정도로 이용하였을 따름이다. 이렇게 서양인들과 차츰 친해진 키위는 1910년경부터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이삿짐에 얹혀 뉴질랜드 북섬과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중국에서 보아온 대로 그늘을 만드는 나무나, 담장을 장식하는 쓰임일 뿐이었다.
1930년경 들어서자 뉴질랜드의 원예가들은 비로소 이 나무에 관심을 갖고, 열매를 식용으로 하기 위한 개량을 시작하였다. 먹을 때 잎 속에 남는 깨알 같은 씨앗의 씹힘과 신맛이 들어간 단맛의 그 미묘함에다, 에메랄드빛을 띤 과육도 고급스러워, 과일로서 차츰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뉴질랜드는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북섬에 대량으로 심었다. 과일이 인기를 끌면서 차츰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재배가 확대되었지만 여전이 뉴질랜드가 생산1위를 점하고 있었다. 새로운 과일로 알려지면서 ‘chinese gooseberry’라는 처음이름은 아무래도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열매의 모양이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키위 새와 닮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kiwi fruit’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사실과 키위 새와 과일 키위를 연관지우는 일은 무리가 있으나, 뉴질랜드가 가장 아끼는 국조(國鳥) 키위의 이름을 따온 것 자체가 이 과일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나를 짐작하게 한다. 물론 이름 바꾸기는 세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어 대 성공을 거두었다. 새 과일 키위(kiwi)는,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말쯤에 처음 소개 되어 널리 심기 시작하였다.
키위는 낙엽 지는 덩굴나무로서 길이 약 8m까지 자란다. 오래된 줄기는 적갈색의 얇은 껍질로 덮인다. 어린 가지에 털이 밀생하지만 차츰 없어진다. 잎은 어긋나고 손바닥을 펼친 크기에 이르며 잎 끝은 둥글거나 오목해 진다. 가장자리에는 잔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 털이 촘촘하여 하얗게 보인다.
초여름에 하얀 꽃이 피어 열매는 가을에 익으며 갸름하게 길고 크기는 거의 달걀만하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므로 대체로 암나무 5~10포기에 한 나무 정도로 수나무를 두는 것이 좋다. 과일은 표면에 갈색 털이 밀생하며, 과육은 말랑말랑하고 연한 녹색으로 가운데는 깨알 같은 종자가 들어있다. 과육에는, 비타민 C의 보고로 알려진 자몽, 귤, 유자보다 거의 배나 많은 비타민 C가 들어있다. 열매 1개로 성인 1명이 필요로 하는 하루의 양이 충분하다고 한다. 향기가 좋으므로 날 것으로 먹기도 하며, 잼 및 아이스크림 등에도 사용한다. 또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어서 고기의 연육제로서도 널리 쓰인다.
우리나라에 키위가 들어오면서 정해진 첫 이름은 ‘참다래’다. 그러나 필자는 적합하지 않은 이름으로 생각한다. 우리 산에 수 만년 동안 자라오던 진짜 ‘다래‘가 자칫 ’참‘이 아닌 가짜로 오인될 소지가 있어서다. 그래서 키위나 양다래로 불러주는 것이 올바르다.
34.복자기
가을 산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온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 잎과의 만남에 있다. 우리 산에 자라는 10여 종류가 넘는 단풍나무는, 대부분 안토시아닌(anthocyanin) 색소를 가진 탓에 붉음이 바탕이다. 종류마다 조금씩 다른 독특한 색깔과 모습을 뽐낸다. 특별히 눈에 띄는 복자기란 단풍나무가 있다. 복자기나무, 복자기단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식이름에 단풍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만큼은 우리가 아는 진짜 단풍나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단풍나무 종류는 대부분 잎자루 하나에 손바닥을 펼친 모양의 잎이 하나씩 붙어있다. 하지만 복자기는 엄지손가락만 한 길쭉한 잎이 잎자루 하나에 3개씩 붙어 있어서 모양새부터 평범한 단풍과는 다르다. 진짜 단풍나무 가계에서는 벗어난 특별한 모양새를 나타낸다. 무엇보다 그는 가을날의 단풍색깔로 일가친척인 보통 단풍나무와 차별화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보는 단풍나무의 단풍은 단순한 붉음이 전부다. 그러나 복자기는 단풍나무 가계의 유전대로 붉음을 바탕으로 했지만, 거기에다 진한 주홍색을 새겨 넣었다.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복자기의 단풍을 보는 느낌은 가버린 한해, 마지막을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기쁨과 정열로 다가오기도 한다. 산자락의 단풍이 시들시들 오그라들 즈음,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날, 높은 산의 복자기는 제철이다. 임경빈 교수는 ‘나무백과’에서 설악산 복자기 단풍의 아름다움을 여러 한시를 인용해 가면서 감명 깊게 설명하고 있다. 꼭 설악산이 아니더라도 좋다. 높은 산이라면 맑고 더더욱 높아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복자기의 단풍은 단풍나라의 진짜 얼짱 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타는 단풍’을 비롯하여 온 산에 붉음이 가득하다는 뜻의 ‘만산홍엽’에서 홍엽의 진정한 의미는 복자기의 단풍을 일컫는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중부 이북의 깊은 산에서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는 나무다. 잎 셋이 잎자루 하나에 붙어 있는 3출엽이 특징이고, 잎의 크기도 단풍나무보다 작아 더 아기자기한 맛이 난다. 늦봄에 노란 꽃이 피고나면 가을에 잠자리 날개처럼 생긴 열매가 마주보기로 달린다. 단풍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질 좋은 목재를 생산하므로 죽어서는 가구재, 무늬합판 등 고급 쓰임으로 활용되는 중요한 나무이기도 하다.
복자기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 복장나무가 있다. 복자기는 잎의 아래 부분에 굵은 톱니가 2~4개 정도이고, 복장나무는 가장자리 전체에 톱니가 이어져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산에서 더 자주 만나는 나무는 복자기다. 복자기와 복장나무라는 나무이름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점치는 일을 뜻하는 복정(卜定)과 점쟁이를 뜻하는 복자(卜者)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점치는 일에 쓰임이 있어서 복정나무나 복자나무로 불리다가 복장나무로 변하고, 모양이 비슷한 복자기는 복장이나무가 변한 것으로 본다.
일본에는 복자기와 복장나무의 중간 쯤 되는 목약나무(目藥木, メグスリノキ)가 있다. 이름 그대로 껍질을 삶아낸 물로 눈병을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간장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건강음료로 까지 이용되는 약용식물이다. 지금도 민간요법으로 찾는 사람이 있어서 상품화되어 판매도 되고 있다. 그러나 성분 분석한 내용을 훑어보면, 눈병에 효험이 있을 만한 특별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틀림없이 낫는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정말 탁월한 효험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의림촬요라는 의학책에는 복자기와 같은 단풍나무 일종인 신나무 가지 달인 물을 따뜻하게 덥여서 눈을 씻어내는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물푸레나무도 비슷한 쓰임이 동의보감에 실려 있다.
35.감나무
돌담으로 둘러쳐진 사립문을 밀고 들어가면 마당 구석에 한두 그루의 감나무와 나지막한 초가집이 옛 우리 농촌의 풍경이다. 가을이 되어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지붕 위에 달덩이 같은 박이 얹혀지면 짙어 가는 가을의 풍성함이 돋보인다. 더더욱 수확이 끝난 감나무 가지 끝에 한두 개씩 까치도 먹고살라고 남겨 놓은 ‘까치밥’은 우리 선조들의 따뜻한 속마음을 보는 것 같다.
감에는 타닌이 들어있어서 단감이 아닌 이상 그대로는 먹기 어렵다. 껍질을 벗겨 말린 곶감(乾柿)으로 먹거나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서 삭히기도 하고 아예 홍시를 만들기도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곶감은 몸의 허함을 보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체한 것을 없애준다. 주근깨를 없애주고 어혈(피가 모인 것)을 삭히고 목소리를 곱게 한다’하였으며 ‘홍시는 심장과 폐를 눅여주며 갈증을 멈추게 하고 폐와 위의 심열을 치료한다. 식욕이 나게 하고 술독과 열독을 풀어주며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을 멎게 한다‘고 하여 감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중요한 약제이었다.
민간에서는 감이 설사를 멎게 하고 배탈을 낫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이유는 바로 타닌 성분인데 수렴(收斂)작용이 강한 타닌은 장의 점막을 수축시켜 설사를 멈추게 한다. 과음한 다음날 아침 생기는 숙취의 제거에도 감은 좋은 약이 된다. 이는 감속에 들어있는 과당, 비타민C 등이 체내에서 알코올의 분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갈중이’ 혹은 ‘갈옷’이라 부르는 옷을 무명에 감물을 들여 만든다. 감물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땀 묻은 옷을 그냥 두어도 썩지 않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는 시원할 뿐만 아니라, 밭일을 해도 물방울이나 오물이 쉽게 붙지 않고 곧 떨어지므로 위생적이다. 갈옷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남쪽에도 갈옷을 입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렬왕 때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감나무의 쓰임새는 과실 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목재가 단단하고 고른 재질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굵은 나무속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것을 먹감나무(烏柿木)라 하여 사대부 집안의 가구, 문갑, 사방탁자 등에 장식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 골프채의 머리부분은 감나무로 만든 것을 최고급으로 친다.
열대지방에도 감나무 무리가 자라고 있으나 과일을 맺지는 않는다. 이 중에서 흑단(黑檀, ebony)이란 나무는 마치 먹물을 먹인 것처럼 새까만 나무이다. 그 독특한 색깔 때문에 멀리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침상가구에서 오늘날 흑인의 얼굴을 새기는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급가구재, 조각재이다.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을 때는 구별에 약간 어려움이 있으나 감나무는 잎이 두껍고 작은 손바닥만 하고 거의 타원형이다. 고욤나무는 잎이 조금 얇고 작으며 약간 긴 타원형이다. 고욤은 작은 새알만한 크기인데 먹을 육질은 별로 없고 종자만 잔뜩 들어 있어서 식용으로는 잘 쓰지 않고 감나무를 접붙일 때 주로 밑나무로 쓴다.
36.모과나무
모과란 나무에 달린 참외라는 뜻의 목과(木瓜)에서 온 것이다. 잘 익는 노오란 열매는 크기와 모양이 참외를 쏙 빼어 닮았기 때문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흔히 사람의 생김새, 특히 남자를 두고 좀 제멋대로이면 모과 같다는 표현을 쓴다. 옛날 영아사망율이 두 자리 숫자에 맴돌던 시절, 우리 할머니들은 태어난 손자가 모과처럼 못생겨도 좋으니 제발 살기만 하여달라고 '울퉁불퉁 모개야, 아뭇다나 굵어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실제로 모과는 한결같이 못난이인가? 찬찬히 뜯어보면 울퉁불퉁 진짜 못난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요즈음 모과는 오히려 매끈매끈한 연노랑 피부가 매력 만점인 ‘미인 모과’가 대부분이다. 혹시 너나 할 것 없이 유행병처럼 번지는 성형수술을 모과도 받은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을 정도다. 모과는 대체로 집안이나 공공기관의 정원에 심어 비료도 주고 병충해도 막아주는 호강을 하다 보니 주름이 펴져버린 것 같기도 하다.
첫서리를 맞고 잎이 떨어져 버린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란 모과 열매는 또 다른 의미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혹시라도 모양새에 반하여 한번이라도 깨물어보았다면 시큼털털한 그 맛에 삼키지도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려야 했을 것이다. 맛없다고 탓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고 모과 자신은 다른데 승부처를 둔 탓에 느긋하다. 나무가 먹음직한 열매를 매다는 것은 그냥이 아니라 다 계산이 있다. 모과는 배고픔을 금세 해소해 줄 것 같은 커다란 열매에다 은은한 향을 넣어두었다. 먹음직스러움과 향에 홀려 동물들은 나무에 달린 채로 열매를 맛보려 할 것이다. 이러고는 계산대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모과는 열매가 쉽게 떨어지게 만들어 두었다. 한마디로 열매를 따서 멀리 가져가 맛을 보라는 주문이다. 맛보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 버리고 가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나마 성깔 있는 녀석은 재수 없다고 발로 멀리 차 버릴 것이니, 그래주면 더더욱 좋다. 모과의 두꺼운 육질은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면서 완전히 썩어버린다. 속에 들어있던 씨앗들은 엄마가 챙겨준 풍부한 영양분에다 비타민 광물질까지 필수영양소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힘차게 시작하는 것이다.
가을이 짙어 가면 모과는 모양새만이 아니라 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대체로 서리가 내리고 푸른 잎이 가지에서 떨어져 나갈 즈음의 모과가 향이 가장 좋다. 완전히 노랗게 익지 않았을 때 따다가 익혀가면서 두고두고 향을 음미할 수 있다. 자동차 안이나 거실에 두세 개 쯤만 두어도 문을 열 때마다 조금씩 퍼져 나오는 향이 매력의 포인트다. 책과 함께하는 공간이라면 다른 어느 곳 보다 잘 어울린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책장을 넘겨볼 여유를 주며 심신을 편안히 하기 때문이다. 모과 향은 적당히 강하고 적당히 달콤하며 때로는 상큼하기까지 하다. 가을이 너무 늦기 전에 모과를 코끝에 살짝 대고 향을 맡을 수 있는 작은 여유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모과는 이렇게 향으로 우리와 가까운 것만은 아니다. 사포닌, 비타민C, 사과산, 구연산 등이 풍부하여 약제로 쓰이고 모과차나 모과주로도 애용된다. 동의보감에는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 위장병에 좋으며 소화를 잘 시키고 설사 뒤에 오는 갈증을 멎게 한다. 또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다리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낫게 한다’고 하여 약제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이 고향인 모과나무는 고려 때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천년을 넘게 이 땅에 살아오면서 이제는 고향땅을 잊어버리고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 되었다. 약제에서 모과차와 모과주까지, 사람들이 베풀어준 이상으로 모과는 보답을 해준다.
37.벽오동
그리 오래지 않은 근세에 일본에서 들어온 화투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의 국민오락이 되어 있다. 고스톱을 하다가 화투 패에 광(光)이 들어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광중의 광, 11월의 오동 광은 봉황이 벽오동 열매를 따먹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봉황은 고대 중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상서로운 새로 기린, 거북, 용과 함께 봉황은 바로 영물(靈物)이며, 덕망 있는 군자가 천자의 지위에 오르면 출현한다고 한다. 함부로 날아다니지도 않고 사람들이 모습을 감상할 만큼 오랫동안 머물러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귀하고 품위 있고 빼어난 것의 표상이기도 하다. 봉황은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벽오동이야 흔하지만 대나무 꽃은 50-60년 만에 어쩌다 꽃이 핀다. 식성이 너무 고상하여 모두 굶어 죽어버린 탓인지 안타깝게도 요즈음은 봉황이 날라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봉황이 앉는 벽오동나무를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었다.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는 옛 시조에,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내가 싫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무심한 일편명월(一片明月)만 빈 가지에 걸려있네'라고 하였다. 태평성대를 몰고 온다는 봉황새가 벽오동나무에 내려앉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바람을 엿볼 수 있다. 벼슬길에서 밀려난 관리가 식어버린 임금의 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라는 해석도 한다.
그래서 나라를 정말 사랑하였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여야 하는 선비들은, 그들의 모임방인 서원이나 사랑채의 앞마당에 한두 그루의 벽오동이 필요하였다. 더더욱 이 나무의 고향이 중국남부이고 두보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중국시인들의 작품에 오르내렸으니, 모화(慕華)사상에 물든 옛 선비들이 이 나무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중부이남 지역에 심고 있으며 한 아름을 훌쩍 넘길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란다. 잎은 어른 손바닥을 둘을 활짝 편만큼이나 크고 3-5갈래로 갈라진다. 초여름에 이르러서는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노란빛의 작은 꽃들이 수없이 달린다. 가을로 접어들면 익어 가는 열매의 모양이 너무 신기하다. 예쁘장한 장난감 보트를 매달고 있다. 심피(心皮)라는 것인데 암술 기관의 일부가 변신의 마술을 부린 것이다. 보트의 가장자리에는 쪼글쪼글한 콩알 크기의 열매가 3-4개씩 붙어있다. 건드리면 금세 톡! 떨어질 것처럼 불안정하게 보이지만, 껍질이 바람에 멀리 날아가도 땅에 닿을 때까지는 꼭 붙어있다. 콩알은 볶아 먹기도 하고 약간의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어서 커피처럼 먹을 수도 있다.
벽오동나무는 잎이 크며 오동나무와 잎이 매우 닮아 있고 줄기의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벽오동(碧梧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청오동(靑梧桐)이라 하는데, 벽오동 보다는 훨씬 친근감이 더 있다. ‘아오기리’라는 일본 이름도 역시 청오동의 일본식 발음이다.
옛 문헌에는 벽오동과 오동나무와 명확하게 구분하여 쓰지 않고 그냥 오동(梧桐)이라고 하였다. 본초강목에서와 같이 오동은 벽오동을 말하고, 동(桐)은 오동이라 하여 따로 설명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문헌에는 그 구분이 엄밀하지 않았다. 빨리 자라고 악기재로 쓰이며 잎 모양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한 벽오동나무를 옛 선비들이야 복잡하게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나무를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물관 등 세포배열에 비슷한 점이 많아 이래저래 둘은 헷갈리게 생겼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는 벽오동나무와 오동나무는 사돈의 팔촌도 넘는 완전한 남남이다.
38.신나무
단풍나무에는 종류가 많다. 대부분은 손바닥을 쫙 펼친 것처럼 잎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개구리 발처럼 생긴 고로쇠나무, 잎자루 하나에 3개의 작은 잎이 달리는 복자기와 복장나무, 셋으로 잎이 갈라지는 신나무와 중국단풍 등 생김새가 종류마다 제 각각이다. 다만 마주보는 잠자리 날개 같은 열매는 모두가 공통이니 서로가 가까운 친척임을 확인시켜 준다.
신나무는 셋으로 갈라진 잎의 가운데 갈래가 가장 길게 늘어져 있다. 마치 긴 혀를 빼문 것 같기도 하다. 잎의 특징이 다른 나무와 전혀 달라 쉽게 잎 모양을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 대부분의 단풍나무 종류가 깊은 산을 터전으로 잡은 데 비하여, 신나무는 사람들 곁에 자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 나지막한 야산자락이나 들판의 수로 둑에서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지는 않으며 큰 나무라고 해야 높이 10m를 넘기지 못한다. 잎이 피고 늦봄에는 향기를 풍기는 연노랑 작은 꽃이 아기 우산모양으로 달리지만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더욱이 여름날의 초록에 나무가 묻혀버리면 그의 존재를 우리는 거의 잊고 산다.
하지만 가을이 깊어 가면서 비로소 그기에 신나무가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독특한 잎 모양에 새빨간 물이 선명하게 들어 시들시들해진 주위의 나무나 풀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단풍의 붉음이 진하여 아름다움으로 친다면 진짜 단풍나무보다 오히려 한수 위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이 나무에 붙인 이름은 ‘때깔 나는 나무’, 즉 색목(色木)이다. 옛 한글 발음으로 ‘싣나모’라고 하다가 오늘날 신나무가 되었다. 색목으로 불린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잎을 삶아서 우린 물은 회흑색의 물감이 되었다. 가장 흔한 쓰임은 스님들의 옷인 장삼을 비롯한 법복을 물들이는데 빠지지 않았다. 검소하고 질박함으로 수행자임을 나타내는 스님들의 옷에 맞는 검푸른 색깔은, 신나무만이 낼 수 있는 특허품이다.
신나무는 이렇게 잎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어린 나뭇가지는 눈병을 치료하는데 쓰였다. 조선 중기인 명종~선조대에 걸쳐 임금님의 주치의를 지낸 양예수는 의림촬요(醫林撮要)라는 의학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안목문(眼目門)에 보면 눈이 아플 때 신나무가지(楓枝)를 달인 물을 따뜻이 하여 씻거나, 여기에다 뽕나무 가지 달인 물을 섞고 소금을 약간 풀어서 씻는다고 하였다. 일본인들도 우리나라 복장나무와 비슷한 목약나무(目藥木, メグスリノキ)를 눈병치료에 이용하였다. 한일 모두 단풍나무 종류를 눈약으로 쓴 셈이다. 특별한 성분이 밝혀진 것도 없으며 실제 약효에 대하여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동양 삼국에서 부르는 신나무이름이 재미있다. 우리는 색목이지만 중국이름은 다조축(茶条槭)이다. 새싹을 차로 이용한데서 나온 이름인듯하다. 일본이름은 녹자목풍(鹿子木楓), 나무껍질에 새끼사슴마냥 얼룩이 있는 단풍나무란 뜻이다. 우리는 잎, 중국인들은 새싹을, 일본인들은 줄기를 보고 이름을 붙인 셈이니 같은 나무를 두고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르다.
열매는 9월에 익고 날개는 15도 정도로 벌어지며 두 날개가 거의 평행으로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중국단풍은 잎의 가운데 갈래가 신나무보다 훨씬 짧고, 신나무에 있는 물결모양의 톱니가 없다.
옛 문헌에서 풍(楓)이란 글자의 해석에는 혼란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단풍나무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신나무를 말한다. 또 중국에서의 풍(楓)은 단풍나무뿐만 아니라 남부지방에 가로수로 가끔 심는 풍나무(Liquidamber)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어서 더욱 복잡하다.
39.후박나무
법정스님의 수필 ‘버리고 떠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뜰 가에 서 있는 후박나무가 마지막 한 잎마저 떨쳐버리고 빈 가지만 남았다. 바라보기에도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따금 그 빈 가지에 박새와 산까치가 날아와 쉬어간다.’
여기서 스님이 말한 후박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자라는 늘 푸른 잎을 가진 진짜 후박나무가 아니라 낙엽수 일본목련이다. 일본에서는 자기네 특산의 일본목련을 ‘タブノキ’라고 부르고 한자로 쓸 때는‘厚朴’이라고 한다. 일본목련을 처음 수입하여 들여올 때 후박나무란 원래 우리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경업자들은 일본목련을 후박나무란 이름으로 붙여버렸다. 이후 진짜 후박나무와 가짜 일본목련 후박나무가 뒤 섞여 혼란스럽게 되었다. 물론 이 시대의 참 수도승 법정스님이 하찮은 나무이름 하나 틀렸다고 그의 명성에 눈곱만치라도 흠이 갈 리는 없다. 그러나 나무라는 전공의 업을 평생 걸머지고 가는 필자 같은 중생들에게는 조금은 거슬리는 부분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나무가 가짜 후박나무 일본목련이 아니라 따뜻한 남부지방의 대표적 상록수인 '진짜 후박나무'다.
후박나무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음을 나타낼 때 쓰는 ‘후박하다‘에서 붙여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까다로움을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며 나무의 바깥모양이 너그럽고 편안해 보이니, 후박한 옛 시골인심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나무의 껍질은 후박피(厚朴皮)라 하여 한약재로 애용되었다. 한약재는 중국의 약재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후박나무만은 우리나라가 개발하여 사용하는 토종 향약(鄕藥)이다. 세종 12년(1429) 중국 의사 주영중이 우리나라 향약을 검사한 결과 합격된 약재는 후박 등 열 가지라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후박껍질은 배가 부르고 끓으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체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을 낫게 하며 위장을 따뜻하게 장의 기능을 좋게 한다. 또 설사와 이질 및 구역질을 낫게 한다고 하여 위장병을 다스리는 대표적인 약재였다.
건강식품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요즈음, 한술 더 떠 약이 된다는 나무이니 후박나무는 수난의 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한 때 숲속의 후박나무는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극형을 받고 대부분이 죽어 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상당수가 후박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꽤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를 제외하면 큰 나무는 구경하기 어렵다.
일부 울릉도 주민들은 유명한 호박엿이 옛날에는 '후박 엿'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후박껍질을 넣어 약용으로 후박 엿을 만들어 먹었으나 언제부터인가 호박엿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울릉도 후박 엿'으로 계속 전해졌었다면 울릉도에는 후박나무 구경도 어려울 뻔 하였으니 호박엿으로 변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남해안, 울릉도, 제주도 및 남쪽 섬 지방에서 만나는 늘 푸른 큰 나무이다. 아름드리로 자라며 동구 밖 정자나무에서 마을 뒷산까지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의 하나다. 아무리 굵어져도 회갈색의 나무껍질은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매끈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다. 젋은 피부를 그대로 간직하는 비결을 알고 싶다. 아기 손바닥만한 잎은 짧은 잎자루를 가지며 두껍고 윤기가 자르르하여 맑은 날은 햇빛에 반짝인다. 가장자리에 톱니도 없어서 언뜻 보면 감나무 잎처럼 생겼다. 꽃은 원뿔모양으로 잎겨드랑이에 나며 많은 황록색의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열매가 달리는 대궁은 붉은 빛이 특색이며, 굵은 콩알만 한 열매는 다음 해 7월에 보라색이 조금 섞인 검은 빛으로 익는다.
40.오리나무
김소월의 시‘산’을 읽어본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두메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이 처럼 오리나무는 두메 산골짝, 산새도 쉬어 넘어가는 고개 마루까지 사람들 곁에서 친근하게 함께 살아온 흔한 나무이었다. 숲에서 오리나무를 찾는 일은 간단하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 끝에 작은 솔방울을 닮은 열매가 줄줄이 매달려 있는 키다리 나무를 찾으면 된다. 이 열매는 겨울을 지나 다음해의 잎이 나고도 한참을 그대로 매달려 있다.
오리나무는 옛 사람들의 거리 표시로 우리는 알고 있다. 5리마다 자라고 있어서 길손의 이정표나무로 쓰였다는 것이다. 꼭 일부러 심어서가 아니라 햇빛 좋아하는 양수로서 길가를 따라 가다 보면 오리도 못가서 만날 수 있는 나무로 필자는 이해한다. 비슷한 이름에 십리마다 만난다는 시무나무가 있다. 몇 천 년이 가도 썩지 않은 화분(花粉)을 분석한 결과, 안압지의 주위에는 오리나무가 심겨져 있었으며 전국의 습한 지역의 대부분에는 오리나무가 널리 자라고 있었다. 오늘날 습지로 남아있는 서울 둔촌동 자연 늪, 울산 정족산의 무제치늪 등 늪의 주변에도 오리나무가 많아 습한 땅에 잘 자란 나무임을 알려주고 있다.
오리나무는 옛 사람들의 나막신을 만드는데 흔히 이용하였다. 소나무도 흔히 쓰였지만 오리나무를 더 좋아하였다. 아주잡록(鵝洲雜錄)에는 나막신이 선조33년(1600) 남방에서 들어와 전국에 퍼졌다한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나막신과 달리 통으로 만들어 진 모양이 네덜란드 나막신과 아주 닮아 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머문 효종4년(1653)에서 14년 간에 걸쳐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 외 탈의 재료, 특히 하회탈은 꼭 오리나무로 만든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에게도 2백년 된 오리나무로 만든 하회탈을 선물하였다한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에서 출토된 가야초기 고분에서 나온 칠기심의 재료도 오리나무이었다. 가볍고 연한 듯 하면서도 질기고 세포의 크기가 들쭉날쭉하지 않아 나무 공예품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나무 자체만이 아니라 껍질이나 열매에 포함된 타닌을 이용하여 붉은 색이나 흑갈색으로 물을 들이는 천연염료로 쓰였다. 한자 이름 적양(赤楊)은 붉은 물감을 얻을 수 있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지름이 한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공중질소를 고정하므로 웬만큼 척박한 땅에도 잘 자랄 수 있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이며 잘게 세로로 갈라져 굵은 비늘모양이다. 잎은 양면에 광택이 있는 긴 타원형으로 뒷면 잎맥 겨드랑이에 적갈색 털이 모여 난다. 잎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예부터 쓰임새가 많았던 진짜 오리나무는 자꾸 잘라 써버렸으므로,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오리나무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등산을 하시는 분들은 산에서 오리나무를 쉽게 만난다고 한다. 진짜 오리나무가 아니라 둥근 잎을 가진 물오리나무나 물갬나무를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짜 오리나무 보다 나무의 성질도 훨씬 떨어진다.
이외에 중부이북의 좀 추운 지방에는 두메오리나무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다. 고향이 두메산골이 아닌 나무가 어디 있으련만 이 나무에만 두메란 접두어를 붙인 사연이 궁금하다. 약간 건조한 지역이나 옛날에 황폐하였던 지역에는 일본에서 들여와서 심어둔 사방오리와 좀사방오리가 자란다. 둘은 오리나무보다 건조한 땅에 버틸 힘이 더 좋고, 오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나 잎맥의 수는 훨씬 많아서 간단히 찾아낼 수 있다.
41.잎갈나무
‘가지마다 파아란 하늘을 받들었다/ 파릇한 새순이 꽃보다 고옵다/ 청송이라도 가을되면 홀홀 낙엽진다 하느니/ 봄마다 새로 젊은 자랑이 사랑옵다/ 낮에는 햇볕 입고 밤에 별이 소올솔 내리는 이슬 마시고/ 파릇한 새순이 여름으로 자란다’ 1939년 ‘문장‘ 8호에 실린 박두진의 ‘낙엽송(落葉松)‘의 한 구절이다. 푸른 소나무처럼 생겼으나 가을되면 잎이 떨어지는 다른 나무다. 순수 우리말 이름은 잎갈나무 혹은 이깔나무, 백두산과 개마고원의 북쪽지방에서 처녀림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의 하나이다. ‘지봉유설‘의 화훼부에 ‘...곧 세속에서 말하는 익가목(益佳木)인데 삼수갑산에서 난다. 그 나무는 전나무와 비슷한데 몹시 기름기가 있다고 한다. 듣건대 갑산의 객사(客舍)는 이 나무로 기둥을 했는데, 주춧돌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도 백 년이 지나도 새것과 같으니 그 견고하고 오래 가기가 이와 같다’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잎갈나무는 모두 수입한 일본잎갈나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잎갈나무를 ‘낙엽송’, 우리의 잎갈나무는 그냥 ‘잎갈나무’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잎갈나무는 60~70년대에 나무심기가 한창일 때 권장 1순위였다. 곧게 잘 자라기 때문이었다. 또 우리 잎갈나무는 남북이 분단되어 종자의 구입이 여의치 않았으나 일본잎갈나무는 손쉽게 일본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도 큰 이유였다. 덕분에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에나 일본잎갈나무를 무더기로 심은 곳을 쉽게 만난다. 푸름에 나무가 묻혀 있을 때는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11월 말쯤의 늦가을이면 노란 단풍으로 금세 일본잎갈나무를 찾아낼 수 있다. 조금 산이 깊은 곳이면 더 흔히 만난다. 어느 사이 가을 산을 노랗게 수놓은 아름다운 일본잎갈나무로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버렸다. 반면 순수 우리 잎갈나무는 광릉수목원 안에 1910년경 심은 30여 그루가 남한에서 만나는 거의 전부이다. 잎갈나무는 솔방울의 비늘 끝이 곧바르고 비늘의 숫자가 20~40개, 일본잎갈나무는 비늘 끝이 뒤로 젖혀지고 비늘이 50개 이상이라는 것이 두 나무 구별의 포인트다. 글로서는 쉽게 차이점을 써 놓지만 실제로 산에 가보면 솔방울 달린 잎갈나무를 찾기도 어렵고, 용케 찾아도 비늘의 수를 세다보면 40개나 50개, 그게 그것이다. 더더욱 비늘 끝이 뒤로 젖혀졌느냐 바로냐는 전문가도 헤맬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남한에는 우리 잎갈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도 크게 틀림이 없다.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로서 쭉 뻗은 늘씬한 몸매에 가지와 잎이 달리는 수관(樹冠)이 자그마하여 마치 얼굴 작은 현대미인의 이상형 같다. 미인박명이라 듯이 고목이 될 만큼 오래 살지는 못한다. 4~50년이면 자람 속도가 뚝 떨어져 베어 쓰라는 신호를 보낸다. 고목이 잘 없는 나무인 것이다. 요절한 가수 배호의 노래에 나오는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는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가사다.
오래된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이며 세로로 갈라진다. 때로는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잎은 길이가 짧고 10여 개의 잎이 소복이 모여 나며, 암수 같은 나무이고 솔방울은 위를 향하며 모양은 약간 퍼진 원형이다.
자람이 곧바르고 빨리 자라는 나무지만 단단하여 건축재, 갱목 등으로 한때 널리 쓰였다. 그러나 질긴 성질이 약하여 잘 분질러지는 단점이 있다. 폭설이 내리면 소나무, 잣나무는 멀쩡하여도 일본잎갈나무는 가지가 분질러져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또 같은 나이테 안에서도 봄에 자란 목질은 너무 무르고 여름에 자란 목질은 너무 단단하여 재질이 균일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이래저래 쓰임에 제약이 많은 나무다. 이제 와서 그저 그런 나무라고 알려져 거의 심지 않는다. 지금 산에서 만나는 일본잎갈나무는 모두 옛날에 심은 것들이다.
42. 리기다소나무
한때 우리는 미제(美製)라면 깜빡 숨이 넘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광복과 전쟁의 소용들이 속에 남아난 산업이 없으니 국산품은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그 때의 미제는 튼튼하고 품질 좋은 우량품의 상징이었다. 이런 시절 헐벗은 우리 산은 리기다소나무라는 미제 소나무가 이곳저곳에 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동남부 지방이 고향인 이 나무는 대체로 1907년경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처음 시집왔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창 복구가 시작된 1960~70년대에 산마다 리기다소나무로 덮였다. 정부에서 공짜로 묘목을 나누어주었고 심는 인부까지 동원해 주었으니 산 주인이야 마다 할 리 없다. 자그마치 48만 헥타르의 리기다소나무 숲이 생긴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나무까지 미제를 좋아하여 우리나무 놔두고 이렇게 미제나무를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다. 당시의 우리 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다. 여름에도 산이 푸른 것이 아니라 흙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다. 비만 오면 흙이 흘러내려 강바닥이 농경지보다 더 높게 만들었다. 천정천(天井川)이란 이름의 이런 강은 홍수가 나면 금세 농경지를 덮어 버렸다. 산에 나무를 심은 일 시급하였다. 나무의 종류를 가려 심을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뿌리박고 살 수 있는 나무가 최우선이다. 비료성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곳에서도 자랄 수 있는 나무가 바로 리기다소나무다. 그 라고 메마른 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잘 버틸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한계조건에서는 겨우 생명 부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괜히 모양새 꾸미는 일에 신경 쓰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만 갖는 특별 노하우도 있다. 줄기의 여기저기에 맹아라는 부정기 가지를 내밀어 부분 부분을 털북숭이처럼 만들어둔다. 위 부분이 말라죽어도 줄기의 어디에서라도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생명을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토종 우리 소나무나 곰솔 등 다른 소나무종류는 절대로 줄기에서 맹아가 돋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도 리기다소나무 숲은 금세 찾아낼 수 있다. 또 리기다소나무는 솔방울을 잔뜩 매다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러하듯 리기다소나무도 삶이 편편치 않으면, 우선 자손부터 먼저 퍼뜨릴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리기다소나무는 사정이 이러하니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나무를 심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푸른 우리 산을 보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의 철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리기다소나무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모두 끝내고 우리나라 숲에서 차츰 이름이 사라져 가고 있다. 쓸 만한 다른 나무로 교체하기 위하여 잘려나갈 나무 0순위이다. 관심은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어렵게 생명을 유지하다보니 그의 속살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우선 나이에 비해 나무 지름이 작고 온통 옹이투성이다. 또 원래부터 그에게는 송진이 많아 영어이름도 ‘pitch pine’인데, 힘들게 살다보니 더 많아졌다. 종이 만드는 회사에서도 나무 켜는 공장에서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알려진 바로는 1헥타르에 자라는 30년생 리기다소나무의 나무 값이 1백만원 남짓이라 한다. 심을 때야 공짜로 심었지만 산 주인 입장에서야 마음 편할 리 없다.
웰빙 바람으로 사람들은 건강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무엇이나 건강에 좋다면 남아나지 않은 세상, 솔잎도 훑어가기 바쁘다. 리기다소나무보다는 진짜 소나무가 나을 터이니, 바늘잎이 3개씩 붙어있는 리기다소나무와 2개인 토종 소나무와는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43. 올리브나무
기원전 16세기경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에 살던 페니키아인(Phoenician)들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 올리브나무의 재배를 시작한다. 이후 그리스는 올리브나무의 대량재배가 이루어지고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지중해의 여러 나라를 통하여 튀니시아, 시시리 섬을 거쳐 이태리 본토에도 널리 퍼졌다. 로마의 지배지역이 북아프리카까지 이르면서 지중해 연안의 올리브나무재배는 더욱 널리 보급되어 수천 년이 경과된다.
이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미국에 들어간다. 1560년경에는 멕시코에서 재배가 시작되고 이어서 캘리포니아, 칠레, 아르헨티나로 퍼졌다. 이후 오늘날에는 호주,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자라는 과일나무가 되었다. 자라는 지역으로 보아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8장 노아의 홍수를 기록한 내용 중에 ‘40주야 내리던 비가 멎고 물이 줄자, 노아는 방주에서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저녁때가 되자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물고 되돌아 온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아는 신의 진노가 풀려 사람이 살 수 있는 평화로운 땅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 하였다. 이후 올리브나무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UN기에도 올리브나무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다.
올리브나무는 성서에 여러 번 등장하는 포도 및 무화과와 함께 성서식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국역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 올리브나무를 감람나무로 오역하여, 오늘 날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감람나무(학명 : Canarium album)는 사실은 올리브나무(학명 : Olea europaea)이다. 오역의 원인은 감람나무의 영어이름이 ‘Chinese olive`이고 열매의 쓰임이 닮은 탓이라고 한다.
그리스에서는 776년 고대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우승자에게 올리브나무 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우승자의 머리관은 월계수(laurel tree)라는 다른 나무로 바뀌게 되었다. 이유는 그리스 남부의 델피에서 아폴로 신에 바치는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의 우승자에게 월계수로 만든 관을 얹어준 때문이다. 또한 희랍신화에 나오는 다프네가 아폴로에게 쫓겨 변해버린 나무도 월계수다. 그래서 오랫동안 월계수로 만든 관을 월계관(laurel crown)으로 알아왔다. 이름 난 시인을 일컫는 ‘poet laureate’를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번역하면서 월계관은 ‘월계수로 만드는 관’으로 인식하는데 의문이 없었다. 그러나 2004년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고대 올림픽에서 자기네들이 처음 사용한 올리브나무 잎으로 만든 머리 관을 월계관으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월계관은 꼭 월계수로만 만들어 온 것은 아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월계관은 북미원산의 Quercus palustris라는 참나무 일종으로 만들었다.
늘 푸른 작은 나무로 높이 약 10m정도 자라며 뿌리가 깊이 들어감으로 건조한 땅에서도 잘 버틴다. 여름의 기후가 덮고 길며 습도가 낮은 건조한 지역이 적지이며 토양과 기후 조건이 포도와 비슷하다. 야생종과 재배종으로 나누고, 재배종은 수많은 품종이 있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가늘고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두껍고 가죽질이며 표면은 암녹색이고 뒷면은 짧은 털이 빽빽하여 은백색으로 보인다. 초여름에 잎겨드랑이에 황백색의 작은 종모양의 꽃이 핀다. 꽃부리의 끝이 4갈래로 갈라지므로 언뜻 보면 꽃잎이 4장인 것처럼 보인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손가락 마디 길이 정도이거나 약간 길다. 처음에는 녹색이나 익으면 검어진다. 핵과로서 1개의 종자가 들어있다.
종자에서 기름을 채취하여 수많은 쓰임이 있다. 식용유에서 등유까지 지중해지방의 문명은 올리브나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넘겨 오래 사는 나무이다. 우리나라는 제주도 지방에 일부 시험재배를 하고 있다.
44. 사스레피나무
낙엽 진 중부지방의 겨울 산은 온통 잿빛이다. 띄엄띄엄 섞인 소나무가 가버린 푸름을 일깨워줄 뿐, 삭풍이라도 몰아치면 삭막함이 숲을 훑어놓는다. 그러나 멀리 남해안에서 제주도를 잇은 난대림의 겨울은 중부지방과 풍광이 크게 다르다. 늘 푸른 넓은잎나무가 산을 덮고 있어서다. 난대림의 상록수는 대체로 두꺼운 잎사귀에다 왁스가 풍부하여 광택이 난다. 나뭇잎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일라치면 난대림의 숲은 ‘겨울 속의 따스함’을 가져다준다.
양지바른 난대림의 나무들 사이에는, 자잘한 톱니와 갸름하고 도톰한 잎사귀를 달고 있는 자그마한 높이의 늘 푸른 나무와 흔히 만난다. 난대림의 붙박이 사스레피나무다. 이 나무는 자람 터를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다.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서 숲이 우거진 산속까지 어디라도 적응하여 잘 살아간다. 주로 우리가 쉽게 만나는 곳은 매 마르고 건조한 빈터이다. 웬만한 건조에는 잘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잎 뒷면에 있는 기공(氣孔)이 소나무처럼 약간 함몰된 위치, 흔히 말하는 ‘함몰기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변세포(孔邊細胞)에 의하여 증산작용을 조절하는 기능도 있지만 기공 위치 자체가 쓸데없이 수분이 날아 가버림을 줄여주게 설계되어있는 것이다.
자람 터가 만족스럽지 않다보니 사람 키 살짝의 관목 형태로 버틴다. 줄기의 여기저기에는 맹아를 숨겨두어 잘려지면 금세 싹을 내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란다. 쓸데없이 키 키우느라 아까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자람 환경은 어렵지만 잎사귀는 놀놀해지는 법 없이 언재나 푸르고 싱싱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부지방 사람들에게도 자주 만날 수 있은 쓰임이 하나 있다. 우리의 일상에 접하는 꽃다발의 바닥나무는 대부분 사스레피나무다. 화려한 꽃만 모여 자칫하면 천박해져 버릴지도 모를 꽃다발의 품위를 올려주는 품격나무다.
사스레피나무는 한번 쓰고 버리는 꽃다발로 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숲속의 기름진 땅에 종자가 떨어지면 왕성한 생장으로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당당하게 경쟁한다. 진짜 사스레피나무인가를 의심할 만큼 제법 큰 나무로 자랄 때도 있다. 가끔은 발목 굵기에도 이르러 수목도감에는 관목이 아니라 ‘소교목’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간단한 기구를 만들 수 있는 굵기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난대림의 숲이라면 어디라도 자태를 뽐낸다. 다만 추위에 버틸 힘은 거의 없다. 남해안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올라와도 사스레피나무를 만나기는 어려워진다.
3~4월의 이른 봄날 꽃을 피운다. 5장의 꽃잎이 붙은 U자 모양의 꽃이 가지 밑에서 땅으로 향하여 수십 수백 개가 줄줄이 매달린다. 꽃이래야 새끼 손톱크기, 황백색에 꽃잎의 끝부분은 꽃이 피고 조금만 지나면 보랏빛으로 변한다. 꽃에는 특별한 냄새가 있다.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라 가정용 LPG가스가 누출될 때 나오는 냄새에 가깝다. 꽃이 필 때면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금세 알아 챌 수 있다고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에야 까맣게 익어 다음해 까지 달려 있다. 열매가 많지 않은 겨울 동안에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여 효과적인 종자 퍼트림을 한다.
사촌나무에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스레피나무와 꽃, 열매, 나무모양은 모두 비슷하나 잎 꼭지만 요(凹)형으로 우묵하게 들어가 있는 나무다. 중국이름도 사스레피나무는 영목(柃木), 우묵사스레피나무는 요형영목(凹形柃木)이다. 필자가 본 우묵사스레 피나무의 아름다운 군락은 제주도 성산일출봉에서 구좌읍 쪽으로 이어진 해안도로 옆이다. 겨울 제주도 여행길이라면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스레피나무란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은?. 필자를 비롯하여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의 궁금증이나 아직 어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45. 비쭈기나무(빗죽이나무)
제주도 돈네코 계곡을 비롯한 난대 상록수림에 자라는 비쭈기나무(빗죽이나무)가 있다. 분포지역은 일부 수목도감에는 남쪽 섬지방과 경상남도 일부라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일본 남부, 대만까지 난대에서 아열대에 걸쳐 자라며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나무다. 비쭈기나무는 이름에 혼란이 있다. 우리나라 식물분류학의 거장 이창복 교수는 <대한수목도감>에서 ‘비쭈기나무’, 이영노 교수는 <한국식물도감>에서 ‘빗죽이나무’라 했다. 이 나무의 겨울눈이 가늘고 아주 길게 생겨서 마치 송곳이 삐쭉이 나온 것 같다는 뜻으로 비쭈기나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비쭈기나 빗죽이 어느 이름으로 쓰던 ‘삐죽이’에서 변했음을 짐작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한 분은 고인이 되셨고 한 분은 아직도 활동 중이시다. 후학들로서야 이름이 통일되기를 바랄 뿐 어느 분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 나무의 중국이름은 세엽산다(細葉山茶) 혹은 미엽산다(尾葉山茶)이다. 얼핏 보면 동백나무와 매우 닮았으나 잎이 작고 가늘게 생겼다. 식물학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이며, 잎의 특징도 잘 나타낸 좋은 이름이다.
한편 일본이름은 사카끼(サカキ), 한자로는 신(榊)이라고 한다. 나무와 신을 결합한 글자이니 심상치 않은 뜻이 포함될 것이라는 짐작에 어려움이 없다. 사실 비쭈기나무는 자람 터의 중심이 일본에 있고 우리나라는 자랄 수 있는 변두리 한계지역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나무와 관련된 아무런 자료가 없지만 여러 가지 나무에 얽힌 역사와 문화사는 일본에 많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비쭈기나무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그들이 섬겨마지 않은 신사(神社)의 신전에 바치는 제물에 쓰이는 귀한 나무다. 나무 이름 자체가 신과 인간세계를 잇는 경계에 심는 나무란 뜻이다.
신사를 참배할 때 바치는 다마구시(玉串)라는 제물이 있는데, 바로 비쭈기나무의 가지에 베나 종이오리를 매단 나뭇가지를 말한다. 우리가 볼 때는 작은 나뭇가지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최고의 제물로 생각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수상이 비쭈기나무 가지를 손에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에 따라 공식참배인지 비공식 참배인지를 구분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결혼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에는 비쭈기나무 가지가 사용된다. 일본인들은 비쭈기나무가 자라지 않은 곳에서는 잎에 톱니가 있다는 것 이외는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사스레피나무로 신에게 바치는 나무를 대신한다. 신사에는 신(榊)이라고 쓰는 비쭈기나무, 불단에는 밀(樒)이라고 쓰는 붓순나무는 신에게 드리는 신성한 나무로 생각한다.
높이 10m정도에 지름 한 뼘 정도는 자랄 수 있는 늘 푸른 큰 나무이다. 잎은 긴 타원형이며 손가락 길이를 조금 넘는 크기다. 잎은 두껍고 표면에는 광택이 있으며 가장자리는 매끄럽다. 여름날 5장의 꽃잎이 동전 크기의 하얀 꽃을 만들어 낸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늦가을에 굵은 콩알만 한 새까만 열매가 익는다. 겨울을 넘기는 동안 새들에 의하여 종자번식을 한다. 숲속의 비옥한 곳을 좋아하며 습기가 많고 그늘이 져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널리 알려진 나무는 아니다. 그러나 나무의 모양이 깔끔하고 진초록의 잎이 특징적이라 조경수로 차츰 널리 심겨지고 있다.
46. 소귀나무
필자는 나무를 공부하면서 처음 접하게 된 여러 나무 이름 중에 소귀나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수목학 교과서의 앞부분, 침엽수 설명이 끝나고 활엽수로 넘어가면 후추등, 죽절초에 이어 대체로 세 번째 쯤 소귀나무 설명이 나온다. 어린 시절 고집 세고 말을 잘 듣지 않은 아이를 두고 옛 어른들은 걸핏하면 ‘소귀에 경 읽기’를 들먹였다. 그래서 소귀나무의 ‘소귀’를 익숙하게 알아온 탓에 소의 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뜻을 잘 모르는 제주 방언 ‘소귀낭’에서 온 이름일뿐더러 소의 귀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소귀나무의 실물을 처음 만난 것은 나무를 공부한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제주시의 가로수에서다.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벚나무로 너무 친숙해진 육지의 가로수와는 달리 제주특산의 소귀나무, 담팔수, 참식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상록수 가로수는 제주도를 이국의 풍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소귀나무는 제주도에서도 남쪽 서귀포 부근에만 자생하는 난대수목이다. 기껏 제주도에서 맴돌 뿐 섬을 벗어나 올라가기에는 추위를 이겨낼 힘이 모자란다.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일본 남부, 타이완까지 자라고 우리나라는 거의 생육 북한(北限)경계에 가깝다.
소귀나무는 아름드리 굵기에 높이 20m나 자랄 수 있는 큰 나무다.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 않은 회갈색의 매끄러운 나무껍질을 가진다. 잎은 나비보다 길이가 4~5배 더 긴 타원형이며 가지 끝에 빽빽이 모여 달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작은 녹색 쟁반을 여러 개 올려둔 양상이다. 잎의 가장 자리에 톱니가 없이 밋밋하다. 가끔 상반부에 톱니가 있는 경우도 있으나 물결모양으로 뚜렷하지 않다.
꽃은 꼬리모양의 꽃차례를 이루며 4월경 잎겨드랑이에서 적갈색으로 핀다. 암꽃과 수꽃은 모양이 다르고 열매는 둥근 핵과(核果)로서 초여름에 진한 붉은색으로 익는다. 굵은 구슬크기에 표면은 올록볼록한 작은 돌기로 덮여 있어서 모양이 독특하고 루비를 연상케 하는 해 맑은 붉음이 과일을 돋보이게 한다. 열매 속에 한 개의 씨앗이 들어있고 육질은 부드럽다. 약간 새콤하면서 송진향기가 있어서 맛이 좋아 과수로 재배하기도 한다. 암수 딴 나무이며 반드시 수나무가 부근에 있어야 열매가 달린다. 열매는 날로 먹는 것 이외에 소금 절임, 잼을 만들고 과실주를 담그기도 한다. 감나무처럼 나뭇가지가 잘 분질러지므로 열매를 딸 때는 나무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한다.
이 나무의 일본이름은 산복숭아란 뜻의 야마모모(ヤマモモ, 山桃)다. 열매의 익은 모습이 완숙한 복숭아를 떠올리기도 한다. 중국이름은 양매(楊梅), 잎사귀는 버들 모양이고 열매는 매실을 닮았다는 뜻이다.
소귀나무는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좋아하는 양수이면서 비옥하고 수분이 많은 곳에 잘 자란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공중질소를 고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산불이 난 곳 등 조금 척박한 땅에서도 자람이 비교적 좋다고 한다. 나무껍질을 벗겨서 황색 염료를 얻을 수 있는데, 약용으로 쓰거나 옛날에는 어망 염색에 이용하였다. 나무는 물관세포배열이 나이테에 고루 퍼져 있어서 재질이 고르며, 비중이 0.7을 넘어 무겁고 단단하다. 건축재에서 가구재까지 쓰임이 넓다.
소귀나무와 비슷한 나무에 담팔수가 있다. 담팔수는 일 년 내내 붉은 단풍잎이 몇 개씩 섞여있으나 소귀나무는 그런 일이 거의 없고, 잎의 가장자리에 담팔수는 톱니가 있는 반면 소귀나무는 매끈하고 거의 톱니가 없다.
47. 다정큼나무
다정스럽다는 말이 있다. 꽁꽁 얼어버린 겨울 땅도 금세 녹일 것만 같아 상상만 하여도 가슴이 훈훈해진다. 나무에도 다정스런 나무가 있을까? 제주도에서 남쪽 섬에 이르는 남부 난대림에 자라는 다정큼나무가 있다. ‘다정스러울 만큼의 나무’가 변하여 생긴 이름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말의 뜻을 나무 모습과 연관 지어 보면, 다정큼나무는 잎이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긴 타원형의 아늑한 모습이다.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가끔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톱니가 없이 매끈하니 더욱 편하게 느껴진다. 원래 어긋나기로 잎이 달리지만 사이사이가 짧아 가지 끝에 모여나기 한 것처럼 붙어있는 데, 잎들이 모여 다정히 둘러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다정큼나무의 자람 터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제주도에 걸친 따뜻한 지방이다. 비옥한 땅이 아니라 소금바람이 불어대는 바닷가, 양지바른 바위지대에서 때로는 바닷물을 통째로 뒤집어쓰고도 꿋꿋이 버틴다. 늘 푸른 두꺼운 잎은 구조가 조금 특별하다. 잎의 표면에는 왁스분이 풍부하고 큐틴(cutin) 층이 잘 발달되어 있다. 매끄럽고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겨울의 추위도 보호해 분다. 아주 좋은 조건이라면 약 5m정도 높이까지도 자랄 수 있으나 대부분은 사람 키를 넘기기 어려운 작은 몸매이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데는 오히려 꺽다리 큰 나무들 보다 적응력이 더 높다.
다정큼나무의 족보는 꽃과 과일 나무들의 원조, 장미과에 속한다. 꽃은 5장의 꽃잎을 가진 매화 모양의 하얀 꽃이,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5월쯤 가지 끝에서 위로 향하여 여럿이 한꺼번에 핀다. 가을날이면 갸름한 모양에 굵은 콩알 크기의 검은 자주 빛 열매가 달린다. 과육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단단한 1개의 흑갈색 종자가 들어있는 전형적인 이과(梨果)이다. 그러나 열매의 크기에 비하여 씨앗이 너무 굵으므로 과육이 거의 없다. 종자를 멀리 옮겨줄 새들에게도 먹을 것이 적으니 인기는 별로일 것 같다. 다정큼나무는 이름처럼 다정스럽게 생긴 편안한 모습 때문에 조경수로 사랑을 받는다. 햇빛을 좋아하고 건조와 바닷바람에 잘 견디므로 남부지방의 해안도로나 정원, 공원 등에 심기 좋은 나무다.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사시사철 다소곳하게 우리 곁에 있는 편안한 나무다.
다정큼나무의 영명은 Japanese hawthorn, 산사나무와 같은 이름을 쓰는 셈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중국이름은 그 뜻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석반목(石斑木)이다. 일본이름은 차륜매(車輪梅)라 쓰고 샤린바이(シャリンバイ)라고 읽는다. 꽃이 매화를 닮았고 가지 뻗음이 수레바퀴살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쓰임은 우리와 비슷하게 주로 정원수이나, 명주를 물 드리는 귀중한 염료로 이용되는 특별한 쓰임이 알려져 있다. 줄기나 뿌리를 쪄서 즙을 내고 철분이 많은 진흙을 혼합하면 타닌산이 진흙 속의 철분과 산화반응하여 명주를 흑색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다정큼나무는 우리나라 일부 지방에서 사투리로 쪽나무라 부르고 어망 등을 염색하는 데 쓰였다한다. 그러나 일본처럼 명주를 물 드리는 등 특별한 쓰임에 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박석무씨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제목으로 정약용의 시를 번역하면서 원문 ‘남정(藍靘)’를 쪽나무라고 하였다. 실제로 남정은 짙푸른 색을 물 드리는 천연염료로 유명한 일년초 ‘쪽’을 일컫는다. 우리가 쓰는 공식 나무이름에 ‘쪽나무’는 없으나 이렇게 번역 오류 때문에 다정큼나무가 마치 쪽빛을 낼 수 있는 나무처럼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48. 백량금
단풍이 지고 찬바람이 피부로 느낄 즈음이면 사람들은 꽃피는 계절을 그리워한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였던가? 이를 즈음 꽃가게의 앞줄에는 빨간 열매를 줄줄이 매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를 내 놓는다. 백량금(百兩金)이라는 이름부터 흥미를 끄는 나무다. 백량이라는 적지 않은 돈과 나무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실망스럽게도 돈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중국이름을 그대로 따왔을 따름이다. 20세기 초 우리나라 식물을 조사하여 통일된 이름을 정하고 학명을 붙일 때, 대부분 우리의 이름을 붙였지만 제대로 된 적절한 이름이 없을 때, 혹은 한약제로 알려진 나무들은 중국이름을 그대로 빌려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백량금은 중국 이름을 빌려올 당시 주사근(朱砂根)이라고 하여야 할 것을 학자들이 잠깐 착각하여 잘못 붙인 경우다. 뿌리를 자르면 붉은 점이 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한편 비슷한 나무에 ‘Ardisia crispa’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 나무가 진짜 백량금, 필자는 설명의 편의상 중국백량금이라 이름을 붙였다. 잎이 조금 더 가늘고 긴 것 이외에는 우리 백량금과 모양이 너무 비슷하며, 우리나라에 자라지 않은 탓에 전문 학자들도 이런 실수를 한 것이다. 참고문헌으로 쓴 중국의 원예서 ‘본초강목’의 설명이 좀 헷갈리게 기술된 것도 이유라고 한다.
꼭 같은 일이 일본에서도 벌어졌다. 중국백량금을 처음 조경수로 개발할 때 그들은 엉뚱하게 당귤(唐橘)이라고 하고 우리가 말하는 백량금은 만량(萬兩)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같은 식물을 두고 중국이름 주사근이 우리나라에서는 백량금, 일본에서는 만량(マンリョウ)이 된 셈이다. 액수로 따져 백량보다 1백배가 많다는 뜻의 일본 이름은, 이 나무가 처음 알려질 에도시대에는 비싼 값이 아니면 살 수 없었던 탓이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금우를 십량(十兩), 중국백량금은 백량, 열매가 비슷한 죽절초를 천량, 백량금은 만량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붉은 과실은 큰돈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돈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량금은 남부지방의 상록수 숲에서 햇빛을 거의 받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다. 자생지가 대부분 파괴되어 진짜 자연산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키는 30~50cm정도이고 큰 것이라야 1m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작긴 하여도 곧추선 하나의 줄기를 가지며 가지와 잎은 대체로 줄기 끝에 모여 달린다. 가지는 줄기에 비하여 훨씬 가늘고 오래지 않아 떨어져버리므로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일은 거의 없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좁고 긴 타원형으로 표면은 짙은 초록빛이며 뒷면은 연한 초록빛이다. 가장자리에는 물결모양 톱니가 있다. 특징적인 것은 톱니와 톱니 사이에 선체(腺体)라는 작은 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6월경 손톱크기의 흰 꽃이 가지 또는 줄기 끝에 우산모양으로, 적게는 몇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가 달린다. 9월이면 둥글고 지름 6mm정도의 콩알 크기로 꽃이 진 자리에 빨간 열매가 가득 달린다. 열매는 이듬 해 다시 꽃이 필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다. 진초록 바탕에 빨간 열매로 악센트를 준 백량금의 모습은 겨우 내내 잿빛 아파트의 베란다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일등공신이다. 이렇게 오래 열매를 달고 있는 이유는 원산지인 숲속의 그늘에 자라는 탓에 새들의 눈에 띄는 기간을 늘려 잡는 선조들의 배려라고 한다.
꽃가게에 가서 백량금을 달라고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이름 만량에다 ‘금(金)’자를 하나 더 붙인 만량금으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49. 마삭줄
옛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묶을 때 쓰는 밧줄은 필수품이었다. 농산물을 수확하여 옮기는 데는 물론 산에서 나무 한 짐을 등에 지고 내려오려 해도 튼튼한 줄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출세를 하고 큰일을 하려면 ‘줄’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어떤 형태로든 줄이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마삭줄로 불리는 덩굴나무가 있다. 마삭(麻索)이란 원래 삼으로 꼰 밧줄을 뜻하는 삼밧줄의 한자식 말이다. 마삭줄은 삼밧줄 같은 줄이 있는 덩굴나무라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마삭줄의 줄은 간단한 밧줄로 쓸 수는 있지만, 삼에 비교할 만큼 그렇게 튼튼한 덩굴은 아니다. 다만 숲 속에서 흔히 자라는 탓에 쉽게 만날 수 있는 덩굴나무로서는 삼밧줄처럼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뜻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중국이름은 장절등(長節藤), 일본이름은 테이카카즈라(テイカカズラ), 8백여 년 전의 가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마삭줄은 따뜻한 남부지방의 숲이 자람 터이다. 요즈음은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중부지방에 해당하는 경상북도 남부까지도 올라와 있다는 보고도 있다. 늘 푸른 넓은 잎을 가지며 상록수의 숲에서 다른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바위나 산사태가 난 공간의 땅을 뒤덮기도 한다.
잎의 크기나 모양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같은 나무라고 보기가 어려울 만큼 잎의 형태가 다른 경우도 있다. 대체로 바위를 덮거나 땅바닥을 길 때는 작은 잎을 달고 꽃이 잘 피지 않는다. 반면에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서 비교적 햇빛을 잘 받을 때는 잎도 크고 꽃도 잘 핀다. 잎은 손가락 한두 마디 길이 정도로 기본적인 모양은 타원형에 표면은 광택이 있는 녹색으로 전형적인 상록수의 잎 형태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아주 긴 타원형, 표면에 잎맥이 그물처럼 명확하게 보이는 잎 등 환경에 따른 잎 모양의 변화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크다.
마삭줄이 다른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방식은 비정한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도 지켜야 될 도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하다. 짧은 공기뿌리를 수 없이 만들어내어 키다리 큰 나무의 껍질에다 조심스럽게 붙이면서 올라간다. 이런 방식은 자람의 장소로 대가 없이 빌려준 나무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휘감고 올라가면서 빌려준 나무를 조아 붙여 결국 숨 막혀 죽게 하는 등나무 같은 못된 나무에 비교하면 마삭줄은 ‘신사 덩굴’이다. 또 높이 올라가는데도 절제가 있다. 원래 강한 햇빛을 좋아하지 않으니 꼭대기로 올라가 광합성 공간을 빼앗지 않는 것도 그를 한층 돋보이기 한다.
비교적 잎이 많이 달리는 나무지만 줄기가 그렇게 굵지 않고 나무를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물관이 가늘고 수도 많지 않다. 수분 소비량을 최소로 줄이고 공기뿌리로부터도 수분이나 양분을 일부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린잎은 가장자리에 털이 있다가 차츰 없어지며 안으로 약간 휘는 감이 있다. 겨울에는 검붉은 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자람이 까다롭지 않으므로 아파트 베란다 등 실내에 심기에 적당하다. 흰 꽃과 여러 가지 잎 모양을 감상할 수 있고 아무 곳에나 덩굴을 올릴 수도 있다.
꽃은 5∼6월 새 가지 끝에 5장의 하얀 꽃잎이 완전히 뒤로 젖혀지고, 가장자리가 안으로 휘어진다. 선풍기의 날개와 꼭 닮은 모습이다. 하얀 꽃은 시간이 지나면 노랑 빛으로 변하고 향기가 난다. 콩꼬투리처럼 길게 생긴 열매는 9월 쯤 익으면서 가운데로 갈라지고, 은빛 관모(冠毛)를 가진 종자가 나온다. 종자의 관모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50. 전나무(젓나무)
한해가 저물어 가면서 곳곳에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는 울려 퍼지는 캐럴 송과 함께 우리의 도시 풍경이 된지 오래다. 언제부터 크리스마스트리가 사용되었는가? 대체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목사 때부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어느 맑은 밤, 상록수 숲을 걸으면서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가족들에게 그때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집안으로 나무를 가져와 하늘의 별처럼 촛불로 장식하였다는 것이다. 루터 목사가 걸었다는 상록수 숲의 나무는 아마 전나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가문비나무를 많이 심었지만 18세기 이전의 원시림 상태는 전나무가 더 많았다. 이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데는 여러 침엽수 수종이 쓰였지만 원조는 역시 전나무이다. 전나무의 수요가 너무 많아져 지금은 인공으로 만든 상록수 모양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늘을 찌르듯이 쭉쭉 뻗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숲을 우리는 흔히 수해(樹海)라고 한다. 전나무는 이렇게 무리지어 자라는 대표나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작은 수관에다 곧고 긴 줄기를 한껏 뽐낸다. 마치 미인대회에서 만나는 늘씬한 슈퍼 모델 같다. 원래 자라는 곳은 백두산 개마고원 등 북쪽의 추운 지방이다. 혼자만이 아니고 가문비나무, 잎갈나무와 함께이다. 세 나무 중에는 적응력이 가장 높아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지방의 높은 산에도 자란다.
세진의 훈몽자회에 보면 전나무의 한자이름은 ‘젓나모 회(檜)’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는 전나무를 흔히 삼(杉)으로 표기하여 혼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숙종 39년(1713)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거의 3백 리에 달했다’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삼나무는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삼나무가 아니라 전나무나 가문비나무 중의 하나이다. 두 나무는 모양새가 비슷하고 쓰임도 거의 같으니 옛 사람들이야 구태여 구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잎갈나무는 ‘익가목’이라는 다른 이름을 쓰지만 때로는 ‘삼’이라고 하여 역시 혼란스런 나무이다.
전나무는 바늘잎 늘 푸른 큰 나무로서 둘레 두세 아름에서 높이 3~40m까지 자랄 수 있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이며 세로로 짧고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잎은 납작하면서 끝이 뾰족한 모양이고 길이는 새끼손가락 한 두 마디 정도이다. 잎의 뒷면에는 흰빛 숨구멍이 있어서 하얗게 보인다. 봄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피며 가을에 길이 10cm 정도의 원통형 솔방울이 위로 향하여 익는다. 우리나라의 전나무 종류는 이외에 분비나무와 구상나무가 있다. 분비나무는 솔방울의 비늘 끝이 그냥 곧바르고 구상나무는 뒤로 갈고리처럼 휜 것이 구분하는 차이점이다. 수입하여 남부 지방에 심고 있는 또 다른 전나무 종류에는 일본전나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전나무와는 달리 흔히 일본인들이 신은 나막신처럼 살짝 잎의 끝이 갈라져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가문비나무 종류는 열매가 아래로 달리고 잎이 달렸던 가지부분이 까슬까슬한 것이 특징이다.
전나무는 곧바르고 집단으로 자라며 나무의 재질이 좋아 예부터 건축재로 널리 쓰였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수다라장, 양산 통도사, 강진 무위사의 기둥의 일부 등이 전나무이다. 그래서 전국의 알려진 큰 사찰에는 어김없이 전나무가 심겨져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오대산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이며 계곡과 어우러져 수백 년 된 우람한 전나무가 옛 영광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다. 나무의 색깔이 거의 백색에 가까워 지금은 최고급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51. 호랑가시나무
세상만물은 생김새가 특별하면 금세 눈에 띠게 마련이다. 호랑가시나무는 잎 모양이 제멋대로 생겼다. 흔한 나뭇잎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갸름한 잎은 너무 심심하여 싫다하였다. 긴 오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모서리마다 튀어나와 정말 괴상하게 생긴 잎을 만들었다. 피카소 그림을 보는 듯도 하고 유치원 아이가 서툰 가위질로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가죽 같은 두툼한 두께에 모서리의 튀어나온 구석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발달하여 있다. 얼마나 날카롭던지 호랑이 발톱과 비유되고, 호랑이가 등이 가려우면 이 나무의 잎에다 문질러 댄다는 뜻에서 호랑가시나무란 이름이 붙었다. 그 외 고양이 새끼의 발톱 같다하여 묘아자(猫兒刺), 회백색의 껍질을 두고 중국에서는 개뼈다귀 나무란 뜻으로 구골목(狗骨木)이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잎은 어릴 때와 새로 나온 가지에서나 달리고 나무가 자라면서 울룩불룩한 잎 가시는 차츰 퇴화되어 잎 끝의 가시 하나만 남는다. 무슨 이유로 이런 가시 달린 잎을 만들었을까?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튼튼한 입과 이빨을 가졌더라도 이 어마어마한 잎 가시를 무시하고 먹어치울 수 있는 불가사리는 없기 때문이다.
호랑가시나무는 넓은 잎을 가진 늘 푸른 작은 나무로, 자연 상태로는 제주도와 전남북 서쪽 해안지대에 드물게 자란다. 암수 딴 나무이며 늦봄 잎겨드랑이에 5~6개의 작고 색깔이 하얀 꽃이 핀다. 굵은 콩알 크기의 동그란 열매가 가을이면 빨갛게 익어 다음해 봄까지도 가지에 달려 있는 모양이 아름다워 정원수나 분재로 심는다. 그러나 가시 같지 않은 잎 가시에 몇 번 호되게 당하고 나면 성질 급한 사람들은 홧김에 나무 통째로 잘라내 버린다. 그래서 정원에 큰 나무를 만나기 어렵다.
영어이름은 ‘holly'이며 우리 것보다 잎 모양이 좀 얌전하게 생긴 여러 종류의 서양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우리와는 달리 서양인들의 호랑가시나무 사랑은 각별하다. 십자가를 멘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로빈‘이라는 작은 새가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빼려고 온 힘을 다하여 쪼았다고 전한다. 로빈이 좋아하는 먹이가 바로 호랑가시나무 열매라고 한다. 또 춥고 음침한 겨울에 새빨간 열매를 달고 있어서 행운을 가져다주는 나무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전적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카드엔 실버 벨과 함께 어김없이 이 나무의 잎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도 크리스마스 때는 호랑가시나무 가지로 집안장식을 한다.
나라마다 호랑가시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유럽인들은 악마들이 이 나무를 무서워하여 집 주변이나 마구간에 걸어두면 사람이나 가축모두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영국에서는 이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면 행운을 가져와서 위험한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독일인들은 면류관을 짜는 데 이 나무를 썼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입춘 때를 비롯하여 해가 바뀔 때나 유행병이 심할 때 이 나무의 가지로 장식하여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풍습이 있다한다. 중국인들은 주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약제로 이용하였다. 껍질과 잎이 달린 가지로 즙을 만들어 마시며 강장제로서 특히 콩팥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호랑가시나무 외에 감탕나무, 먼나무, 꽝꽝나무, 대팻집나무, 일본에서 가져온 낙상홍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들어온 호랑가시나무 종류의 여러 원예품종들이 여기 저기 심겨지고 있다. 대부분 아름다운 붉은 열매를 자랑하는 늘 푸른 나무이며 남부지방에서만 자랄 수 있으나, 대팻집나무만은 잎 떨어지는 나무이고 중부지방까지 올라온다.
52. 계요등
닭 해의 마지막, 닭과 관련된 나무를 소개하는 것으로 한해를 마감하고자 한다. ‘닭’이 들어간 풀 종류에는 닭의난초, 닭의덩굴, 닭의장풀이 있고, 나무에는 계요등이 있다. 계요등은 길이 5~7m정도에 이르는 낙엽 덩굴식물이다. 근처에 다른 식물의 줄기를 마나면 왼쪽감기로 꼬불꼬불 타고 오르지만, 신세질 아무런 재료가 없어서 땅바닥을 길 때는 덩굴을 곧 바르게 뻗는다. 육지에서는 주로 충청 이남에 자라고 섬 지방은 동해는 울릉도, 서해는 대청도까지 올라온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도 자란다. 적응범위가 넓어 자람 터는 척박하고 건조한 곳에서 습한 곳까지 거의 낯가림이 없다. 잎은 손바닥 반 크기의 타원형이며 잎 아래가 심장형이다. 마주보기로 달리고 초록색이 더욱 진해 보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한, 흔히 보는 평범한 모양새의 잎이다. 그래서 푸름에 묻힌 계요등은 쉽게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8~9월에 피는 꽃을 보고나면 그 특별한 자태를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가 없다. 덩굴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뻗어 나온 꽃자루에는 손톱크기 남짓한 작은 통모양의 꽃이 핀다. 통의 위 부분이 5개로 갈라지고 꽃은 약간 주름이 생기면서 하얗게 핀다. 꽃통의 안쪽은 붉은 자주 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고 제법 긴 털이 촘촘히 뻗쳐있다. 초록을 배경으로 핀 자주 점박이 꽃은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 마땅한 꽃이 없어 심심해진 숲에다 한층 운치를 더해준다. 대부분 꽃이 같은 색깔로 피는 것과는 달리 흰빛과 자주 빛의 조화가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을 한번 본 사람들은 계요등이라면 꽃부터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열매는 지름 0.5cm정도로 둥글고 황갈색으로 익으며 표면이 반질거린다. 한방에선 열매와 뿌리를 말려서 관절염이나 각종 염증 치료약으로 쓰기도 한다.
‘계요등’이라는 식물 이름의 유래를 찾아본다. 자람이 왕성할 때 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보면 약간 구린 냄새가 난다. 그래서 다른 이름은 구린내나무다. 또 속명 Paederia는 라틴어의 ‘paidor’에서 유래되었는데, 역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봄여름에 냄새가 더 심하고 가을이 되면 거의 냄새가 없어진다. 사람 따라 다르겠으나 혐오감을 줄 정도로 냄새가 지독한 것은 아니며, 더욱이 양계장에서의 풍기는 진한 닭똥 냄새와 비교할 만큼 냄새가 역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름을 붙일 때는 좀 과장되기 마련이다. 우리 이름은 계요등(鷄尿藤)은 글자 그대로 닭 오줌 냄새가 나는 덩굴이란 뜻이다. 중국이름은 계시등(鷄屎藤, 鷄矢藤), 즉 닭똥냄새라는 것이다. 일본의 만요슈란 옛 시가집에 실린 이름은 시갈(屎葛), 아예 똥 냄새 덩굴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새 종류들은 항문과 요도가 합쳐져 있어서 똥오줌을 따로 따로 누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이름 계요등보다 중국이름 계시등이 보다 합리적인 이름이다. 또 계요등이라는 표기도 국어문법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똥오줌을 ‘분뇨’라고 하듯이 닭 오줌이란 말을 꼭 쓸려면 ‘계요등’가 아니라 ‘계뇨등’으로 해야 옳다는 의견이 많다. 일치감치 한글 전용을 시작한 북한 이름은 문법에 맞게 계뇨등이다. 이래저래 이름으로 말썽이 있다. 계요등은 또 다른 말썽 구석이 있다. 풀인지 나무인지 명확하지 않아서다. 일반적으로 풀과 나무의 구분 기준은 관다발이 있고 적어도 몇 년을 살며 겨울에 지상부가 살아있으면 나무, 그렇지 않으면 풀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요등은 대부분의 경우 겨울동안 지상부가 말라 죽는다. 따라서 필자는 풀에 넣은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식물도감은 대부분 나무로 분류했다. 반면 일본 식물도감에는 계요등을 풀로 분류해 두었다. 학자들 간의 좀 더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53. 개비자나무
개는 약 1만 년 전부터 사람 곁에서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개를 말할 때 충견(忠犬)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말 그대로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은 동물로 사랑을 받는다. 동양에서는 12간지의 열한 번째 동물이기도 한, 개와 사람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물에 ‘개’라는 접두어가 붙기만 하면 격이 떨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해 버린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많은 쓰임새 때문에 나무나라에 널리 알려진 비자나무와 생김새가 닮았으나 쓰임의 값어치가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개비자나무로서야 살아가는 방식이 비나나무와 다를 뿐,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할 터이다.
개비자나무는 한반도의 허리, 대체로 휴전선 이남의 숲 속 그늘에 주로 자라는 자그마한 나무다. 흔히 볼 수 있는 크기는 높이 3m정도의 늘 푸른 바늘잎나무다. 침엽수로서는 드물게 관목으로 분류되지만, 때로는 키가 5m를 넘어 소교목이라는 제법 큰 나무의 면모를 갖추기도 한다. 햇빛을 그렇게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다른 큰 활엽수 아래가 개비자나무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습기가 많은 숲의 가장자리나 계곡부를 좋아한다. 숲 속에서 푸름에 묻혀버리는 여름날의 개비자나무는 찾아내기가 어렵고, 낙엽 진 겨울 숲이라야 나무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자라는 경우가 드물고 한 두 그루씩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나무 밑의 약한 빛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잎이 달린 가지를 돌려나기 하면서 옆으로 뻗는다. 더욱이 새로 나온 가지는 잎과 마찬가지로 초록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햇빛이 부족한 곳에서의 광합성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려는 설계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대부분의 개비자나무 모습은 땅에 붙다시피 하여 둥그스름하게 퍼지지만, 가끔 크게 자라는 개체는 키가 훌쩍 커 제대로 된 나무의 모습을 갖춘다. 나이를 먹은 굵은 나무줄기는 암갈색의 껍질이 세로로 얕게 갈라진다.
잎은 너비 0.3~4cm, 길이 3~4cm정도로서 약간 넓은 선형(線形)이다. 비슷한 잎을 가진 주목이나 비자나무보다 잎이 더 넓고 길다. 잎 끝이 뾰족하나 전체적으로는 잎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가운데 잎맥이 볼록하며 뒷면에는 숨구멍이 있어서 하얗게 보인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는데, 바로 선 꼭대기 가지에서는 나선상에 가깝고 옆으로 뻗은 가지에서는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은 ‘非’자 모양이다. 암수가 다른 나무로 3~4월경에 꽃이 핀다. 암꽃은 작은 가지 끝에 거의 초록빛으로 2~3개씩 달리며, 수꽃은 연한 노란빛으로 잎겨드랑이에 6~9개가 모여 아래로 달린다. 열매는 새끼손가락 첫마디 크기에 둥글며, 꽃이 핀 다음 해 8∼9월에 자줏빛이 조금 들어간 붉은 빛으로 익는다. 1개의 씨가 들어있고 주위에는 약간 단맛이 나는 육질로 둘러 쌓여있다. 씨는 기름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나 냄새가 나므로 옛날에는 식용보다 등유나 기계유 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자나무와 비슷하지만 잎이 더 크고 뒷면의 숨구멍이 하얗게 보이며 손바닥을 펴서 잎의 끝을 눌러 보았을 때 찌르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차이점이다. 뿌리에서 맹아가 돋아 옆으로 퍼져 자라는 것을 눈개비자나무라고 한다. 개비자나무는 침엽수이면서 크게 자라지 않고 많은 가지가 뻗는 모습이 소박하고 평안한 감을 준다. 특히 추위에 비교적 강하므로 상록수가 적은 중부지방의 조경수로서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담벼락 밑 그늘진 곳에 한그루쯤 심어두면 자칫 삭막해져 버리기 쉬운 겨울날의 정원이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
54. 자금우
겨울 날 남해안이나 섬 지방, 제주도 여행을 해보면 색다른 상록의 자연경관이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중북부지방에서는 초록을 떨쳐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지난 세월을 아쉬움으로 느낄 때, 동백나무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참식나무, 가마귀쪽나무 등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이름도 생소한 나무들로 온 산은 겨울에도 초록덮개이다. 그러나 제대로 잘 보존된 상록수 숲은 사실 욕심쟁이다. 다른 종류는 아예 발을 못 붙이게 저희들 끼리 잔뜩 잎을 내밀어 숲속은 대낮에도 빛 한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구름이라도 살짝 끼면 거의 깜깜한 수준이다. 이런 곳에 감히 무슨 나무가 자랄 것이냐고 생각했겠지만 자금우란 나무가 당당히 터전을 잡고 있다.
자금우(紫金牛)는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아름다운 빛을 내는 소’란 뜻이다. 자금이란 불교용어로서 부처님 조각상에서 나오는 신비한 빛을 일컫는다. 자금 빛을 내는 덩치 큰 소의 이미지로 나무로 상상하였다면 너무 다른 모습에 실망할 것이다. 실제로 자금우는 가느다란 몸체에 키 자람이라고 한 뼘 남짓한 피그미나무이다. 왜 이름만 이렇게 근사한가? 작은 몸체가 한약제로 쓰이는데, 그 약의 이름이 ‘자금우’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붙여 둔 이름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관지에 특히 효험에 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종기에서 습진까지 여러 처방이 알려지고 있다.
자금우는 우리나라에서는 남해안에서 울릉도까지, 일본과 중국 및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펼치는 나무다. 늘 푸른 나무로서 직접 햇빛을 받지 않아도 상록수 그늘 밑에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번식은 낙엽이 썩어서 쌓인 부엽토 속에다 땅속줄기를 이리저리 뻗어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간다. 서로서로는 연결되어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줄기는 하늘로 향하여 곧 바로 서지 않는다. 사실 햇빛 경쟁에 뛰어 들지 않을 바에야 그럴 필요도 없다. 땅 속처럼 땅위 줄기도 옆 뻗음으로 충분하다. 자금우는 나무라는 사실을 먼저 알지 않았다면 자라는 모습으로만 보아서는 군말 없이 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잎은 주로 마주나기지만 흔히 줄기 끝에서는 돌려나기로 모여 달린다. 작은 달걀크기에 표면에는 윤기가 있고 가장자리에는 거의 침처럼 생긴 톱니가 있다. 음지에 자라는 잎이라서 수명이 길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잎갈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 작년에 자란 줄기의 잎겨드랑이에서는 6~7월에 걸쳐 손톱크기 남짓한 꽃이 핀다. 다섯 장의 꽃잎(정확히는 花冠)은 거의 흰빛이며 차츰 죽은 깨 소녀의 얼굴마냥 보랏빛 반점이 점점이 생긴다. 거의 땅에 붙다 시피한 키에 꽃은 아래로 달리니 눈에 잘 띠지 않고 수정을 해줄 곤충도 그렇게 많지 않다. 개미가 도와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자금우는 종자 번식에 크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땅속줄기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지고 나면 초록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다가 가을이 되면 콩알 굵기로 빨갛게 익는다. 열매는 겨울을 넘겨 다음해 꽃이 필 때까지도 달려 있다. 초록을 바탕으로 잎 사이사이에 2~3개씩 얼굴을 내미는 빨간 열매가 자금우의 매력 포인트다. 아파트와 같은 회색공간에 특히 잘 어울리는 나무다.
자금우와 매우 비슷한 나무에 산호수가 있다. 자라는 지역도 같고 잎 모양이나 줄기를 옆으로 뻗어나가는 모습도 거의 차이가 없다. 산호수는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크고 때로는 겹톱니이며 양면에 털이 있는 점이 자금우와 다르다. 자금우의 또 다른 형제인 백량금은 키가 훨씬 더 크고 잎이 길며 두껍고 가장자리에 둔한 물결톱니가 있어서 구별할 수 있다. 이 셋이 모여 자금우과(科)라는 일가를 이룬다.
55. 노간주나무
낙엽 져 버린 겨울 산, 간간이 몰아치는 눈바람이 더욱 삭막하게 느껴지는 야산에는 흔히 1자 모양으로 서 있는 특별한 모습의 나무가 눈길을 끈다. 바로 노간주나무다. 멋없이 키만 커져 버린 꺽다리 허깨비가 웃옷 하나 달랑 걸치고 찬바람에 맞서는 것 같아 애처롭기까지 하다. 노간주나무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자란다. 눈치 빠른 다른 나무들은 다 싫다는 버려진 땅에 둥지를 튼다. 힘든 경쟁을 피하여 찾아든 최후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삶이 어렵다고 한탄만 하여서는 냉혹한 이웃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싹트는 힘이 강한 것은 기본이고 잎은 뾰족뾰족하여 초식동물이 함부로 먹을 수 없게 진화하였다. 아울러서 열매는 새들이 좋아 하도록 설계하여 여기저기 널리 전파한 덕분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손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양지바른 곳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다. 특히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여 충북 단양 등 시멘트 공장이 있는 바위산에, 오랜 친구 회양목과 같이 살아가는 늘 푸른 바늘잎나무다. 키 5~6m, 지름 한 뼘까지도 자란다고 하나 흔히 보는 나무는 팔목 굵기가 고작이다. 자람 터가 대부분 척박한 곳이니 생명을 부지할 만큼만 먹고, 크게 빨리 자라려고 욕심피우지 않는다.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모조리 위를 향하여 다닥다닥 붙어 서로 사이좋게 의지한다. 자연히 살집이라고는 거의 없어 나무나라에서 제일 날씬한 몸매를 자랑한다.
잎은 손가락 마디 살짝 길이 정도이고 끝이 날카로워 함부로 만지면 마구 찌른다. 가지와 거의 직각으로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돌려나기 한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며 암나무에는 5월쯤 꽃이 피어 열매는 한해를 건너 다음 해 10월에 검붉게 익는다. 굵기가 콩알 만 한 열매는 주당들이 좋아하는 진(gin)의 향내를 내는 저장고다.‘juniper‘라고 하는 서양노간주나무의 열매를 그들은 멀리 희랍시대부터 술 향기를 내는 데 사용하였다한다. 우리의 노간주나무 열매도 진을 만드는데 모자람이 없다. 완전히 익어버리기 전에 따다가 소주 한 되 기준으로 20알정도 넣어서 꽁꽁 묶어 둔다. 한 달 가량 두었다가 건져내 버리면 바로 노간주 술, 두송주(杜松酒)가 된다. 가짜 의심은 처음부터 할 필요도 없는 순종‘코리안 진’이다. 그 외 가을에 딴 열매를 달여 먹기도 하고 기름을 짜서 약으로 쓰기도 했다. 통풍, 관절염, 근육통, 신경통에 특효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사비나 노간주나무(Juniperus sabina) 열매를 옛날에는 낙태시킬 목적으로 널리 사용하였다. 강한 독성 때문에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고 한다.
노간주나무는 노가자(老柯子), 노송(老松), 두송(杜松)등 여러 이름이 있다. 자그마한 이 나무의 목질도 쓰임이 예사롭지 않다. 유태인이 할례를 거쳐 성인이 되듯이 이 땅의 우공(牛公)들은 송아지 때 노간주나무 가지로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어미 소가 될 수 없다. 나무를 불에 살살 구우면 잘 구부려지고 질기기 때문에 죄 없는 우공들에게는 평생을 괴롭히는 악마의 나무가 된 셈이다. 흑갈색으로 갈라지는 나무껍질은 추출하여 천을 염색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19세기 초 서유구가 쓴 농업기술서인 행포지(杏浦志)에는 '노간주나무가 옆에 있으면 배나무는 전부 죽는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붉은별무늬병의 중간기주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다. 그래서 향나무와 함께 노간주나무는 배 밭주인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노간주나무는 해변, 좀, 평강, 서울 등의 접두어가 붙은 여러 품종이 알려져 있다. 특히 해변노간주나무는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에 포함된다.
56. 까마귀쪽나무
입맞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를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암수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종족보전 본능의 시작점을 알아보겠다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일일 것 같아서다. 입맞춤에서 나는 소리를 떠올린다면 단연 ‘쪽’이란 의성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에 쪽이 들어간 나무들은 입맞춤을 관련지으려 한다. 우리의 옛 나무 타령에도 ‘입 맞추어 쪽나무’라고 했으니 더욱 그렇다. 까마귀쪽나무를 비롯하여 쪽동백나무, 다정큼나무의 일부 지방 사투리인 쪽나무등이 있다.
까마귀쪽나무라는 이름을 들으면, 까마귀의 입맞춤으로 붙인 이름일 것이라는 상상에서 좀처럼 놓여 날 수가 없다. 그럼직하지만 입 맞추는 까마귀를 본적이 없으며, 더욱이 까마귀 입에서 ‘쪽!’ 소리가 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일 뿐이다. 까마귀쪽나무의 ‘쪽’은 옛날 염색할 때 널리 쓰이던 쪽 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필자는 짐작한다. 까마귀쪽나무의 열매는 초록색으로 시작하여 다음해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푸른 빛깔이 들어간 새까만 색으로 익는다. 이는 쪽을 삶아 염색물을 만들어 놓았을 때의 진한 흑청색, 마치 까마귀 몸체처럼 진한 쪽물과 닮았다. 그래서 쪽보다 더 진한 까마귀처럼 검은 열매를 가진 나무라는 뜻으로 까마귀쪽나무란 이름이 붙었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남해안의 섬 지방에 자라는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높이7~8m, 굵기는 지름 한 뼘 정도까지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바닷가 가까운 야산 자락을 터전으로 잡고 있어서 바람과 짠물에 시달린 탓인지 큰 나무를 만나기는 어렵다. 곰솔, 팽나무등과 함께 소금바람에 강하므로 바닷가 상록수 숲이라면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무줄기는 짙은 적갈색의 매끄러운 껍질을 가지며, 많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둥그스름한 나무모양을 만든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앞뒤의 색깔이 다른 기다란 잎이 특별하다.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나무로서 최근에는 해안도로의 가로수나 해상공원의 조경수로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잎은 손가락 3~4개 너비에 손바닥 길이로 긴 타원형에 아주 두툼하게 생겼다. 원래 어긋나기로 붙어 있으나 마디가 짧아 가지 끝에 모여 달린 것처럼 보인다. 잎의 표면은 진한 초록색이고 광택이 있다. 뒷면은 황갈색의 털이 촘촘히 덮여있으며 잎맥이 볼록 나와 있어서 명확하게 보인다. 가장자라에 테를 두른 듯 조금 굵은 잎맥이 있어서 뒤로 약간 말린다. 까마귀쪽나무의 잎은 두껍고 뒷면의 황갈색 털 등이 비슷한 나뭇잎을 잘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게 생겼다.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가을이면 꽃대가 거의 없는 연노랑 빛 작은 꽃이 잎겨드랑이에 여러 개씩 다닥다닥 붙어 핀다. 수꽃은 꽃잎이 작고 길게 나온 여러 개의 수술대만 눈에 띈다. 바로 열매가 달려 익는데 거의 1년이 걸린다. 손가락마디만큼이나 굵어지고 거의 까맣게 되어 표면이 반질반질해 지면 다 익었다는 신호다. 열매는 가운데에 한 개의 씨가 들어있는 장과(漿果)이고 주위는 약간 달콤한 맛이 나는 까만 즙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새들새들이 당연히 숨넘어가게 좋아할 열매, 익자마자 바로 따 먹어버리므로 익은 열매를 보기가 어렵다고도 한다. 열매가 너무 커서 대부분의 새들은 통째로 삼킬 수는 없고 쪼아서 즙을 빨아먹는다. 종자 번식에 새가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중국에는 꼭 같은 나무는 없지만 까마귀쪽나무 종류를 목강자(木姜子)라고 부른다. 일본이름은 하마비와(ハマビワ), 바닷가에 자라면서 잎의 모습이 비파나무와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라한다.
57. 조록나무
조록나무는 제주도와 완도를 비롯한 따뜻한 섬 지방에 주로 자란다. 아열대의 동남아시아가 원래의 자람 터이며 알려진 것만 15종이다. 일본남부, 대마도, 중국양자강 남부에도 있으며 우리나라는 살아 갈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인 셈이다. 흔히 생육한계선에 오면 자람이 시원치 않는 것과는 달리, 제주도의 상록 숲 속에서 녹나무나 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키 20m, 지름 1m를 훌쩍 넘겨버리는 큰 나무이다. 현미경으로 나무속을 들여다보면 마치 석류 알을 박아 놓은 것처럼 작은 세포들로 꽉 차있다. 나무질이 균일하고 단단할 수밖에 없다. 기둥과 같이 힘을 받는 곳에 귀중하게 쓰였다. 실제로 제주 초가집의 기둥이 흔히 조록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중기 건물인 제주향교와 연북정(沿北亭)의 기둥 일부가 바로 조록나무이며, 송원대의 도자기 2만여 점이 실려 유명해진 신안 앞 바다의 침몰 중국목선에서도 음료수 저장 통의 나무로서 제몫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 탐라목석원에는 조록나무 고사목 뿌리를 수집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오래 살고 썩지 않는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조록나무만이 이런 특징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제주도에 흔하고 크게 자라는 나무의 하나이었다는 증거일 따름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갈라지지는 않으나 약간 거칠며 어린 가지에는 처음에 털이 있다가 차츰 없어진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이며 동백나무 잎 크기 정도이다. 두껍고 표면이 반질반질하며 가장 자리가 밋밋하다. 흔히 남부 지방 상록수에서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나무의 잎이나 작은 가지에는 특별한 모양의 벌레집이 생기므로 다른 나무와 구별된다. 메추리 알 크기에서 때로는 거의 달걀만한 충영(蟲廮)이란 이름의 벌레혹이 붙어있다. 한 나무에 수십 개, 때로는 수백 개씩 생기며 처음에는 초록색이나 차츰 진한 갈색의 작은 자루모양으로 되어있다. 작은 것은 나무에 껍질 벗기지 않은 밤알이 달린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속에는 붉나무에서 보는 오배자(五倍子) 벌레가 들어 있다. 벌레가 자라 탈출해 버리면 속이 비어 꽈리모양이 되는데, 입으로 불어 악기처럼 소리가 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 타닌이 약 40%나 포함되어 있다. 오배자와 함께 옛날에는 타닌 채취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조록나무의 벌레집은 모양이 진기하고 독특하여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처음 이름을 붙일 때 옛날 사람들도 나무의 다른 특징들은 제쳐두고 이 벌레집에 주목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자루를 조록이라 하므로 작은 ‘조록‘을 달고 있는 나무란 뜻에서 조록나무가 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은 봄에 피고 원뿔모양 꽃차례에 달리며 붉은 꽃받침으로만 구성된 작은 꽃이 핀다. 가을에 익는 콩알만한 열매의 끝에는 곤충의 더듬이 마냥 짧은 2개의 돌기가 특징이며 가운데로 갈라지면서 종자가 떨어지는 삭과(蒴果)이다. 겉에는 연한 갈색의 짧은 털이 촘촘하고 모양은 사마귀와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일본의 어느 지방에서는 아예 ‘사마귀나무’라고 한다. 조록나무 곁에 서서 작은 가지의 잎으로 쓰다듬으면 사마귀가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사마귀가 나무를 타로 달아난다고 재미있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열매껍질이 2개로 갈라지면서 속에서 검은 종자가 나온다.
58. 백송
백송(白松)은 여러 모습을 가진 소나무 종류중의 하나다. 흰 눈을 뒤집어 쓴 듯 나무 전체가 하얀 것이 아니라 줄기가 하얗다. 무엇이든 생김이 독특하면 금세 눈에 띄게 마련, 백송도 한번 보기만 하면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특별나다. 하얀 얼룩 껍질이 트레이드마크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흔히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흑갈색의 일반 소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어릴 때의 백송 껍질은 거의 푸른빛이다. 나이를 먹으면 큰 비늘조각으로 벗겨지면서 흰빛이 차츰차츰 섞이기 시작한다. 점점 흰 얼룩무늬가 많아지다가 나중에는 아주 하얗게 된다. 사람이 차츰 하얀 머리로 늙어가듯, 백송의 일생은 이렇게 하얀 껍질로 나이 값을 한다. 사람과 다르다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하얀 껍질이 결코 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백송이란 이름 외에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하며 한글전용을 하는 북한 사람들은 흰소나무라 부른다. 백송의 영어이름을 'white pine'으로 알았다면 착각이다. 'Lace-bark pine'이다. 서양 사람들은 껍질의 흰 빛깔보다 얼룩특징을 더 중요시하여 '얼룩소나무'로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white pine은 스트로브잣나무를 가리킨다.
우리가 아는 백색의 뜻은 밝고 깨끗하면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함이 들어있다. 그래서 백송의 흰 껍질은 좋은 일이 일어날 길조를 상징한다. 지금의 서울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8호 ‘재동 백송’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집권과정을 지켜본 나무이다. 그가 아직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기 전,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의 은밀한 계획이 바로 이 백송이 바라다 보이는 조대비의 사가(私家) 사랑채에서 진행됐다. 불안한 나날을 오직 백송 껍질의 색깔을 보면서 지냈다한다. 이 무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희어지자 개혁정치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 거의 150여년 뒤, 현직 대통령이 쫓겨날 위기에 몰렸을 때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헌법제판소의 백송은 껍질이 더 희게 보였다고한다. 사실 백송 껍질이 더 하얗게 보이는 것은 나무 자신의 영양상태가 좋아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일을 과학의 잣대로 보면 재미가 없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믿음을 가질 때 믿음이 바로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 나무는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의 중북부를 원래의 자람 터로 하는 나무다. 원산지에서도 자연 상태에서 자라기보다, 특별한 모습 때문에 주로 가로수나 조경수로 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오래전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처음 가져다 심기 시작했다. 자람이 늦은 나무로 유명하지만 특히 어릴 때의 자람은 너무 느리다. 10~15년은 꾹 참고 기다려도 키는 한두 뼘 남짓이다. 이렇게 자람이 늦고 흰 껍질은 길조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였으니, 예부터 귀한 나무의 대표 격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굵기의 백송은 특별 보호목이 될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한에 5그루, 북한은 개성에 1그루의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중 충남 예산의 ‘추사백송’을 제외하면, 자라는 곳은 모두 서울 경기 지방이다. 중국왕래를 할 수 있는 고위관리가 주로 서울 경기에 살았던 탓일 터이다.
백송은 흰 껍질만이 아니라 잎의 생김새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소나무 종류를 크게 나눌 때 잎이 두개씩 나는 소나무와 곰솔 등을 경송(硬松, hard pine), 잎이 다섯 개씩 나는 잣나무 등을 연송(軟松, soft pine)이라 한다. 반면에 백송만은 3개씩의 잎을 가진다. 어느 쪽에 들어가야 할지 조금 애매하지만 잣나무와 같이 잎 속의 관다발이 하나이므로 연송종류에 포함시킨다.
59. 겨우살이
남의 눈치 안보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얌체라고 한다. 인간사회의 얌체족이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을 속여먹듯이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멍청한 박새가 한 계절 내내 헛고생하게 만드는 새 나라의 얌체다. 나무나라 제일 얌체는 누구일까? 나무의 생태를 조금 아는 이라면 오래 생각할 것 없이 겨우살이라고 할 것이다.
겨우 겨우 간신히 살아간다 하여 겨우살이, 겨울에도 푸르므로 겨울살이가 겨우살이로 되었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한자로 동청(凍靑)이라고 하니 겨울살이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주로 참나무 종류의 큰 나무 위 높다란 가지에 붙어 자라는 ‘나무 위의 작은 나무’로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까치집이다. 모양은 풀 같지만 겨울에 어미나무의 잎이 다 떨어져도 혼자 진한 초록빛을 자랑하는 늘푸른 나무로 분류된다. 가을이면 굵은 콩알만 한 노오란 열매가 달린다. 맑은 날 햇살에 비치는 열매는 영롱한 수정처럼 아름답다.
열매는 속에 파란 씨앗이 들어있고 끈적끈적하며 말랑말랑한 육질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산새 들새가 숨넘어가게 좋아하는 먹이다. 배불리 열매를 따먹은 산새가 다른 나뭇가지에 앉아서 콧노래와 함께 ‘실례‘을 하면 육질의 일부와 씨앗은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배설된다. 마르면서 마치 방수성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단단하게 가지에 고정되어 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끄떡 없이 씨앗을 보관할 수 있는 유전자 설계를 해둔 것이다. 알맞은 환경이 되면 싹이 트고 뿌리가 돋아나면서 나무껍질을 뚫고 살 속을 파고 들어가 어미나무의 수분과 필수 영양소를 빨아먹고 산다.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있었던지, 잎에서는 광합성을 조금씩 하여 모자라는 영양분을 보충해가면서 삶의 여유를 즐긴다.
사시사철 놀아도 물 걱정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새 찬 겨울바람이 아무리 몰아쳐도 겨우살이는 흔들흔들 그네 타는 어린이처럼 마냥 즐겁다. 땅에다 뿌리를 박고 다른 나무들과 필사적인 경쟁을 하는 어미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질 노릇이다. 뽑아내 버릴 수도 어디다 하소연 할 아무런 수단도 방법도 없으니 고스란히 당하고도 운명처럼 살아간다.
이런 얌체나무를 서양 사람들은 특별히 소원을 들어주는 좋은 나무로 생각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축하파티가 열리는 방 문간에 걸어 놓고 이 아래를 지나가면 행운이 온다고 알려져 있다. 또 마력과 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겨우살이가 붙은 나무 밑에서 입맞춤을 하면 반드시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가지는 Y자처럼 두 갈래로 계속 갈라지고 끝에 두개의 잎이 마주나기하며 가지는 둥글고 황록색이다. 키가 1m에 이르기도 하나 대체로 50~60cm 정도로서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 까치집 모양을 한다. 잎은 피뢰침처럼 생겼고 진한 초록빛으로 도톰하고 육질이 많으나 다른 상록수처럼 윤기가 자르르 하지는 않다. 꽃은 암수 딴 나무로 이른 봄 가지 끝에 연한 황색의 작은 꽃이 핀다.
겨우살이 종류에는 이외에도 남쪽 섬의 동백나무에 주로 기생하는 동백나무겨우살이와 난대림에서 매우 드물게 만나는 참나무겨우살이(흔히 참나무에 잘 기생하는 일반 겨우살이와는 전혀 다름)를 비롯하여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성 꼬리겨우살이 등이 있다. 특히 뽕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를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여 옛 사람들은 귀중한 약제로 이용하였다.
60. 향나무
우리나라에 향을 피우는 풍습이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 이전 불교와 함께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아열대 지방은 땀이 많아 사람들이 모이면 악취를 풍길 수밖에 없다. 이런 냄새를 없애주는 수단으로 향 피우기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차츰 향은 부정(不淨)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하여 불교 의식으로 고착되었다. 향의 재료로는 열대지방에서 나오는 침향을 최고로 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수입품인 침향은 값이 비싸고 귀하여 귀족들이나 제한적으로 겨우 쓸 수 있었다. 일반사람들도 쓸 수 있는 침향 대용품이 필요하였다. 널리 사용할 수 있는 향의 재료는 우리나라에서는 향나무뿐이다. 향나무는 태워서 향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발향이라 하여 부인들의 속옷 위에 늘어트리는 장신구, 점치는 도구, 염주알 등에 까지 널리 쓰였다. 그 외에도 나무자체로는 고급 조각재, 가구재, 불상, 관재 등으로 애용되었다. 역사 기록으로는 신라 경순왕 9년(935) 왕은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항복하러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온다. 경순왕의 자의이던 타의이던 천년 사직을 통째로 넘기려 가는 부끄러운 행차를 고급 향나무로 장식하였다는 것은 나라가 망한 원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은 침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향나무를 수백 년 수천 년 오래 땅에 묻어두면 침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다 향나무를 묻어 미륵보살을 공양하고 깨끗한 세상에 왕생하고자 하였으며, 미륵사상과 결부되어 널리 퍼졌다. 바로 고려 때부터 시작된 매향(埋香)의식이다. 향나무를 묻고는 그 자리에다 매향비를 세웠다. 경남 사천 고려 말 우왕 13년(1387)에 세운 사천 매향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륵보살께 빈다’라는 뜻의 글을 새겨 놓았다. 또 척주지(陟州誌)에는 ‘고려 때 강릉 정동에 향나무 310그루를 묻었다’하며 비문의 내용만 전해지는 강원도 고성 사선봉 매향비에도 동해안 각 진과 포에 향나무 2천5백 그루를 묻었다한다. 확실한 묻은 지점은 알 수 없으나 가장 적당한 위치가 모래시계 이후 유명해진 정동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해안에는 여러 곳에서 지금도 매향비가 가끔 발견된다. 하지만 향나무를 아무리 오래 땅속에 묻어 두어도 열대지방에서 나는 진짜 침향이 될 수는 없다. 침향과 향나무는 서로 과(科)가 다를 만큼 식물학적으로는 사돈의 팔촌도 넘기 때문이다.
향나무는 소나무처럼 햇빛을 좋아하는 나무다. 아울러서 육신은 쓰임이 많으니 산속의 향나무가 남아 날 리 없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굵은 향나무는 모두 심은 나무다. 다만 울릉도 절벽에 붙어 자라는 향나무들은 수천 년을 이어온 그들만의 자연 자람 터이다. 향나무는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서 굵기가 한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잎은 어릴 때는 짧고 끝이 날카로운 바늘잎이 대부분이며 손바닥에 가시가 박힐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나면 바늘잎 이외에 찌르지 않은 비늘잎이 함께 생긴다. 나무 속살은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이므로 자단(紫檀)이라고도 부른다. 향나무의 날카로운 바늘잎이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 않고 비늘잎만 달리게 개량한 가이스까향나무(螺絲柏), 둥근 모양의 옥향(玉香)은 주로 정원수로 심고 있다. 그 외 아예 누워서 자라는 눈향나무, 우물가에 주로 심는 뚝향나무, 미국에서 수입한 연필향나무는 모두 한 식구이다.
61. 황칠나무
'그대 아니 보았더냐 궁복산 가득한 황금빛 액/맑고 고와 반짝 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받듯 하네/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나니/잘 익은 치자나무 어찌 이와 견줄소냐...'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황칠(黃漆)이란 시를 송재소 교수가 번역한 일부 내용이다. 우리의 전통 칠은 옻나무 진에서 얻어지는 옻으로 짙은 적갈색을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져 버린 칠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황칠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황금의 빛을 낼 수 있는 황칠은 바로 황칠나무에서 얻어진다. 황금으로 도금한 것 같다하여 아예 금칠(金漆)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황칠은 중국 쪽에 더 잘 알려졌다. 계림지(鷄林志)라는 고문헌에, '고려 황칠은 섬에서 나고 본래 백제에서 산출된다. 절인(浙人)은 신라칠이라고 부른다'하였으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하여 삼국시대부터 귀중한 특산물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황칠을 직접 구하기 어려웠던 발해는 서기 777년 사신 사도몽을 보내어 일본 황칠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원나라에서 황칠을 보내 달라는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원종 12년(1271) 왕은 '우리나라가 저축하였던 황칠은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으며 그 산지는 남해 바다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가 보내겠다. 우선 가지고 있는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瀝汁)을 만드는 장인은 황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 보내겠다' 하였으며 이어서 충렬왕 2년(1276)과 8년(1282)에는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황칠을 가져다주었다. 조선왕조 때는 정조 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완도의 황칠은 근년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도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규제하여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황칠에 관련된 기록은 잠깐 훑어보아도 이와 같이 수없이 나온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가장 품질 좋은 황칠생산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오면서 안타깝게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이 심기를 꺼려하여 아예 맥이 끊겨 버렸다. 최근에 들어서야 전통 황칠을 다시 살리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황칠의 도막이 잘 벗겨지고 물에 약한 등 아직은 옛 기술을 완전 재현하는 데는 갈 길이 멀다.
남부 지방의 해변과 섬 지방에 자라는 늘 푸른 넓은 잎 큰 나무로 키가 15m에 이른다. 껍질은 갈라지지 않아 매끄럽고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며 윤기가 난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처음에는 3-5개로 갈라지나 나이가 먹으면 긴 타원형에 톱니가 없는 보통 모양의 잎만 남는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6월에 흰빛으로 피며 타원형의 열매는 30~40여개씩 공처럼 모여 달리 고 10월에 검은빛으로 익는다. 이 나무에는 우리나라 천 여 종의 나무에서 오직 혼자만 갖고 있는 '수평수지구(水平樹脂溝)'라는 세포가 특징이다. 황칠은 음력 6월쯤 나무줄기에 칼로 금을 그어서 채취한다. 매우 적은 양이 나오며 처음에는 우유 빛이나 공기 중에서 산화되어 황색이 된다. 황칠을 하면 금빛을 띠고 있으면서도 투명하여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금빛을 더욱 강하게 내기 위하여 먼저 치자 물을 올린 다음 황칠로 마감하기도 한다.
이름이 비슷한 버드나무과의 황철나무가 있다. 사시나무 종류로서 추운 지방에 자라는 낙엽수이다. 황칠나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나무다.
62. 아왜나무
봄날, 아름다운 푸른 숲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흔하다. 산불 때문이다. 살아있는 대부분의 나무는 수분이 많아 잘 탈 것 같지 않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는 가느다란 바늘잎이 묶음으로 모여 있어서 잘 탄다. 반면에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 그중에서도 늘 푸른 활엽수라면 산불 번짐을 훨씬 더 잘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푸른 활엽수가 많은 제주도에서 산불 났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렵다. 산불 예방조치로는 불에 잘 타지 않은 나무를 심는 방법도 포함된다. 아왜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불에 버틸 힘이 강한 나무로 유명하다. 즉 방화수(防火樹)로서 널리 알려진 나무다. 한 나무씩보다 다른 나무들 사이사이에 여러 줄로 이어 심으면 더 효과적인 천연 방화벽을 만들 수 있다. 산자락에 위치한 인가 근처라면 아왜나무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산불에 대비할만하다. 다만 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은 따뜻한 남쪽지방이라 추운 지방은 그림의 떡이다.
불에 잘 타지 않은 성질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아왜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서 잎은 거의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크고 두꺼우며 많은 수분을 가지고 있다. 나무 몸체도 원래부터 함수율이 높다. 더욱 재미있는 현상은 일단 불에 붙으면 수분이 빠져나오면서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어 놓는다. 마치 거품형 소화기처럼 표면을 덮어서 차단막을 만드는 셈이니 불에 잘 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런 특징을 일본사람들은 아와부끼(アワブキ, 泡吹)나무, 즉 ‘거품 내품는 나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이름 아왜나무는 일본어 이름의 영향을 받아 거품나무란 뜻으로 처음에 ‘아와나무’로 부르다가 아왜나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왜나무의 학명(Viburnum awabuki K. Koch)에 종명 'awabuki'란 글자로만 남아있고 오늘날 일본말로 아와부끼라고 하면 나도밤나무를 말한다.
아왜나무의 자람 터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일본의 남서부, 중국남부 등 난대에서 아열대 걸쳐있어서 이름마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바닷바람에도 강하고 건조지역에도 잘 버티며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 해안가의 조경에 빠지지 않는다.
나무는 높이 5~9m정도에 지름 한 뼘 정도까지 이르는 그리 크지 않는 아담한 사이즈다. 잎은 길이가 20cm까지에 이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길다. 잎 모양은 긴 타원형으로 두껍고 윤기가 있으며 잎자루는 약간 붉게 보인다.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하얀 꽃이 기다란 원뿔모양의 꽃대에 수없이 핀다. 가을에 들어서면서 꽃이 핀 자리엔 콩알 굵기의 새빨간 열매가 익는다. 짙푸른 녹색 잎을 바탕으로 수천수만 개의 붉은 열매가 나무 전체에 달려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산호를 닮았다고 하여 일본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산호수(珊瑚樹)를 뜻하는 산고쥬(サンゴジュ)이다. 중국이름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조화수(早禾樹)이다.
우리나라 수목도감에는 아왜나무의 한자말을 흔히 ‘珊瑚樹’로 적고 있다. 우리의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사실 나무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은 천여 종의 우리나라 나무 중에 몇 십종에 불과하다. 글을 아는 옛 양반들이 알고 있는 나무가 얼마 되지 않으니, 대부분의 우리나무는 한자 이름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식물분류학이란 신학문을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받아들인 초창기 우리 선배 학자들은, 해방 후 우리말 나무 관련 책을 만들면서 일본식 한자 나무 이름을 그대로 우리말처럼 사용하여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수목도감에 적힌 한자이름은 상당부분이 일본이름 그대로이다.
63. 갯버들
따뜻한 바람이 귓불로 스칠 즈음 겨우내 꽁꽁 얼었던 대지는 살짝 봄내음이 풍겨진다. 먼 산에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고 실개천의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면 냇가 양지 녘에는 보송보송 귀여운 털 꽁지를 조랑조랑 매다는 녀석들이 있다. 은색의 하얀 털이 저녁노을에 반짝이기라도 할라치면 봄의 개울가는 요정들의 잔치 터 같다. 이들이 바로 버들강아지 혹은 버들개지라 부르는 갯버들이 꽃을 피운 모습이다. 예쁘기로 따지면 결코 강아지 못지않다. 산 속의 생강나무, 들판의 산수유가 아직 노란 꽃잎을 선도 뵈기 전부터 설쳐대는 부지런함 덕분에 오늘날 여기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나 보다. 갯버들은 삭막한 겨울이 가고 따사로움이 왔음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이다. 요즈음은 꽃꽂이 여인의 손끝에서 삭막한 아파트 안방으로 봄 향기를 전달해 주기도 한다.
강가의 물이 들락거리는 '개'를 만나면 2세를 만들어낼 준비가 완료된 셈이다. 그래서 개에 잘 자란다하여 개의 버들이 갯버들이 되었다. 이름 그대로 강이나 개울가를 비롯한 습지를 좋아한다. 몸체가 물속에 잠기어도 숨 막히지 않고 생명을 이어간다. 아예 물속에서도 뿌리가 썩지 않고 녹아있는 산소까지 흡수하면서 생명을 이어간다. 평생을 자라도 사람 키를 넘기기가 어려운 난쟁이 나무다. 하지만 키다리 나무들 부러워하지 않는다. 개울을 지켜주는 수호천사로서 그녀만이 할 수 있은 역할이 있어서다. 뻣뻣한 외대줄기는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다. 대신에 수많은 가지가 올라와 커다란 포기를 만든다. 평생을 자라도 사람 키를 넘기기가 어렵지만 물가에서만은 남부럽지 않다.
초봄에 막 자란 어린 가지는 연한 초록색을 띠고 있으며 자세히 보면 황록색의 털이 나 있다. 차츰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털도 없어진다. 잎은 기다란 피뢰침 모양이고 뾰족한 잎들이 어긋나게 가지에 달린다. 뒷면에는 부드러운 털이 덮여서 하얗게 보인다. 꽃이 피고 한참 지나면 버들강아지 속에 들어있던 깨알 같은 씨는 성긴 솜털을 달고 다른 버드나무처럼 봄바람 따라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새로운 자손을 퍼트린다. 여름철에 비가 흠씬 내려 불어난 물살에 뿌리의 흙이 씻겨 내려가 버리면, 실지렁이 모양의 잔뿌리가 곧잘 드러난다. 이곳은 체 같아서 물에 떠내려 오던 숲속의 온갖 잡동사니가 모두 걸려든다. 천연수질 정화장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곳에는 오늘날 이름도 아련한 버들붕어, 버들치, 버들개 등 우리의 토종물고기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갯버들과 비슷한 종류로서 선조 들이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널리 쓰인 키버들이 있다. 다른 이름으로 고리버들이라 하며 쉽게 휘고 질긴 가지를 엮어서 옻상자(고리), 키, 광주리, 동고리, 반짇고리 등을 만들었다. 고리버들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특히 고리장이 혹은 유기장(柳器匠)이라 하여 백정과 함께 가장 멸시받는 계급으로 분류된다.
고려사 최충헌(1149~1219) 조에 보면 ‘압록강 국경지대에 살고있는 양수척(楊水尺)은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여 이주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수초를 따라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사냥이나 하고 버들 그릇을 엮어서 팔아먹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대체로 기생은 근본이 고리장이 집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리장이가 천민이 된 것은 줄잡아도 천년은 넘는 것 같다. 갯버들과 키버들은 모양이 비슷하나 어린 가지에 털이 있고 잎은 항상 어긋나기로 달리는 것이 갯버들, 털이 없고 가끔 마주보기로 달리는 잎이 섞여 있으면 키버들이다.
64. 매화나무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 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하 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조선시대의 가사집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매화타령의 첫머리이다. 매화는 이처럼 봄기운이 채 찾아오기도 전에 눈발의 흩뿌림에도 아랑곳없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다. 매화가 성급하게 봄소식을 전한 뒤에 이르러서야 다른 꽃들도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어서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목련이 피어나면서 대지는 비로소 봄기운이 익어 간다. 그리고 개나리,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이 피면 완전한 봄이 찾아오는 것이다.
매화나무는 꽃이 너무 일찍 피어 조매(早梅)이고, 추운 날씨에 핀다 하여 동매라고도 한다. 눈 속에도 피니 설중매이고, 봄 냄새를 전한다 하여 춘매이다. 매화를 두고 부르는 이름은 이렇게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중국의 쓰촨성이 원산지인 매화는 오래전부터 시나 그림의 소재로서 단골손님이었다. 중국을 떠나 한국에 건너오면서도 몸만 달랑 온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맺어둔 인연을 고스란히 함께 갖고 왔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왕24년(41)조에 “8월, 매화가 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는 우박을 매실만하다고 비교한 기록이 여러 번 있는 것으로 보아, 매화나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매화가 정말 만개한 시기는 아무래도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라고 생각된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의 첫머리에 꼽히면서, 매화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문화이고 멋이었다. 매화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시와 그림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매화를 노래한 선비들 중에 퇴계 이황만큼 매화사랑이 각별하였던 이도 없다. 그는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에도 매화 물주기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매화 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이란 시집으로 묶어 두었고, 문집에 실린 것까지 포함하면 무려 107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그는 매화를 그냥 매화로 부르기조차 삼가 했다. 퇴계 시 속의 매화는 흔히 매형(梅兄)이 아니면 매군(梅君), 때로는 매선(梅仙)이 되기도 했다. 15-6C부터는 백자에 매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그림에 등장한다. 김홍도의 매작도(梅鵲圖)를 비롯하여 민화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화가들은 매화를 즐겨 그렸다.
그렇다고 매화나무가 기품 있는 꽃 모양새를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꽃나무만은 아니다. 열매 또한 사람에게 매우 이롭게 쓰이는 과일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이 필 때는 매화나무, 열매가 달릴 때는 매실나무이다. 매실 가운데 익어도 푸른빛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청매(靑梅)라고 하며, 설익었을 때 수확한 매실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불에 쬐어 말린 것은 오매(烏梅)라 하는데 쓰임새가 다르다. 청매는 각종 건강식품으로, 오매는 설사를 멈추게 하고 염증을 낮게 하는 한약재로 쓰인다.
매화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며 다 자라도 키가 5-6m 정도의 자그마한 나무다. 수많은 품종이 있으나 기본종류는 대개 연한 분홍색으로 꽃이 핀다. 꽃잎 5장이 모여 둥그런 모양을 이루는 꽃은 꽃자루가 거의 없어 가지에 바로 붙어 있다. 열매는 과육으로 둘러싸고 가운데에 단단한 씨가 들어 있으며, 모양이 둥글고 짧은 털로 덮여 있다. 처음 열릴 때는 초록빛이나 익으면서 노랗게 되고 신맛이 난다.
매화나무와 살구나무는 구별이 쉽지 않다.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규칙적이고 익은 열매의 과육이 씨와 잘 분리되지 않는 것이 매실나무이다. 반면에 불규칙한 낮은 톱니가 있으며 잎이 나올 때는 흔히 엽병이 붉고, 과육이 씨와 쉽게 분리되는 것이 살구나무이다.
65. 산수유
봄을 알리는 전령은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잎과 꽃망울에서 바로 달려온다. 2월의 중순을 넘기면서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파르스름하게 변하여 갈 즈음, 양지 바른 정원의 산수유는 벌써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른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닌 산수유다. 물론 산수유보다 먼저 꽃피는 매화의 일부 품종도 있으나 채 2월도 들어가기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므로 오히려 겨울 꽃에 가깝기 때문이다.
잎이 나오기 전, 메마른 갈색 가지에 손톱크기 남짓한 작은 꽃들이 20~30개씩 모여 조그만 우산모양을 만들면서 나뭇가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집어쓴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심고 있으며 수십 그루 또는 수백 그루가 한데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모습은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의 가장 아름다움 중의 하나다. 지리산 상위마을, 경북 의성의 사곡마을, 경기 이천의 백사마을 등은 산수유가 집단으로 심겨진 대표적인 곳이다.
꽃이 지고 주위의 짙푸름에 숨어버린 산수유를 잠시 잊어버릴 즈음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갸름한 오이씨처럼 생긴 예쁜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한다. 초록색으로 출발하여 만지면 금세 터져 버릴 것 같은 해 맑은 선홍색으로 익는다.
산수유는 꽃과 열매가 모양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고 한약제로서의 쓰임새가 너무 넓다. 동의보감에 ‘산수유 열매는 정력을 보강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뼈를 보호해 주고 허리와 무릎을 덮어준다. 또 오줌이 잦는 것을 낫게 한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산수유가 빠져서는 안 될 탕약제의 종류만도 십 여 가지가 넘는다.
삼국유사의 제2권 기이(紀異)에 실려 있는 신라 48대 경문왕(861~875)에 대한 설화를 보면 당나귀를 가진 임금 이야기가 있다. ‘경문왕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와 같아지니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모자를 만드는 장인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그 뒤에는 다만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이 났다’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매가 줄줄이 땅을 향하여 매달려 있는 모양은 유별나게 귓밥이 긴 사람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며 벌써 약제로 쓰기 위하여 심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중국 원산의 산수유가 우리의 문헌에 나오는 최초의 기록이다. 아마 이보다는 훨씬 이전에 가져왔을 터이니, 줄잡아도 1천2백년 이전에 우리 땅에 시집온 셈이다.
키가 6~7m정도 자라고 가지가 펴져 전체적으로 나무는 역삼각형의 모양을 만든다. 줄기의 껍질이 암갈색으로 비늘처럼 조금씩 벗겨져서 약간 지저분해 보인다. 약용식물로 심어 왔었으나 요즈음은 조경용으로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잎은 마주나고 끝이 점점 뾰족해 지는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4~7쌍의 잎맥이 활처럼 휘어져 있고 뒷면 잎맥사이에는 갈색 털이 촘촘하다.
산수유 꽃으로 찾아온 봄의 향취가 익어갈 즈음, 이보다는 조금 늦게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로 얽혀있는 숲 속에는 꽃 모양이 산수유와 너무나 비슷한 생강나무가 역시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다. 간단하게 인가근처에 심고 있는 것은 산수유, 숲 속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은 생강나무로 보아도 좋다.
66. 고로쇠나무
봄날의 등산길에 새하얀 플라스틱 파이프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는 이상한 나무와 심심찮게 만난다. 고로쇠나무에서 물을 뽑아내기 위한 수액(樹液)채취 장치다. 2월 중순 거제도에서 시작하여 4월초 휴전선 지방에 이르기 까지 이 땅의 고로쇠나무는 물 뽑기로 몸살을 앓는다.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고,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아름드리로도 자란다. 잎은 물갈퀴가 달린 개구리의 발처럼 5-7개로 크게 갈라지고 5월에 연한 황록색으로 피우고 나면, 마치 프로펠러 같은 날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열매다. 잎이나 열매 모양으로 단박 단풍나무의 사촌임을 알 수 있다.
나무나라의 평범한 고로쇠나무가 최근에 들어 수난을 당하 데는 그가 갖고 있는 ‘물’ 때문이다. 봄이 오면 나무들은 가지나 줄기의 꼭지에 있는 겨울눈이 봄기운을 먼저 알아차린다. 땅속 깊숙이 있어서 언제 봄이 오는 지를 잘 모르는 뿌리에 옥신(auxin)이라는 전령을 파견한다.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잎과 줄기로 올려 보낼 것을 재촉한다. 나무 종류 따라 전령의 활동시기가 다른데, 고로쇠나무는 유난히 일찍 설칠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영양분이 녹아있어서 수난이 시작되었다.
사실 나무마다 양의 차이는 있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나무는 없다. 그러나 고로쇠나무가 고난의 삶을 이어가게 된 데는 확인되는 않은 전설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왕건의 고려 건국에 많은 도움을 준 도선국사(827-898)는 오랫동안 좌선을 하고 드디어 도를 깨우쳐 일어나려는 순간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엉겁결에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다시 일어나려 하자 이번에는 가지가 찢어지면서 국사는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허망하게 앉아 위를 올려다보니 방금 찢어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맺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다. 마침 갈증을 느낀 터라 목을 축이기 시작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시고 일어났더니 무릎이 쭉 펴지는 것이었다. 이후 이 나무가 뼈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 하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부르기 쉬운 고로쇠가 되었다고 한다.
우수경칩에서 늦게는 춘분을 지나서까지, 나무줄기에다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꽂아 샘처럼 쏟아지는 물을 받아 마신다. 조금은 섬뜩하지만 이것은 바로 나무의 피다. 나무 굵기에 따라 다르나 한 계절 동안 한두 말(斗), 많게는 너 댓 말이나 강제 채혈을 당한다. 이런 일이 해마다 반복되니 온전할 리가 없다. 과도하게 채혈을 당한 나무는 6월의 따사로운 햇빛에도 짙푸름을 자랑하는 주위 나무들과 달리 놀놀한 잎사귀 몇 개를 달고 버티는 경우가 있어서 쳐다보기가 애처롭다.
고로쇠 물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산도(PH)가 중성에 해당되는 5.5~6.7 범위에 있고 단맛을 내는 성분으로 자당, 과당, 포도당이 들어있다. 무기성분으로 칼슘과 마그네슘을 비롯한 미네랄이 들어있는 정도이다. 이런 성분이야 우리가 먹은 과일에도 흔히 들어있는 수준이다. 일단 세포막이라는 고도의 정수 장치를 통과한 산속 나무에서 나오는 고로쇠 물이 평범한 상식으로 생각해도 건강에 나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특정 병을 고치는 약리작용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약간 달큼한 천연 식물성 건강음료일 뿐이다. 과도한 채취로 이 땅의 고로쇠나무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안타까움을 더한다. 비슷한 처지의 나무들로는 자작나무, 거제수나무, 다래나무 등이 있다. 차츰 ‘물 빼먹는 나무’가 더 많아 지는 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걱정거리다.
67. 능수버들
봄의 내음이 대지를 적실 때면 우리 강산 여기저기에 자라는 버들가지에도 살짝 묻어 있다.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늘어진 버들가지는 이리 저리 산들바람에 실려 몸을 비튼다. 관심을 끌려는 독특한 몸짓으로 보인다. 부드러움과 연약함에 사람들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킨다. 가냘픈 여인을 상상해서다. 자연스레 버들과 여인의 신체특징을 비교한 여러 말이 생겼다.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유요(柳腰), 예쁜 눈썹을 유미(柳眉), 빼어난 자태를 유태(柳態)라는 것이 대표적 예다. 이렇게 가지가 아래로 운치 있게 늘어지는 큰 버드나무에는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이 있다. 봄에 새가지가 나올 때 적갈색인 것은 수양버들, 황록색인 것은 능수버들이다. 그러나 두 나무는 너무 비슷하여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구분이 어렵다. 능수버들은 경기민요 가락에 나오는 흥타령 천안삼거리를 연상하게 만든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제멋에 겨워서 흥/축 늘어졌구나 흥...'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능수버들의 모양새를 짐작하고도 남으며 어깨를 들먹일 춤판이 금세 벌어질 것 같은 감흥에 사로잡힌다.
천안시 삼룡동에 있는 '천안삼거리'는 능수버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한 홀아비가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 가게 되었다. 그는 천안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그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딸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면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어린 딸은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으며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행실이 얌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었고 서울로 간 그는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가 되었다. 박 어사는 임지로 내려가다가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였다. 마침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도 살아서 돌아와 능소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의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보면 지금의 창경궁 영춘문 앞 도로 건너편과 종묘 쪽 궁내에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이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옆에는 지금도 능수버들이 자라고 있으며 조선의 궁궐 여기저기에 많은 능수버들이 심겨졌던 것으로 보
인다.
서양의 활쏘기 명인이라면 윌리엄 텔이고 우리나라의 명궁이라면 태조 이성계를 꼽는다. 그 탓에 조선왕조 때는 임금이 참가한 활쏘기가 흔히 있었으며, 최고의 명궁은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엄지손가락 너비만한 능수버들 잎을 활로 맞힌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많은 버들잎 중에 어느 잎이 맞았는지 찾아내는 방법도 없다. 아마 그 만큼 정확해야 한다는 상징의 의미였을 것이다.
비슷한 나무에는 수양버들 외에 용버들이 있다. 용모양의 버들이란 의미인데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이나 어린 가지는 물론 상당히 굵은 가지까지도 용이 승천하는 그림처럼 꾸불꾸불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68. 삼지닥나무
멀리 남녘땅부터 봄을 알려주는 꽃들이 겨울을 털고 지지 개를 켠다. 근래 외국에서 들어온 풍년화와 영춘화가 2월초나 중순이면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하고, 정원의 매화도 뒤질세라 곧 바로 꽃망울을 터트린다. 이어서 실개천의 갯버들 꽃은 얼음 녹은 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삼지닥나무는 이를 즈음, 대체로 3월초에 진한 노랑꽃으로 봄내음을 전하는 선두주자 대열에 참여한다. 잎이 나오기 전, 회갈색 빛이 강한 껍질을 가진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꽃받침 통이 가늘고 긴 작디작은 깔때기 모양을 하며, 겉은 연한 잿빛 털로 덮이고 수십 개씩 둥글게 모여서 아래로 처진다. 거의 손가락 마디 길이만한 꽃은 끝이 넷으로 갈라져 꽃잎처럼 되며, 포동포동 살이 찐 느낌이 들고 안쪽이 샛노랗다. 노랑꽃과 연한 잿빛의 털북숭이 꽃받침 통은 다른 어떤 꽃보다 어울림이 좋다. 이런 꽃들은 고사리 손 주먹만 한 모음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나무크기에 따라 수십 수백 개씩 매달린다. 꽃모양을 실제 접하지 못한 독자들도 상상만으로도 앙증맞고 예쁠 것이라는 짐작에 어려움이 없다.
키 1~2m 남짓의 자그마한 이 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으로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 온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 직접 들어왔다는 자료는 없으며, 근세에 일본에서 가져와 남해안에 심은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이 나무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경남 하동의 쌍계사, 양산 통도사, 전남 고흥의 금탑사를 비롯한 주로 남부지방 사찰에서다. 나무의 이름은 가지가 셋으로 갈라진다는 뜻의 삼지(三枝)에다 닥나무처럼 쓰인다고 하여 삼지닥나무다. 실제로 가지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셋 갈림에다 가지 뻗음은 수직축에 대하여 40~50도로 벌어진다. 이 벌림 각은 자라면서 차츰차츰 커져 나중에는 거의 수평상태가 되거나 수평보다 아래로 더 처지기도 한다. 따라서 전체 모양은 나뭇가지가 땅과 거의 닿으면서 자연적으로 밑변이 넓은 둥그스름한 형태가 된다.
잎은 진한 초록빛이며 약간 두껍고 뒷면은 짧은 흰 털 때문에 하얗게 보인다. 잎 모양은 피뢰침처럼 생겼고, 손가락 하나 길이에서 두 배 길이쯤 된다. 열매는 팥알크기의 타원형으로서 전문용어로 수과(瘦果)라고 하며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익는다.
오늘날의 삼지닥나무는 독특한 가지 뻗음과 봄을 알리는 샛노란 꽃을 감상하는 정원수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이 나무의 원래 쓰임은 고운 차림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의 눈을 홀리는 ‘기생나무’가 아니다. 문화생활을 지탱할 막중한 업무가 부과된 자원식물이다. 종이 만드는 원자재로서, 널리 알려진 닥나무보다 더 고급 종이에 쓰이는 귀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 딱히 삼지닥나무로 볼 수 있는 제지(製紙)기록이 없지만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부터 삼지닥나무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자기네들의 옛 고급 일본종이(和紙)에 닥나무와 함께 쓰이다가, 현대식 지폐를 만들 때는 삼지닥나무의 껍질로 만든 펄프가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물론 지금이야 지폐를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다른 펄프 들이 많으므로 쓰임이 차츰 줄어들고 있지만, 한 때는 일본조폐공사에서 계약재배를 할 만큼 귀중한 원료였다. 삼지닥나무 껍질 속에는 단단하고 질긴 인피섬유가 사관(篩管)이라는 양분이동 통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인피섬유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질김은 닥나무를 능가하므로 고급종이의 원료가 되었다.
삼지닥나무란 우리 이름은 일본에서 들어올 때 3갈래란 뜻의 미쯔마타(ミツマタ) 혹은 삼지목(三枝木) 등 일본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름은 결향(結香)이며, 때로는 4촌 나무인 서향에 빗대어 황서향(黃瑞香)이라고 할 경우도 있다. 학명 ‘Edgeworthia papyrifera’에서 종명에는 ‘종이’란 뜻이 들어있어서 꾸지나무 및 백자작나무의 학명에서처럼 종이 만들기에 쓰이는 나무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삼지닥나무의 꽃은 약제이다. 꽃봉오리는 몽화(夢花)라고 하여 눈병에 쓰이고, 뿌리는 몽화근(夢花根)이라고 하여 조루 등을 치료에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69. 개나리
‘나리 나리 개나리 잎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부터 봄을 알리는 색깔은 노랑 빛으로 새겨져 있다. 봄날이 짙어가면서 정원의 산수유, 산 속의 생강나무, 길가의 개나리에서 노랑나비, 노랑병아리 등에 이르기까지 노랑 빛의 느낌은 새 생명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희망 바로 그것이다. 봄 알림이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꽃이 바로 개나리다. 매난국죽처럼 이 땅의 선비가 좋아하여 여기저기 시가의 소재가 된 고고한 기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인가 근처라면 아무 곳이나 누가 일부러 꼭 챙겨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흔하디 흔한 서민의 나무다. 벚꽃으로 떠들썩하게 봄소식을 전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옛 봄은 개나리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을 상륙하고 산 따라 길 따라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까지 온 나라를 노랗게 물들여 놓은 것으로 시작하였다.
개나리꽃은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앙증맞게 생긴 노란 꽃에 불과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꽃이 무리 지어 필 때 아름다움을 더한다. 개나리의 학명(學名) 'Forsythia koreana'에는 우리나라가 자람터라는 것을 나타낸 자랑스러운 우리의 토종 꽃나무이다. 말나리, 하늘나리, 솔나리, 참나리 등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에 '나리'란 이름이 들어간 종류가 많다. 이들은 모두 개나리와 꽃 모양새가 아주 닮아 있다. 나리 앞에 '개'자만 하나 붙이면 개나리도 아름다운 나리꽃에 못지않다 하여 개나리가 된 것으로 필자는 짐작하고 있다.
꽃이 져 버린 개나리는 맑은 날의 우산 마냥 쓰임새가 없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가을에 달리는 볼품없는 열매가 귀중한 한약제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개나리의 열매는 연교(連翹)라고 하는데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보면 세종5년(1423) 일본사신이 연교 2근을 올린 적이 있고, 선조33년(1599)에는 임금이 앓자 홍진이란 의사는 청심환에다가 연교를 넣어 다섯 번 복용하시도록 처방하였으며 정조 18년(1793)에는 내의원에서 연교를 넣은 음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 처럼 한때 임금님의 건강을 지키는 약제로 쓰였으니 제법 대접을 받는 시절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 개나리 열매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암수 딴 그루이고 번식은 주로 꺾꽂이로 대를 이어 오는 사이에 한쪽 성(性)만 심겨지게 된 탓으로 짐작한다. 구태여 힘들게 종자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해석도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이 떨어지는 작은 나무이다. 크게 자라도 사람 키를 조금 넘을 정도가 고작이고 땅에서 많은 줄기가 올라와 한 포기를 이룬다. 울타리로 심으면 아래로 늘어지는 가지가 꽃이 진 다음에도 멋스런 운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나 차츰 회갈색으로 된다. 자세히 보면 작은 점 같은 숨구멍이 뚜렷하게 보인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긴 타원형으로 위 부분에 톱니가 있거나 때로는 밋밋하다. 꽃은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잎겨드랑이에 1~3개씩 핀다. 열매는 달걀모양이며 편평하고 가을에 갈색으로 익으며 날개가 있다. 만리화, 장수만리화, 산개나리, 의성개나리 등 개나리와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형제나무가 몇 있다.
개나리와 가까운 집안에는 세계적으로 한 종류 밖에 없으며 우리나라의 충북, 전북의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미선나무가 있다. 열매가 마치 부채를 펴 논 것처럼 아름다운 모양이므로 미선(美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른 봄 개나리처럼 잎보다 먼저 피고 흰빛 또는 분홍색으로 피며 은은한 향기가 있다.
70. 목련(백목련)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서정시인 박목월의 ‘4월의 노래’이다. 눈부시게 새하얀 목련꽃 아래서 연애소설의 백미, J.W.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은 순수함이 정겹다.
목련은 겨울을 나는 모습부터 아주 특별나다. 가지 끝마다 손가락 마디만 한 꽃눈이 회갈색의 부드러운 털로 두껍게 덮여 있다. 겨울 동안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에는 안성맞춤의 구조다. 두툼한 외투로 감싸고 있지만 봄을 느끼는 춘감대(春感帶)는 예민하다. 따스한 바람이 대지를 몇 번 훑어내면 금세 웃옷을 훌훌 벗어던져 버린다. 속살을 드러내어 피는 주먹만 한 꽃은, 6개의 꽃잎 하나하나가 하얗다 못해 백옥을 보는 듯 눈이 부시다. 작고 자질구레한 꽃을 잔뜩 피우는 보통 꽃과는 품위가 다르다. 가지의 꼭대기에 1개씩 커다란 꽃을 피우는 고고함으로나 순백의 색깔로나 높은 품격이 돋보이는 꽃이다. 향기 또한 은은하여 이래저래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목련(木蓮)은 연꽃처럼 생긴 아름다운 꽃이 나무에 달린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목련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김수로왕 7년(서기48) 신하들이 장가 들 것을 권했지만, '하늘의 뜻이 있을 곧 것이다'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가서 그들을 맞아 들였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아리따운 공주는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으로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꽃이 아니라 나무로서도 쓰임새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지봉유설의 목(木)부를 보면, 선암사에 북향화(北向花)라는 나무가 있는데, 꽃은 북쪽을 향하여 핀다고 했다. 북향화란 앞뒤 설명으로 미루어 목련을 말함이다. 목련꽃은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겨울 꽃눈의 끝이 대체로 북쪽을 향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통계적인 유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니 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동의보감에는 목련꽃을 신이(辛夷)라 하여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내어 약재로 사용하였다. '얼굴의 죽은 깨를 없애고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얼굴의 부기를 내리게 하고 치통을 멎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이다.
목련은 잎이 변한 심피(心皮)가 여럿이므로 흔히 원시피자식물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억4천만 년 전, 넓은잎나무들이 지구상에 첫 모습을 보이기 시작할 때 나타났으니 원시란 접두어가 붙을 만하다. 가을에 굵은 콩알 굵기의 붉은 열매가 수십 개씩 모여 달리는데, 익어서 떨어질 때는 명주실 같은 종사(種絲)라는 실과 연결되어 있다. 오랫동안 매달려 있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 때 비로소 떨어진다. 이를 두고 센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목련 선조들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목련이라고 하지만 백목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라산에 자라는 진짜 우리나라 토종 목련은 잘 심지 않고, 중국원산인 백목련이 오히려 더 널리 보급된 탓이다. 목련은 꽃잎이 좁고, 완전히 젖혀져서 활짝 핀다. 반면에 백목련은 꽃잎이 넓고 다 피어도 반쯤 벌어진 상태이다. 사실은 꽃받침이 꽃잎처럼 변하여 활짝 피지 못하도록 훼방은 놓으니 더 벌어질 수도 없다. 이외에도 보라색 꽃의 자목련, 꽃잎이 열 개가 넘는 별목련이 있으며, 5월말쯤 숲 속에서 잎이 나고 난 다음에 꽃이 피는 함박꽃나무(산목련)도 역시 목련의 가까운 형제나무다. 북한에서는 함박꽃나무를 목란(木蘭)이라 하여 국화로 지정하여 극진히 대접한다.
71. 살구나무
행화촌이란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은 ‘청명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길가는 행인 너무 힘들어/목동을 붙잡고 술집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더니/손들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라고 읊조렸다. 이후 행화촌(杏花村)은 술집을 보다 점잖게 부르는 말이 되었다. 또 오나라에는 명의로 이름 난 동봉(董奉)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돈을 받는 대신 앞뜰에다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오래지 않아 동봉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 숲 주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 혹은 그냥 행림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는 살구열매가 익으면 내다 팔아서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썼다. 이후 사람들은 ‘행림’이라면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나타내는 말로 대신한 것이다.
이처럼 살구나무는 중국을 고향 땅으로 삼은 수입나무다. 처음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역사기록에 흔히 등장한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를 보아 이상 기후인지 정상인지를 판단하였고 철따라 종묘제사에 올리는 제물(祭物)로서 살구는 빠뜨릴 수 없는 과일이었다. 우리 땅에도 살구나무와 아주 닮은 나무가 있다. 중부이북에 주로 자라며 줄기에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하는 개살구나무다. 열매는 좀 작고 떫은맛이 강하여 먹기가 거북살스런 탓에 들어온 살구나무가 주인이 되고 우리 살구나무는 앞에 ‘개’가 붙어 버렸다. 맛 좋고 굵기도 더 큰 중국산 살구에 밀린 셈이다. 결국 우리의 개살구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처럼 볼품만 있고 실속이 별로 일 때 쓰는 말에나 등장한다. 깊은 산에서나 만나는 토종 개살구에게도 조그만 관심이라도 가져 주었으면 싶다.
살구나무는 비록 중국나무지만 고향을 떠난 지가 하도 오래되어 벌써부터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다. 서민의 생활상을 그린 옛 민화를 보면, 오막살이 뒷녘에는 흔히 살구나무가 한 그루가 연분홍 꽃을 매달고 있다. 매화가 양반들의 멋을 나타내는 귀족 꽃나무라면 살구는 질박하게 살아온 서민들과 함께한 나무다. 일부러 살구나무를 심은 뜻은 꽃으로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배고픔이 한 창일 초여름에 먹음직스런 열매를 잔뜩 매달아 주는 고마운 나무이면서 먹고 난 씨앗은 바로 약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행인(杏仁)이라 불리는 살구씨는 사실 만병통치약이었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알을 따내 씨를 발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의 풍을 모두 몰아내며 눈을 밝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2백여 가지의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방법이 알려져 있을 정도다.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있는가 하면,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도 한다. 최근 분석해본 살구열매 육질의 성분은 비타민 A가 풍부하고 신진대사를 도와주는 구연산과 사과산이 2~3%나 된다. 이런 성분들은 특히 여름철 체력이 떨어질 때 크게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살구나무는 꽃과 과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몸체의 쓰임도 요긴하다. 골 깊은 산사에서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으로 울려 퍼지는 맑고 은은한 소리는 찌던 세상 번뇌를 모두 잊게 한다. 바로 살구나무에서 얻어지는 소리다. 몇 가지 나무가 알려져 있지만 목탁은 역시 살구나무 고목이라야 제대로 된 소리를 얻을 수 있다한다. 맑고 매끄러운 흰 속살에다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재질을 가진 탓이리라. 살구나무는 굵기 한 뼘 남짓 자람이 고작이다. 꽃은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잎보다 먼저 연분홍색으로 피우면서 한해를 시작한다. 이어서 동그스름한 잎을 펼치고 초여름에 들면서 다른 과일보다 훨씬 먼저 붉음이 살짝 들어간 노랑 색 열매를 매단다. 일찍 자식농사 끝내버렸으니 이듬해까지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살구나무와 매실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가까운 사이다. 아주 비슷하게 생긴데다 틔기까지 있으니 명확한 구분이 어려울 때가 많다. 대체로 잎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잔 톱니가 있으며 잎이 나올 때는 흔히 잎자루가 붉고 육질이 씨와 쉽게 분리되는 것이 살구나무다. 반면에 톱니가 규칙적이고 익은 열매의 육질과 씨가 잘 분리되지 않는 것이 매실나무이다.
한자 이름 행(杏)은 원래 살구를 뜻하나 은행도 같은 자를 써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하는데, 그가 죽고 난 한참 뒤에 세우면서 주위에 ‘행‘을 많이 심었으므로 행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 ‘행‘이 살구냐 은행이냐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을 만들 때 은행나무를 주로 심었으며, 나무의 특성으로 보아서는 은행나무가 더 격에 어울린다.
72. 느릅나무
우리의 자연을 아름답게 풀어 쓴 서정시인 박목월의 시에 청노루가 있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따사로운 4월의 봄 햇살이 조용히 내려 비추는 낡은 절집은 정적이 감돈다. 처마자락으로 건너다보이는 느릅나무의 회색 가지에는 청노루 맑은 눈에 구름이 걸리듯 연초록 입새로 봄이 찾아온다. 느릅나무는 이 처럼 깊은 산골에서 동네 개구쟁이들의 등살에 반질반질 닳아버린 야산 자락까지 어디에나 자랐던 우리 나무다.
그래서 느릅나무는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여러 쓰임에 가까이 있었다. 관리들의 집짓기나무가 되기도 하고 껍질을 벗겨 허기진 백성들에게 배고픔을 달래 주었고, 때로는 약제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옥사(屋舍)에는 집짓기 나무로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를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천에 빠졌던 그 다리의 이름도 유교(楡橋), 느릅나무 다리란 뜻이다. 몇 년 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바로 그 다리로 짐작되는 나무다리를 남천에서 발굴했다. 재질을 알아보았더니 실망스럽게도 참나무였다. 아마 다리 옆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유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느릅나무는 elm이란 이름으로 서양에서도 널리 쓰이며 북구라파의 신화에 등장할 정도이다.
나무껍질은 유백피(楡白皮)라 하여 약제일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속껍질처럼 예부터 흉년 에 허기를 달래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뿌리껍질(楡根皮) 역시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낫게 한다'고 동의보감에 소개 되어 있다. 안 껍질을 절구에 넣고 빻으면 끈적끈적한 풀처럼 된다. 느릅나무란 이름은 무르고 느른해 진다는 뜻의 느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느름’이 배고픔을 채워주었다. 삼국사기 온달 장군 이야기에는 평강공주가 온달을 만나는 장면을 상세히 적고 있다. 공주가 혼자 온달의 집까지 찾아가서 시집을 가겠다고 자청한다. 눈먼 온달의 노모는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느름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지 오래입니다" 라고 거절한다. 마침 산에서 느릅나무 껍질을 한 짐 가득지고 내려오는 온달과 공주가 마주쳤다. 공주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온달은 "이는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온달의 초가집 사립문 밖에서 천막농성을 하여 이튿날 겨우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혹시 온달을 부러워한다면 어서 꿈을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평생 공주에게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겠는가?.
느릅나무 종류는 잎의 밑 부분이 좌우 비대칭인 것이 특징이다. 종류가 많지만 우리 주변에는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가 대부분이다. 나무껍질이 오래되면 흑갈색으로 세로로 깊이 갈라지며 잎이 크고 겹 톱니가 있는 것이 느릅나무, 나무껍질이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두꺼운 비늘처럼 떨어져 나오며 잎이 작고 단순 톱니가 있는 것이 참느릅나무다. 열매는 백 원짜리 동전크기이고 종이처럼 얇다. 한 가운데 납작한 종자가 들어 있어서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되어 있다. 모양이 동전과 비슷하여 옛날에는 동전을 유전(楡錢) 혹은 유협전(楡莢錢)이라고도 하였다.
73. 생강나무
온통 잿빛의 삭막한 겨울 숲도 들판에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긴 겨우살이를 털고 새봄 맞을 준비를 한다. 인간세계에 선각자가 있듯이 나무나라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생강나무라는 초능력나무가 있다. 예민한 ‘온도감지센스’를 꽃눈에 갖추고 있어서다. 다른 나무 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날 꿈도 안 꾸는 이른 봄, 샛노란 꽃으로 새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우리나라 숲속, 자연 상태로 자라는 나무 중에서는 제일 꽃망울을 먼저 터뜨리는 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가느다란 잿빛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꽃들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점점이 박혀있는 화사한 꽃 모양은 ‘봄의 전령’이라는 그의 품위유지에 부족함이 없다.
생강나무는 지름이 한 뼘에 이를 정도로 제법 큰 나무로 자라기도 하지만, 우리가 산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는 팔목 굵기에 사람 키를 약간 넘기는 정도의 자그마한 크기가 대부분이다. 인가 근처의 야산에서는 2월말쯤에, 좀 깊은 산에는 3월에서 4월에 걸쳐 꽃피운다. 한번 시작한 꽃은 거의 한 달에 걸쳐 피어있으므로 나중에는 진달래와 섞여 숲의 봄날을 달궈 가는데도 한몫을 한다.
꽃이 지고 돋아나는 연한 새싹은 또 다른 귀한 쓰임새가 있다.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 추운 지방에서는 차의 대용으로 사랑받았다. 차(茶)문화가 사치스런 서민들은 향긋한 생강냄새가 일품인 산나물로서 즐겨왔다. 이후 생강나무는 주위 동료나무들과 어울려 ‘초록은 동색’이 된다. 까맣게 잊어버린 생강나무는 가을 단풍철이 오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눈길을 끈다. 봄의 노랑꽃 영광이 아쉬운 듯, 셋으로 갈아진 커다란 잎이 노란 단풍으로 물든다. 맑은 가을하늘과 어울림이 일품인 생강나무 단풍을 보면 붉은 단풍만이 아름다운 단풍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잎이 떨어진 가지에는 콩알 굵기의 새까만 열매가 눈에 띈다. 처음에 초록빛이나 노랑, 분홍을 거쳐 나중에는 검은 빛으로 익는다. 이 열매에서 기름을 짠다. 옛 멋쟁이 여인들의 머릿결을 다듬던 머릿기름이었고 아울러서 밤을 밝히는 등잔불을 켜기도 한다. 남쪽에서 만 나는 진짜 동백기름은 양반네 귀부인들의 전유물이고 서민의 아낙들은 주위에서 흔히 자라는 생강나무 기름을 애용하였다. 그래서 머릿기름의 대명사 ‘동백기름’을 짤 수 있는 나무라고 하여, 강원도지방에서는 아예 동백나무(동박나무)라고도 한다. 춘천 태생 개화기 소설가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은 사실 생강나무 꽃이 맞다.
생강나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미료로 쓰는 생강과 관련이 깊다. 나뭇잎을 비비거나 가지를 꺾으면 은은한 생강냄새가 난다. 식물이 향기를 만들어 내는 일은 정유(精油)라고 하여 여러 가지 화합물을 가지고 있는 성분 때문, 생강나무의 경우 잎에 정유가 가장 많고 다음이 어린 줄기이며 꽃에는 정유가 거의 없다고 한다. 생강과 생강나무의 정유 성분을 보다 세밀히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둘 다 β-eudesmol과 phellandrene이라는 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기에, 자라는 곳도 생김새도 전혀 다른 둘이 같은 성분을 갖게 되었을까? 어쨌든 이들 때문에 우리는 생강나무에서 생강냄새를 맡을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음식물을 잠시 저장할 때 개미나 파리가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생강나무 어린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걸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흥미롭다. 그 외 생강나무는 민간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산후조리, 배 아플 때, 가래를 없애는 데에도 가지를 달여 마시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속의 생강나무보다 조금 앞서서, 마을 부근의 빈터나 밭둑에는 얼핏 보아 생강나무 꽃과 너무 닮은 노란 꽃을 피우는 또 다른 봄나무, 열매를 한약제로 쓰는 중국원산의 산수유와도 흔히 만난다. 잎이 피고 나면 두 나무의 차이는 너무 뚜렷하나, 꽃만 보아서는 조금 혼란스럽다.
꽃이 피어 있을 때 구별하는 방법은 이렇다. 두 나무 다 여러 개의 작은 꽃이 모여 핀다. 산수유는 꽃대가 길고 꽃잎과 꽃받침이 합쳐진 화피(花被)가 6장이며, 생강나무는 꽃대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짧고 꽃잎도 4장이다. 그래서 산수유는 작은 꽃 하나하나가 좀 여유 있는 공간을 가지고, 생강나무는 조밀하게 모여 달리는 느낌이다. 대체로 인가 가까운 곳에 일부러 심은 것은 산수유, 숲 속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은 생강나무로 보면 된다.
74. 벚나무
벚나무는 커다란 나무에 잎도 나오기 전, 화사한 꽃이 구름처럼 나무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피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여 일주일 정도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이다. 동백이나 무궁화처럼 통째로 꽃이 떨어져 나무 밑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벚꽃은 5개의 작은 꽃잎이 한 장씩 떨어져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라 가 버린다. 그래서 벚꽃이 떨어지는 모양은 산화(散花)란 말이 어울리고 비슷한 어감의 산화(散華)는 꽃다운 나이에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와 비유한다. 무리지어 피는 꽃의 화려함과 한꺼번에 깨끗이 져 버리는 모습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벚꽃의 느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이 사는 곳은 벚나무로 치장하였다. 더욱이 우리의 전통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꽃구경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벚나무로 상징되는 일본에 의하여 저질러진 치욕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지울 수 없다.
벚꽃이 피는 나무에는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많기도 하다. 이들 서로의 차이점이란 암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의 길이가 기냐 짧으냐 등이 고작이어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벚나무 심기의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제주도 자생의 왕벚나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사실 왕벚나무가 제주도에 자생한다는 것은 식물학적인 의미는 클지 몰라도 우리 문화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왕벚나무를 심었으니 일본의 벚나무와는 다르다는 논리는 받아 드리기 어렵다. 벚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벚나무 심기를 위한 구차한 논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온 나라의 길마다 벚나무로 뒤덮어 버린 지금, 벚나무심기를 시비 걸 수 있는 시기는 벌써 지났다. 다만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를 비롯한 항일 관련 문화재 근처만이라도 벚나무가 피해졌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바람에 약하고 단풍이 질 때 지저분하며 오래 살지도 못하고 1년에 겨우 10여일의 꽃 세상을 보기 위하여 일본으로 대표되는 벚꽃 심기에 열을 올린다.
우리 문화 속에는 한 번도 벚꽃이 꽃의 아름다움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 옛 문헌에 보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화(樺)자를 쓸 만큼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 꽃보다는 껍질의 이용이 더 중요하였다. 벚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이었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게 하였다.
벚나무는 껍질의 쓰임새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옛 목판(木板)인쇄의 재료로서 배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나무이었다.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벚나무 종류들은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몽골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한 나무씩 베어 가까운 강을 타고 경판(經板) 만드는 곳으로 운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75. 진달래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1922년 김소월이 <개벽>에 발표한 진달래꽃이란 시다. 삶을 느릿하게 살아도 별 탈 없던 낭만시대의 청소년들은 이 시를 읽고 가슴 깊숙이 사랑의 참의미를 가슴에 새겨 보기도 하였다. 오늘날 북한의 영변 약산은 소월이 아름다운 시상을 얻던 시 속의 고향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핵 시설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지게 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진달래 꽃, 식목일을 지나면서 산 넘어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완연히 느낄 즈음에 피기 시작한다. 동네의 앞산은 물론 높은 산의 꼭대기 까지 온 산을 물들이는 꽃이다. 붉은 빛깔이 조금 더 강한 분홍색의 꽃은 잎보다 먼저 가지마다 무리 지어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그래서 소월의 시처럼 예로부터 사랑을 노래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이다. 진달래는 한때 북한의 국화로 알려져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꽃 빛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좋아했으며 과거 항일 빨치산활동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알려진 바로는 목란(木蘭)이 국화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이 나무의 우리 이름은 함박꽃나무, 흔히 산목련이라고도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진달래란 이름보다 참꽃이 더 친숙하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진달래가 필 즈음이 가장 배고픈 시기다. 주린 아이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먹고 허기를 달래서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붙였다. 식물도감을 찾으면 제주도에 참꽃나무가 있다고 적혀있기도 하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꽃'은 진달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 시절 진달래 꽃잎은 따먹어도 비슷한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철쭉꽃에 독이 있다는 것을 용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다. 중국의 촉나라 망제(望帝)는 죽음의 직전에 이른 벌령이란 사람을 살려서 정승으로 중용하였다가 아예 나라를 빼앗기고 국외로 추방되는 비운을 당한다.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촉나라를 날아다니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그 피가 진달래 가지 위에 떨어져 핀 꽃이 바로 두견화, 우리의 진달래꽃이란 것이다.
음력 3월3일의 삼짇날에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으로 꽃전(花煎)을 붙여먹는 풍습이 있다. 화전이란 찹쌀가루에 꽃잎을 얹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는 비원에서 삼짇날 중전이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 화전을 부쳐 먹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주(淸酒)에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술을 두견주라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려 휴양할 때 17세 된 딸이 꿈에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만든 술이라고 하며 진통, 해열, 류머티즘의 치료약으로 쓰였다.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삼짇날의 절식(節食)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사람 키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자란다. 손목 굵기 정도면 꽤 오래된 나무에 속하고 껍질은 매끄러운 회백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벌어진 깔때기 형이고 가장자리가 5개로 갈라진다. 드물게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라 하여 아주 귀하게 여긴다.
76. 수수꽃다리(라일락)
“4월은 잔인한 달 /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을 욕망과 뒤섞어 놓는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영국 시인 토머스 S 엘리엇의 「황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을 휘감고 있던 정신적인 공황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1922년 의 작품이다. 엘리엇이 노래한 것처럼 언 땅, 춥고 바람 부는 황무지에서도 라일락은 잘 자란다. 원래 우리나라의 라일락은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의 봄꽃이 떨어져 버리고 새 잎이 제 법 자리를 잡아갈 즈음, 연보라나 새하얀 작은 꽃들이 구름처럼 모여 피는 꽃나무이다.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향긋한 라일락 꽃 내음은 온 몸이 나긋나긋해져 녹아내려 버릴 것 같이 매혹적이다. 지금처럼 여러 합성허브에 익숙해지기 전 라일락 향기만큼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꽃도 흔치않다. 그래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에게 친숙한 꽃이고, 바로 그들의 향기다. 영어권에서는 라일락(lilac)이라 부르며 프랑스에서는 리라(lilas)라고 한다. 60년대를 풍미한 가요 「베사메무쵸」는 “…리라 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리라 꽃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로 이어진다. ‘나에게 키스해 주세요’란 뜻으로 전해지 듯 라일락의 꽃향기는 첫사랑의 첫 키스 만큼이나 달콤하고 감미롭다. 꽃말처럼 낭만과 사랑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나무의 순수 우리말 이름이‘수수꽃다리’라 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는 꽃 모양이 옛 잡곡의 하나인 수수 꽃을 너무 닮아 ‘수수 꽃 달리는 나무’가 줄어 수수꽃다리란 멋스런 이름이 붙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수꽃다리와 라일락은 각자의 학명(學名)을 따로 가진 다른 나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수꽃다리인지 아니면 20세기초 수입꽃나무로 들여와 온 나라에 퍼진 라일락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전문가도 어렵다. 사실 라일락은 중국에 자라는 수수꽃다리 종류를 유럽 사람들이 가져다가 개량한 것을 우리가 다시 수입하는 경우도 있으니 크게 다르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수수꽃다리의 고향은 추운 북쪽지방의 석회암지대이나 우리나라 어디에나 옮겨 심어도 까다롭게 굴지 않고 잘 자란다. 다 자라야 키가 4∼5m 정도인 작은 나무이다. 잎은 긴 잎자루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마주보기로 달린다. 두껍고 표면이 약간 반질반질하며 거의 완벽한 하트 모양이다. 원뿔 모양의 꽃차례에 수십 송이씩 꽃이 피어나고 긴 깔때기 모양의 꽃은 꽃부리가 4갈래로 벌어진다. 꽃 색깔은 엷은 보랏빛이 많고 하얀 꽃도 있다.
수수꽃다리를 닮은 나무들이 여럿 있다. 정향나무, 개회나무, 털개회나무, 꽃개회나무 등 이 그것이다. 잎 모양이 조금 길고 꽃 색깔도 약간씩 다르다. 5월의 산에서 흔히 만나는 보라 꽃은 꽃개회나무가 많다. 정향나무는 오래 전부터 향료와 약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향나무에도 두 종류가 있다. 사실은 전혀 다른 두 나무인데 정향(丁香)이라고 한자까지 같이 표기하는 바람에 가끔씩 혼란이 생기는 나무들이다. 향료로 쓰는 정향나무는 늘푸른 나무로서 열대의 몰루카 제도가 원산이며 꽃봉오리가 피기 전에 채취한 후 말려서 향료에 쓴다. 증류(蒸溜)하여 얻어지는 정향유는 화장품이나 약품의 향료 등으로 이용된다. 정향은 식품·약품·방부제를 비롯하여 치과에서 진통제로 쓰이는 등 쓰임새가 넓다. 이 정향나무와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정향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자라는 수수꽃다리와 가까운 혈족 관계에 있는 정향나무이다. 열대의 상록 정향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나무인데 꽃에 향기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게 되었다.
77. 박태기나무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목련, 개나리 등 너무 일찍 꽃 소식을 자랑하던 봄꽃들은 4월 중순에 들어서면 새싹에 밀려나 하나둘 꽃 흔적을 털어버린다. 이어지는 화사한 진달래, 벚꽃, 복사꽃을 거치면서 차츰 지나가는 봄이 아쉬울 즈음에 우리가 또 다시 만나는 진보라 꽃이 있다. 잎도 나오지 않은 가지의 여기저기에 온통 보라 빛 꽃방망이를 뒤집어쓰는 그 나무가 바로 박태기나무다. 꽃의 색깔뿐만 아니라 꽃이 달리는 모습도 독특하다. 대부분의 꽃은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꽃대를 뻗고 화서(花序)라는 이름의 꽃차례를 지키면서 매달린다. 그러나 박태기 꽃을 매다는 규칙이 없다. 줄기의 아무 곳, 심지어 뿌리목까지 다른 꽃나무들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다 그야말로 전천후 꽃방망이를 매단다. 이런 불규칙함이 박태기나무 꽃의 또 다른 매력이다.
우리나라의 꽃들이 대부분 흰색이거나 연분홍의 맑은 색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박태기나무는 ‘차별화한 색’으로 승부하려는 튀는 꽃이다. 가지 마디마디에 꽃자루 없이 마치 작은 나방처럼 생긴 꽃이 7~8개씩 모여서 나뭇가지 전체를 완전히 덮어버린다. 그래도 꽃에는 독이 있으므로 아름다움에 취하여 꽃잎을 따서 잎 속에 넣으면 안 된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밥알을 밥티기라고 한다. 이 나무의 꽃 봉우리가 달려있는 모양이 마치 밥알, 즉 밥티기와 닮아서 박태기나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필자는 짐작한다. 색깔이 꽃자주색이니 양반들이 먹던 하얀 쌀 밥알이 아니라 조나 수수의 밥알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꽃의 이미지와는 달리 조금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말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국이름은 자형(紫荊)이니‘자주꽃나무’로 이름을 붙였다면 더 어울리고 멋있었을 것 같다. 삼재도회(三才圖會, 1607간행)란 중국 책에는 소방목(蘇方木)이라 하였고 일본인들은 이의 자기네들 식으로 읽어 ‘하나스호’라고 한다.
북한 이름은 구슬꽃나무, 꽃의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활짝 핀 꽃이 아니라 지금 막 피어 날려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순히 나무의 꽃봉오리 하나를 두고도 남한은 밥알, 북한은 구슬을 연상할 만큼이니 앞으로 언젠가 통일의 그 날이 와도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박태기나무와 구슬꽃나무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박태기나무 보다 낭만적인 구슬꽃나무에 점을 찍고 싶다. 본래 우리의 산하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라 아득한 옛 어느 날 중국에서 시집 왔다. 아름다운 꽃방망이를 감상하기 위하여 본 고향에서도 널리 심고 있으며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 퍼져 있는 정원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중부이남의 절에도 흔히 심겨진 것으로 보아 처음 스님들을 통하여 수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리는 낙엽수이고 키 3~4m로 자라는 것이 고작이다. 나무껍질은 매끄럽고 회백색이라서 겨울에 보면 조금은 처량해 보인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잎은 거의 완벽한 하트모양이다. 두껍고 표면은 윤기가 있으며 5개의 큰 잎맥이 발달하고 뒷면은 황록색이다. 열매는 작은 콩깍지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겨울을 넘기고도 달려있다. 콩과의 식물이므로 땅이 척박하여도 가리지 않으며 무리 지어 심어도 서로 싸움질 없이 사이 좋게 잘 자라준다.
껍질과 뿌리는 민간약으로 쓰이며 삶은 물을 마시면 오줌이 잘 나오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중풍, 고혈압을 비롯하여 통경, 대하증 등 주로 부인병에 대한 효과도 있다고 한다.
78. 복숭아나무(복사나무)
동요작가 이원수 선생이 1926년 잡지《어린이》에 발표한 ‘고향의 봄’을 콧노래로 불러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5살 소년의 감성으로 쓴 이 동요는 지금도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담겨있다. 꽃 대궐의 대표 꽃, 분홍 복사꽃으로 뒤덮인 복사 밭은 자연스레 옛 사람들의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중국의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골짜기의 흐름을 타고 가다가 길을 잃고 복사꽃이 만발한 숲 속의 동굴을 지나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고 먹을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 있는 유토피아의 참 모습이다. 세종29년(1447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3일 만에 완성하였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역시 이상향의 모델은 복숭아 숲에서 찾고 있다.
하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는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십팔만 년을 살았다한다.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은 먹기만 하여도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천도복숭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자 어느 날 9천년에 한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백 년 동안 바위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이 복숭아이고 복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 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다. 고려 인종원년(1123)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 왔다가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잡스런 귀신들을 쫓아내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 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세종2년(1420) 어머님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산12년(1505)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이었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하는 사당이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사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보면 복사나무는 그야 말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약제이다. 복사나무 잎, 꽃, 열매, 복숭아씨(桃仁), 말린 복숭아, 나무속껍질, 나무진을 비롯하여 심지어 복숭아 털, 복숭아벌레까지 모두 약으로 쓰였다. 으스름달밤에 복숭아를 먹는 것은 약이 된다고 생각한 복숭아벌레를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이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혹시 반 토막 난 벌레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먹기가 정말 끔찍하였을지 모른다. 꽃을 보기 위하여 개량한 복숭아나무에는 꽃잎이 여러 겹으로 된 만첩홍도 및 만첩백도가 있다.
79. 조팝나무
우리는 예부터 흰옷을 즐겨 입고 흰색을 좋아하였다. 태양숭배사상이 강한 우리 민족은 광명을 나타내는 뜻으로 하여 백색을 신성시했다. 일상의 의복은 물론 제사 때 흰옷을 입고 흰 떡·흰 술·흰밥을 쓸 정도이다. 생명의 절정, 우리 고유의 나무 꽃에는 유별나게 흰 꽃이 많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4월말이면 우리의 산자락은 하얀 꽃이 동네잔치를 벌린다. 바로 조팝나무 꽃이다.
조선후기의 고전소설 토끼전에는 별주부가 육지에 올라와서 경치를 처음 둘러보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라고 하였다.
멍청이 별주부가 토끼 꼬임에 빠져 처음 육지로 올라올 때도 마침 봄이었나 보다. 지금도 조팝나무 꽃이 어디거나 흔하게 피어있으니 별주부가 토끼를 꼬여내던 그 시절에는 더 더더욱 흔한 꽃이었을 것이다. 잘 보일 것 같지 않은 별주부의 작은 눈에도 육지에 올라오자 금세 눈에 뜨인 나무다.
왜 조팝나무인가? 한창 꽃이 피어 있을 때는 좁쌀로 지은 조밥을 흩트려 놓은 것 같다하여 ‘조밥나무’로 불리다가 조팝나무로 된 것이다. 늦은 봄 잎이 피기 조금 전이나 잎과 거의 같이, 새하얀 꽃들이 마치 흰 눈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백 수천 개가 무리 지어 핀다.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작은 꽃이 아니련만 무리를 이루므로 좁쌀 밥알에 비유될 만큼 꽃이 작아 보인다. 흰빛이 너무 눈부셔 언뜻 보면 때 늦게까지 남아있는 잔설(殘雪)을 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조팝나무의 원래 쓰임새는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더 이름을 날린다. 조팝나무에는 조팝나무산(酸)이라는 해열 진통제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버드나무의 아세틸살리실산(acetyl salicylic acid)과 함께 진통제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aspirin)이란 이름은 아세틸살리실산의‘a'와 조팝나무의 속명(屬名) spiraea에서 ’spir'를 땄고 나머지는 당시 바이엘사가 자기회사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썼던 'in'을 붙여서 만들었다.
예부터 조팝나무의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근(蜀漆根)이라 하였는데, 동의보감에는 ‘맛은 쓰며 맵고 독이 있다. 여러 가지 학질을 낫게 하고 가래침을 토하게 하며 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낫게 한다’하였다. 또 조팝나무의 새싹은 촉칠(蜀漆)이라 하여 여러 증상의 학질을 고치는 데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5년(1423) 일본사신이 와서 상산 5근과 3근을 두 번에 걸쳐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서 궁중에서도 쓰이는 귀중한 한약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이다. 조팝나무는 사람 키 남짓한 높이로, 손가락 굵기 살짝인 가느다란 줄기가 여럿 모여 집단으로 자란다. 어린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 있으며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유선형으로 양끝이 뾰족하다. 잎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짧은 가지에서 나온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4~6개씩 달리며 열매는 골돌(蓇葖)로서 가을에 익는다.
조팝나무 무리에는 이외에도 꽃 모양과 빛깔이 다른 수십 종이 있다. 진한 분홍빛인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쟁반에 흰쌀밥을 소복이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모두 아름다운 꽃으로 우리의 산하를 수놓고 있는 장미과의 대표적인 꽃나무다.
80. 돌배나무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산속의 나무들은 제마다 치열한 눈치작전을 편다. 아차! 계획을 잘못 잡으면 ‘썩은나무‘란 이름을 달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시기, 자람의 속도에 이르기 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한다. 돌배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조금 늦게 새하얀 꽃으로 한해를 출발한다. 그것도 몇 개의 꽃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을 온통 뒤집어 쓸 만큼 수많은 꽃을 피운다. 잎 피우고 꽃피우는 일반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우선 자손을 퍼뜨리는 일을 최우선 순위로 둔 것이다. 적어도 한해의 자식농사만은 망치지 않겠다는 종족보존의 강한 집념이 그대로 보인다.
그러나 배꽃을 바라보는 느낌은 진분홍 복사꽃, 연분홍 벚꽃과 같은 경쟁나무에서 보는 것처럼 도발적인 화려함과 요염함이 보이지 않는다. 흰빛이 갖는 고고함에 덧 붙여 다소곳하면서도 마치 소복에 숨겨진 청상과부의 어깨선 마냥 배꽃은 애처로움이 배어있고, 때로는 아쉬움이 묻어있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과일나무이면서 꽃으로도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지 모른다.
돌배나무는 산속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자람터를 별로 가리지 않아 서다. 돌배나무의 조상은 산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과육을 만들어 먹히고, 대신에 씨앗은 멀리 옮겨 달라는 유전자 설계를 해두었다. 덕분에 산짐승이 쉬어간 고갯마루, 물 먹으러 왔다가 잠시 실례한 개울가 등 그들이 지나간 곳이면 어디에나 자란다. 환경 적응력이 높은 탓으로 배나무에는 유난히 종류가 많다. 우리가 흔히 먹은 개량종 참배나무 이외에 돌배나무, 산돌배나무를 비롯하여 청실배나무, 문배주로 이름이 알려진 문배나무까지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 팥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등 사이비 배나무까지 합치면 더욱 혼란스러워 진다.
그러나 산에서 흔히 만나는 작은 배가 달리는 나무는 대체로 돌배나무가 아니면 산돌배나무다. 돌배나무는 주로 중북 이남에 자라고 꽃받침잎이 뾰족하고 열매는 다갈색이다. 반면 산돌배나무는 중부이북에 주로 자라고 꽃받침잎이 둥글며 열매는 황색으로 익는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면 둘의 구별은 알쏭달쏭하기 마련이다. 그냥 쉽게 친숙한 이름 ‘돌배나무’로 불러 주어도 산돌배나무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남쪽이라고 배나무 종류가 자람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고향은 북쪽의 추운 지방이다. 그래서 옛날 배의 명산지는 봉산, 함흥, 안변, 금화, 평양 등 대부분 북한 지방이었다. 산에다 두고 따먹기만 하던 돌배는 멀리 삼한시대부터 집 주위에다 한두 포기씩 심어면서 과수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자연히 사람들은 돌배나무 중 굵은 열매가 달리고 맛이 좋은 돌배를 골라다 심었고, 청실배, 황실배, 함흥배 등 차츰 이름을 날리는 품종이 생겼다. 특히 청실배는 맛이 좋아 옛 사람들도 흔히 키우던 배나무 종류다. 중랑천 넘어 태릉일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리기 전까지 ‘먹골배’란 이름으로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던 추억의 배도 대부분 청실배였다. 지금은 멀리 전북 진안의 마이산 은수사에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 하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옛 영광을 더듬어 보게 할 따름이다.
오늘날 개량종이란 이름으로 일본배, 중국배, 서양배가 우리의 배를 제치고 나라의 배 밭을 모두 점령해 버렸다. 우선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굵기에 질린다. 옛 맛을 아는 이라면 넘쳐흐르는 과즙과 너무 진한 단맛이 오히려 돌배에 대한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동의보감에 보면 ‘배는 본래 성질이 차가우며 달고 신만이 있으나, 객열(客熱, 몸에서 나는 열)을 없애며 가슴이 답답한 것을 멎게 한다.’고 처방하고 있다. 이처럼 약으로 쓸 때는 돌배라야만 허준의 처방을 제대로 따르는 셈일 것이다.
산속에서 아름드리로 자란 돌배나무는 또 다른 쓰임새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나무 속살은 너무 곱고 치밀하여 글자를 새기는 목판(木板)의 재료로 그만이다. 멀리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장인들의 눈에도 돌배나무는 일찌감치 각인되었다. 그는 배어져 부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새길 수 있도록 기꺼이 ‘육신공양’을 했다. 산벚나무와 함께 팔만대장경판으로 만들어져 750년이 지난 지금도 민족의 위대한 문자문화재로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으면서 해인사에 고이 누워있다.
배나무가 사람들과 맺은 수많은 인연으로 그의 삶이 편안하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자연계의 여러 훼방꾼 중에 붉은별무늬병(赤星病)이란 치명적인 병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공교롭게 이 병을 옮겨주는 중개나무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나무다. 그래서 배나무 근처에 향나무를 심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지금도 배 밭 주인은 주위에 향나무가 보이면 질겁한다. 19세기 중엽 서유구는 행포지(杏浦志)란 그의 책에서 '노송이 옆에 있으면 배나무는 전부 죽는다'고 하였다. 노송은 향나무 종류를 말하니 옛사람들도 배나무와 향나무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었음을 알고 있다.
81. 등나무
봄이 무르익어 가는 4월 말경이면 여기저기 쉼터에는, 연보랏빛 아름다운 꽃을 수없이 주렁주렁 매다는 등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꽃이 지고 나면 덩굴을 뻗고 아카시나무 비슷한 짙푸른 잎을 잔뜩 펼쳐 한 여름의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다. 이어서 매달리는 보드라운 털로 덮인 콩 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너무 짙푸른 등나무 잎사귀의 느낌을 부드럽게 해주는 악센트로서 나무의 품위를 높여준다. 콩과 식물이라 비료기가 없어도 크게 투정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주는 것도 이 나무가 사랑받은 이유 중의 하나다. 이렇게 등나무는 예쁜 꽃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하며 쉼터의 단골손님으로 친숙한 나무다.
그러나 자람의 방식은 사람들의 눈에 거슬린다. 등나무는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여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버린다. 칡도 마찬가지로서 선의의 경쟁에 길들어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사이의 다툼을 갈등(葛藤)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옛 조선조의 선비들은 등나무의 이와 같은 특성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다. 중종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하여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나무이던 소인배의 나무이던 관념적인 비유일 뿐이고 등나무만큼 쓰임새가 많은 나무도 없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하고 덩굴은 바구니를 비롯한 우리의 옛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껍질은 매우 질겨 종이의 원료가 되었다. 부산 범어사 앞에는 등나무 군락이 있는데, 이는 스님들이 종이를 만들기 위하여 가꾸고 보호한 흔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외 껍질은 새끼를 꼬거나 키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등나무 이야기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등가구에 쓰이는 ‘등나무’이다. 이 나무는 열대지방에 자라는 rattan이라는 나무로서 실제 등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쉽게 말하여 대나무와 가까운 집안 사이인데 속이 꽉 차있고 거의 덩굴처럼 수 십 미터씩 길게 자라는 것이 대나무와 차이점이다. 가구를 만들기 위하여 일찍부터 수입하여 사용하던 일본인들은 이 나무를 ‘籐’이라고 하였다. 수입상들이 藤과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대로 등가구라고 한 탓에 진짜 등나무와 혼동이 생겼다.
경주시 건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89호는 팽나무에 등나무가 뒤 엉켜있다. 여기에 알려진 전설이 애처롭다. 신라시대에 이 마을에는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좋아하던 옆집의 청년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어느 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함께 마을 앞 연못에 몸을 던져버렸다.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죽었다던 그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두 자매의 사연을 듣고 괴로워하던 그 청년도 연못에 뛰어 들어버렸다. 다음해가 되자 두 그루의 등나무 옆에 타고 올라갈 수 있는 한 그루의 팽나무가 갑자기 쑥 쑥 자라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굵은 팽나무에 등나무 덩굴이 걸쳐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등나무의 사랑이 너무 진한 탓인지, 광합성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팽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비실비실한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철제 지주를 세워 팽나무로부터 강제로 등나무 줄기를 떼어 놓았다.
82. 모란
주변을 환하게 밝혀줄 아름답고 화려한 꽃의 대표 자리는 모란이 차지한다. 그래서 모란은 예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다. 옛 사람들은 달덩이 같은 큰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여인을 ‘모란꽃 같다’고 하여 바로 미인의 대명사였다. 오늘이야 옛사람들이 복 없다고 싫어하던 ‘팥잎만 한 얼굴’이 미인이고, 얼굴이 조금만 크면‘얼큰’이라고 하여 싫어할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다.
설총은 미인을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을 정도다. 차음 모란은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발전하였다. 민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牡丹唐草), 수놓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쓰임새는 끝이 없다.
모란은 중국에서 들어온 꽃이다. 대부분의 나무나 꽃이 언제 수입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모란은 우리의 역사책에 수입시기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기이(奇異)에는선덕여왕(632-647)의 모란관련 일화가 적혀있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 빛과 자줏빛, 흰 빛으로 그린 모란도와 씨 3되를 함께 보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는지라 어떻게 먼저 알았는지 왕에게 물어 보았다. 왕은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지혜로움에 감복했다는 것이다.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관목으로 보통 높이 1m 남짓 자란다. 작은 잎은 달걀모양인데 3∼5개로 갈라지며 표면은 털이 없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는 흰빛이 돈다. 꽃은 붉은 자줏빛의 꽃잎이 5∼8편으로 이루어지며 지름 15cm 이상이다. 가지 끝에서 피는 한 개의 꽃은 보통 5∼6일 정도 핀다. 열매는 삭과이다. 꽃의 색깔은 예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인조23년(1646)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화려한 모란꽃을 많이 심은 곳은 엉뚱하게도 절집의 안마당이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고오운 상좌 아이도/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서역 만리 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
조지훈의 고사(古寺)Ⅰ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그 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란 유명한 시로도 우리는 모란을 잊지 못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83. 이팝나무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조시대에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하였다. 이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꽃의 여러 가지 특징이 이밥, 즉 쌀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지름도 몇 아름에나 이르는 큰 나무이면서 5월 중순, 아카시아 꽃과 거의 같이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쓰는 보기 드문 나무이다.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는 마치 뜸이 잘던 밥알 같이 생겼고,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꽃 모양은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흰 사기밥그릇을 연상하게 한다. 꽃이 필 무렵은 아직 보리는 피지 않고 지난해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버린 보릿고개이므로 주린 배를 잡고 농사일에 열중하면서도 풍요한 가을을 그리면서 헛것으로라도 쌀밥이 보이기에 이팝나무 꽃은 너무 닮아있다.
이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피는 시기가 대체로 음력 24절기의 입하(立夏) 임시이어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나무로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입하목‘으로도 부른다니, 발음상으로 본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 전의 우리 선조 들이 자연스럽게 붙여놓은 이름을 오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둘 다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더더욱 쌀농사의 흉풍년과 관계가 있으니 나름대로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경상북도 남부에서 전라북도의 중간쯤을 잇는 선의 남쪽에 주로 자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만도 7그루나 되어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에 이어서 네 번째로 많은 나무이다. 이외에도 시도기념물, 보호수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팝나무는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신천리의 천연기념물 307호이다. 대부분 정자목이나 신목(神木)의 구실을 하였으며, 꽃피는 상태를 보고 한해의 농사를 점쳤다. 습기가 많은 것을 좋아하는 이팝나무는 꽃이 많이 피고 오래가면 풍년이 들고 반대의 경우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땅속의 수분이 충분하다는 것을 뜻하니 풍년이 드는 것은 풍년이 드는 것이다. 이런 나무를 우리는 기상목 혹은 천기목(天氣木)이라하여 다가올 기후를 예보하는 지표나무로 삼았다.
이팝나무는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도 자라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쌀밥을 알지 못하니 눈이 내린 나무로 보아 눈꽃나무, snow flower라 하였다. 학명(學名)을 만들면서도 라틴어로 희다는 뜻의 Chio와 꽃을 의미하는 anthus를 합쳐서 Chioanthus라 하였다.
어린줄기는 황갈색으로 벗겨지나 나이를 먹는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으로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기하고 타원형이며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이며 표면에는 매끈한 광택이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의 모양이나 크기가 언뜻 보면 감나무 비슷하다. 열매는 콩깍지 모양이고 짙은 푸른색이며 9~10월에 익고 겨울까지 계속 달려 있다.
84. 철쭉
봄의 끝자락 5월 중하순에 들어서면 소백산, 지리산, 태백산 등 전국 높은 산꼭대기에 군락으로 자라는 철쭉꽃은 분홍빛 꽃 모자를 뒤집어쓴다. 철쭉은 비록 사람 키 남짓한 크기의 작은 나무지만 산기슭의 큰 나무 그늘부터 바람이 쌩쌩 부는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어디에나 잘 살아간다.
진달래와 철쭉종류(철쭉, 산철쭉, 영산홍)는 꽃 모양이 비슷하여 관심 있는 이들도 혼란스러워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오므로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철쭉 종류와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철쭉은 가지 끝에 작은 주걱모양으로 매끈하게 생긴 잎이 네댓 장 돌려나며 꽃빛깔이 너무 연한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는 색이 연한 진달래란 뜻으로‘연달래‘라고도 한다. 산철쭉은 잎 모양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버들잎처럼 길고 갸름하게 생겼으며 꽃빛깔은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간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붉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철쭉과 비슷한 나무에 영산홍(暎山紅)이 있다. 일본에서 주로 철쭉을 개량하여 정원수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심고 있는 흔한 나무다. 약간 진한 연분홍 꽃이 보통이나 흰색에서 붉은 색까지 수많은 품종이 있는데, 철쭉과 산철쭉 등과 비슷하여 영 헷갈린다. 오늘날 식물분류학의 체계가 거의 완전히 잡혀 있지만 영산홍만은‘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산홍의 모양새는 산철쭉과 너무 비슷한 품종이 많아 서로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쭉, 영산홍, 일본철쭉이 서로 뒤섞여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영산홍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산림경제에도 일본철쭉 이야기가 나온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세종23년(1441) 봄에 일본에서 철쭉 두 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심고 가꾸는 영산홍이 기록처럼 적어도 조선왕조 이전에 일본에서 수입된 꽃나무인지, 아니면 우리의 산에 흔히 자라는 산철쭉이나 철쭉을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철쭉의 한자 이름은 척촉(躑躅)이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썼다는 것이다. 척촉에서 철쭉이란 이름이 생겼다. 철쭉의 또 다른 이름인 산객(山客)도 철쭉꽃에 취해버린 나그네를 뜻한다. 옛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던 꽃이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 수로(水路)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따라나선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을 따 달라고 한다. 데리고 가던 하인들도 그곳에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암소를 몰고 앞을 지나치던 한 노인이 소를 팽개치고 절벽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받쳤다는 것이다. 조금 주책이 없어 보이는 부인이지만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서 철쭉으로 아름다움을 대비시킨 것 같다. 동국이상국집에도 철쭉에 대한 시가 실려 있다.
철쭉꽃에는 마취성분을 포함한 유독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양(羊)이 철쭉을 잘못 먹으면 죽기 때문에 양척촉(羊躑躅)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리산 바래봉은 철쭉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원래 양을 키우는 축산시험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철쭉만 남겨 놓고 다른 식물들은 모두 먹어 치워버렸다. 사람이 아닌 양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철쭉 밭이다.
85. 찔레꽃
숲의 가장자리나 돌무더기가 많은 양지 바른 곳에 늦은 봄이면 가느다란 줄기가 길게 늘어지면서 새하얀 꽃이 달리는 가시덩굴이 있다. 바로 찔레꽃이다. 목련꽃처럼 너무 크지도, 조팝나무 꽃처럼 너무 작지도 않은 찔레꽃은 5장의 꽃잎에 펼쳐지는 백옥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꽃의 질박함이 유난히도 흰옷을 즐겨 입던 우리민족의 정서에도 맞는 우리의 토종 꽃이다.
찔레꽃은 다른 어떤 나무 보다 해맑은 햇살을 좋아한다. 그래서 숲속 그늘의 음침한 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 숲의 가장자리 양지바른 돌무더기를 찔레가 가장 즐겨하는 자람 터이다. 긴 넝쿨을 이리저리 내밀어 울퉁불퉁한 돌무더기를 포근하게 감싼다. 그리고서 5월의 따사로운 햇빛을 잘 구슬려 향긋한 꽃내음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지만 옛 사람들에게는 아픔과 슬픔을 알려주는 꽃이기도 했다. 찔레꽃이 필 무렵에는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시기에 흔히 가뭄이 잘 든다. 그래서 특히 이때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라고도 한다. 배고픔의 고통을 예견하는 꽃이었다. 박태준씨 작사의 찔레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엄마 일 가는 길엔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은 찔레꽃을 꽃으로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배고픔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였다. 찔레 꽃잎뿐만 아니라 보릿고개를 아는 이라면 봄에 돋아나는 연한 찔레 순의 껍질을 벗겨 먹었던 일이 어린 시절의 슬픔으로 남는다.
찔레 순은 가벼운 단맛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요즈음의 눈으로 본다면 비타민과 각종 미량원소가 들어 있는 찔레순은 어린이의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되는 영양 간식이었다.
가을철에 굵은 콩알 크기로 빨갛게 익는 열매는 귀엽고 앙증맞을 뿐만 아니라 영실(營實)이라 하여 약으로 쓴다. 동의보감에는 맛이 쓰고 시며 악성종기, 부스럼, 성병이 낫지 않는 것과 두창(頭瘡), 백반병 등에 쓴다고 하였다. 열매를 소주에 담궈서 만든 황금빛의 찔레술(營實酒)은 적당히 신맛이 있다. 꿀이나 설탕을 가미하면 풍미도 일품이며, 향내가 좋아 진귀한 약술이 된다. 비타민 C가 풍부하며 신장병, 월경불순, 설사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찔레 뿌리도 열매와 마찬가지로 약제로 쓰인다. 서양에서는 찔레뿌리로 만든 담배파이프가 유명하다. 최고급 남성용품의 대명사로 꼽히는 던힐의 창업주 앨프레드 던힐(A.Dunhill)은 35세 때인 1907년 런던 듀크가(街)에 담배 가게를 열면서 찔레뿌리로 아름답게 수가공(手加工)한 파이프를 만들어냄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키가 2m정도이나 가지 끝이 밑으로 처져서 덩굴을 만든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작은 잎이 5~9개로 이루어진다. 작은 잎은 메추리 알 크기만 하고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길이 2~3cm로 톱니가 있다. 빗살 같은 톱니를 가진 탁엽이 잎자루와 합쳐진다. 꽃은 새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고 5월부터 피기 시작하며 지름 2cm정도로서 흰빛이나 연분홍빛으로 핀다.
우리의 옛 유행가에 이런 노래가 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고향산천과 아련한 유년의 추억을 그림처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그러나 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다. 붉게 피는 해당화 꽃을 찔레로 착각한 작사자의 탓일 터이다.
86. 때죽나무
계절의 여왕 오월이 익어갈 즈음, 층층이 뻗은 자그마한 나무 가지의 짙푸른 잎사귀사이에 새하얀 꽃들이 2~5개씩 뭉쳐서 줄줄이 아래로 매달려있는 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로 때죽나무(때중나무)이다.
개개의 꽃은 엄지 첫 마디만하고 작은 종(鐘) 모양으로 앙증맞게 생겼다. 절에서 흔히 보는 동양의 범종과는 달리 윗부분은 원통형에 가깝고 입이 크게 벌어진 서양 종의 모양이다. 다섯 장의 새하얀 꽃잎으로 감싼 노랑 수술은 끈을 매달아만 놓아도 산들바람으로 부딧쳐 금세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래서 영어로는 ‘snowbell‘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꽃들이 하늘을 향하여 태양을 마주보고 ‘나 얼마나 예뻐요?’하듯 뽐내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때죽나무 꽃은 치마꼬리 살짝 잡고 생긋 웃는 수줍은 옛 처녀 마냥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어있다. 멀리서는 백옥 같은 꽃잎의 옆모습 밖에 볼 수 없으니 꼭 앞 얼굴을 보고 싶은 이는 나무 밑에 들어와서 살짝 쳐다보라는 뜻이다.
가을이 영글어 가면 크기가 손가락 첫 마디만 하고 아래위가 약간 뾰족한 열매가 처음 달릴 때는 초록색으로 시작하여 갈색으로 익어 간다. 열매가 껍질이 반질반질하여 마치 스님들이 떼로 모여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필자는 ‘때중나무’란 나무이름은 중이 떼로 몰려있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짐작한다. 열매에는 유지(油脂)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예부터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쪽지방에서는 등유나 머릿기름으로 이용되었다.
열매나 잎 속에는 사포닌을 주성분으로 하는 마취성분이 들어 있어서 찧어서 물에 풀면 물고기는 순간적으로 기절해 버린다. 간단히 고기잡이에 쓰였으나 사람도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구토를 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최근 오염환경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식물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때죽나무는 공해물질의 배출이 많은 공장 가까이서도 잘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예쁜 꽃과 열매를 감상할 수 있고 공해에도 잘 견디는 때죽나무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때죽나무의 속살은 너무 해맑고 깨끗하며 세포의 크기와 배열이 거의 일정하여 나이테 무늬마저 살짝 숨어 버리고 우유 빛 아름다운 피부만을 곱게 내보인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쪼갠 나무 사이로 빗물을 흘려보내 깨끗이 정화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가로수로 적당한 나무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버즘나무, 은단풍, 튤립나무 등 ‘외제’ 나무심기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때죽나무처럼 적당한 크기로 자라며 청초한 흰 꽃과 귀여운 열매로 가로수의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나무가 금세 찾아진다. 플라타너스처럼 너무 크게 자라는 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두고 해마다 봄이면‘몽당비’로 잘라내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때죽나무를 비롯하여 가로수로 알맞은 ‘토종 우리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와 같은 무리에 속하는 친형제 나무이다. 둘다 나이를 먹어도 다갈색의 껍질이 갈라지지 않고 매끄럽다. 쪽동백나무는 옥령화(玉鈴花)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때죽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모양과 꽃이 달리는 차례가 조금 다르다. 잎은 거의 둥글고 크기가 손바닥을 편 만큼하며 꽃은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20여 개 씩 달리는 것이 쪽동백나무, 잎은 타원형이고 작으며 꽃은 2~5개씩 달리는 것이 때죽나무이다.
87. 댕강나무
이름부터 생각해 본다. 댕강나무는 의성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본다. 나뭇가지를 꺾으면 ‘댕강’ 분질러진다고 하여 댕강나무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댕강의 뜻은 작은 쇠붙이가 부딪칠 때 나는 맑은 소리라고 하였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댕강’은 망나니의 칼 휘두름에 목이 달아나는 끔직한 장면을 상상한다. 사실 댕강나무를 분질러 보면 댕강 분질러지는 것은 아니다. 왜 댕강이란 의성어가 붙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다.
어쨌든 댕강나무는 이름의 독특함 때문에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진짜 댕강나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분포지가 북쪽의 산악지방이고 흔하지 않아서다. 댕강나무는 우리나라 1세대 식물학자인 정태현박사가 일제강점기 북한의 평안도 맹산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덕분에 ‘Abelia mosanensis Chung’ 이라는 학명의 명명자에 정박사의 성이 들어있다. 우리나라 식물이 이렇게 우리나라 학자의 이름이 들어간 경우도 흔치 않다. 불행히도 우리는 개화가 늦어지면서 신학문의 받아들임이 한 박자 뒤처진 탓에, 우리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외국인들이 먼저 학명을 붙여 버린 탓이다.
댕강나무속은 세계적으로는 약 30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7~8종정도가 자란다. 다만 분류가 복잡하여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종이 있을 정도이다. 이영노교수는 댕강나무속의 큰집격인 댕강나무를 비롯하여 털댕강나무, 섬댕강나무, 바위댕강나무, 좀댕강나무, 주걱댕강나무, 줄댕강나무의 7종으로 구분하였고 이창복교수는 정선댕강나무와 큰꽃댕강나무(꽃댕강나무)를 더 넣어 9종이라 했다. 이처럼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차이가 있고 종간의 특징이 명확하지 않아 더욱 구분이 어렵다. 근래에 정영호, 선병윤, 이우철교수 등의 연구가 뒤따랐지만 논란이 있다.
속의 대표인 댕강나무는 높이 2~3m가 고작인 낙엽관목으로 줄기가 여럿으로 돋아나는 다간성(多幹性)이다. 잎은 마주보기로 나며 종에 따라 차이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댕강나무는 톱니가 없다. 특징적인 형태는 줄기에 6개 전후의 세로 줄이 있는 점이다. 육조목(六條木)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이름은 육도목(六道木)이다. 이렇게 줄기에 골이 생기는 나무가 흔치 않으므로 다른 나무와 쉽게 구분이 된다. 진짜 댕강나무는 골이 아주 얕게 생기며 털댕강나무나 줄댕강나무 등은 더 깊이 명확한 골이 생긴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댕강나무속의 나무들은 댕강나무 이외의 종(種)도 대부분 희귀수종으로서 만나기가 어렵다. 다만 원예 품종인 꽃댕강나무(Abelia grandiflora)는 조경수로 널리 심기 때문에 비교적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일반사람들이 댕강나무라고 부르는 수종은 대부분 이 나무이다. 중국에 자라는 Abelia chinensis와 Abelia uniflora의 잡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꽃댕강나무는 이른 봄 진한 녹색의 작은 잎을 단 가느다란 가지가 나올 때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가지의 끝에 길이 2cm정도의 작은 나팔모양의 꽃통은 붉은 자주 빛으로 녹색 잎과 대비된다. 꽃통의 끝이 다섯으로 갈라지면서 지름 1cm정도의 하얀 꽃이 피어 늦가을까지 꽃피기를 계속한다. 꽃댕강나무는 다른 댕강나무가 낙엽 지는데 비하여 반상록이므로 남부지방에서는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다.
댕강나무속의 영어 일반명은 속명 그대로 ‘Abelia’라고 한다. 19세기 초 처음 중국에 들어간 식물학자이면서 의사인 영국인 Abel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벨리아란 이름은 이처럼 댕강나무속 전체를 말할 때도 있지만, 꽃댕강나무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88. 비목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 퍼/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선구자, 반달 등과 함께 우리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가곡이다. 1964년 백암산 비무장지대에서 육군 소위로 근무하게 된 한명희씨는 양지바른 산모퉁이에서 녹슨 철모와 이끼 낀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한다. 한국동란 때 처참하게 죽어간 이름 없는 젊은이의 초라한 무덤이었다. 그는 무덤 앞에 꿇어앉아 헌시(獻詩)를 올리고 장일남씨가 작곡하여 가곡 ‘비목’이 탄생한다. 6월이 오면 비목의 가사처럼 가슴이 저며 오는 지나간 우리의 아픈 상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비목나무는 가곡의 비목과 발음이 같아 사람들은 초연 속에 사라져 버린 비극의 주인공들을 상징하는 나무로 떠올리게 된다. 잘 알려진 나무가 아니므로 구부정하고 어둠침침하며 곧 썩어 넘어질 것 같은 나무로 머릿속에 나름대로 그려본다. 그러나 보얀목이라고도 부르는 이 나무는 황해도 이남의 산이라면 어디에서나 곧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흔한 나무의 하나일 뿐이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이며 높이 10여m, 거의 한 아름까지도 자란다고 하지만 대체로 지름 한 뼘 정도를 흔히 만난다. 나무껍질은 어릴 때는 황갈색이고 오래되면 얇고 커다란 비늘조각으로 떨어진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거꾸로 세운 피뢰침 모양이다. 날씬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약간 배가 나오면서 길쭉하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로 한창 봄이 무르익을 때 핀다. 연한 노랑 빛으로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작은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달린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깔끔한 꽃 모양이 품위가 있다. 열매는 작은 콩알 크기 정도이고 처음은 초록색으로 시작하나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차츰 붉은빛으로 익는다. 황색으로 차츰 물들어 가는 이 나무의 단풍과 함께 작은 루비 구슬 같은 열매가 다소곳이 달려 있는 모습이 가을 숲의 정취를 돋운다. 외국에서 개발된 여러 열매 감상 수종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우리 숲의 우리 나무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재임기간동안의 자기 업적을 비(碑)에 새겨서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목민심서 6장 유애(遺愛)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판서 이상황(李相璜)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괴산군에 닿았는데, 미나리 밭에서 한 농부가 나무 비에 진흙 칠을 다섯 번이나 하고 있었다. 어사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니, ‘이것은 바로 선정비요‘라고 대답하였다. 왜 진흙 칠을 하는지 다시 물었더니,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방이 나를 불러 이 비를 세우게 하였소. 혹시 눈 먼 어사가 이것을 진짜 비로 알까봐 걱정되므로 진흙 칠을 해서 세우려는 것이요‘ 하였다. 어사가 그 길로 바로 동헌으로 들어가 먼저 진흙 비의 일을 따지고 고을 원님을 봉고 파직시켜버렸다.
이와 같이 나무 비를 만든 비목(碑木)과 여기서 말하는 비목나무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목재는 나무질이 치밀하고 잘 갈라지지 않아 기구재나 조각재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관리들의 거창한 업적을 적어 넣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나무이다. 굳이 관련이 있다면 달랑 나무토막 하나에 이름 석 자라도 새겨지는 것으로 풍진세상을 하직하는 민초들의 무덤 앞에 흔히 세워진 나무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89. 함박꽃나무
꽃 모양이 한약제로 널리 쓰이는 작약, 즉 함박꽃과 꽃모습이 비슷하여 나무에 피는‘함박꽃’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함박꽃나무와 목련(木蓮)은 식물학적으로도 한 식구이고 꽃이나 잎 모양이 매우 닮았으며 주로 산 속에 자라므로 흔히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함박꽃나무, 그들의 이름으로는 목란(木蘭)임이 알려졌다. 목란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름도 없었는데 60년대 후반 직접 목란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그 이후 목란은 귀중한 나무로 취급받았으며 91년 4월에 국화로 지정했다고 한다. 김일성 저작집 16권에 ‘우리나라에 있는 목란이란 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고 나뭇잎도 보기가 좋아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하여 심기를 장려한 것 같다.
김일성과 연관이 있는 시설에는 대부분 목란 꽃문양이 들어있다. 금수산 의사당 밑바닥,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95년 8월에 판문점 북측지역에 세워진 김일성의 친필비석에도 그의 사망당시 나이를 상징하는 82송이의 목란 꽃이 새겨져 있다한다. 또 각종 공문서의 바탕에는 우리나라가 무궁화 그림을 넣는 것처럼 목란 꽃이 연하게 깔려있고, 평양 창광거리에서 최고시설을 자랑하는 종합연회장도 이름이 목란관이다. 가극 ‘금강산의 노래’에서도 목란은 꽃 중의 꽃으로 숭상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처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신격화의 일단일 따름이고 산목련, 함백이, 개목련, 함박꽃나무란 이름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다. 자라는 곳이 인가근처가 아니라 깊은 산 계곡이므로 사람들 눈에 잘 띠지 않았을 따름이다. 사실 목란이란 원래 목련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다. 이렇게 같은 나무를 두고 남북한이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목련은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오나 함박꽃나무는 잎이 다 펼쳐진 다음 꽃이 핀다. 주먹만 한 크기의 꽃이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새로 나온 가지의 끝에 하나씩 달린다. 인공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정말 맑고 깨끗한 새하얀 6장의 커다란 꽃잎으로 붉은색이 들어간 보랏빛 수술 뭉치를 감싸 안는다. 수술을 흰 꽃잎과 대비되어 자칫하면 커다란 초록색 잎사귀에 묻혀 심심해져 버릴 하얀 꽃에 악센트를 주고 있다. 여기에는 꿀을 따는 벌을 위하여 은은한 향기도 내뿜는다. 꽃이 피는 모습도 독특하다.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핀다. 마치 소복 입은 청상과부의 조심스런 몸가짐에서 풍기듯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 오는 꽃이다.
전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작은 나무로서 키가 7~10m, 굵기는 발목 굵기 정도가 고작이다. 줄기는 하나가 나와 곧바로 자라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포기가 나와 비스듬하게 자라는 경우가 흔하고 껍질은 회색이며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움이 그대로 있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고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여 목련의 잎 모습과 거의 같다.
민간약으로 함박꽃나무의 뿌리는 진통, 하혈, 이뇨 등에 효능을 갖고 있으며 꽃 역시 안약으로 쓰거나 두통에도 처방한다.
90. 박쥐나무
박쥐는 생김새가 쥐와 비슷하고 낮에는 음침한 동굴 속에 숨었다가 밤에만 활동하며 앞 얼굴이 흉측 맞게 생겨서 사람들이 싫어한다. 왜 하필이면 아름다운 나무에다 허구 많은 좋은 이름을 다 놔두고 ‘박쥐나무’로 붙였냐고 비판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쥐나무의 잎을 햇빛에 한번 비춰보고 박쥐의 날개와 비교해 보면 금세 너무 닮은꼴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박쥐의 생태나 얼굴모양으로 본 것이 아니다. 날아다니는 박쥐의 날개 모습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끝이 3~5개 살짝 갈라진 커다란 잎에, 나무와 나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라도 잠시 비춰지면 이리저리 뻗은 잎맥은 마치 펼쳐진 박쥐날개에서 실핏줄을 보는 듯하다. 잎의 두께가 얇고 잎맥이 약간씩 돌출 되어 있어 더더욱 닮아있다.
박쥐나무는 숲속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쥐나무는 주위의 키다리 나무들과 햇빛을 받기 위한 무한경쟁에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 아니라, 숲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서로 혼자만 살겠다고 높다랗게 하늘로 치솟아서 잔뜩 잎을 펼쳐 놓은 비정한 이웃 나무 아저씨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는데 필요한 ‘구조조정’을 아득한 옛날부터 과감히 수행하였다. 우선 덩치는 키3~4m로 줄이고 우리나라 유명 정치가들의 단골메뉴 어록(語錄)인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작고 촘촘한 잎은 아예 없애 버렸다. 넓고 커다란 잎을 듬성듬성 만들어 산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어쩌다 들어오는 햇빛을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꽃 모양도 독특하여 손가락 두 마디 길이나 됨직한 가늘고 기다란 연노랑의 꽃잎이 도르르 말려 뒤로 젖혀지면서 속의 노랑 꽃술을 다소곳이 내밀고 있다. 잎사귀위로 꽃이 나오는 법이 없다. 모두 아래를 향하여 핀다. 박쥐나무 꽃의 이런 모습에서 필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멀리 조선시대로 돌아가게 한다. 마치 층층시하에 조심조심 살아가든 가련한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잠깐 외출을 하려는 그 순간의 애잔한 모습을 보는 것도 같다.
학생들과 함께 책으로 배운 나무 모양도 익히고 표본 채집을 위하여 산에 가는 일이 많다. 표본을 만들어 제출해만 성적을 얻을 수 있다. 나무 이름을 알려주기가 무섭게 우르르 달려들어 꽃이나 열매가 달리고 잎이 깨끗한 표본을 만들려고 경쟁적으로 가지를 잘라댄다. 학점이라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무는 나뭇가지 몇 개 잘라주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박쥐나무와 같이 키가 작고 잎이 많이 달리지 않은 나무는 문제가 다르다. 30여명의 학생들이 작은 가지 하나씩만 잘라도 박쥐나무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게 바로 박쥐나무’라는 나의 말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해 버리기 일쑤다. 공부를 시킨다는 알량한 명분으로 생명을 빼앗아 버린 불쌍한 박쥐나무에게 나는 말한다. ‘잘 가거라!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커다란 나무로 다시 태어나 큰소리 땅땅 치며 잘 먹고 잘 살아라’고 하고 감히 용서를 빌어본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만나는 낙엽활엽수 작은 나무로서 흔히 줄기가 여럿 올라오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앞뒤에는 털이 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핀다. 콩알 크기의 열매는 바깥의 육질이 안쪽의 씨를 둘러싸는 핵과(核果)이며 가을에 짙은 푸른색으로 익는다. 봄에 나오는 어린잎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뿌리는 팔각풍근(八角楓根)이라고 하며 한방에서는 진통제나 마취제로 쓰기도 한다. 잎이 단풍잎처럼 5개로 깊게 갈라지는 단풍박쥐나무가 남부지방에 자라며, 새로 난 가지와 잎의 뒷면과 잎자루에 갈색 털이 빽빽이 난 것을 누른대나무라고 하여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91. 협죽도(유도화)
초여름,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는 주름 잡힌 붉은 꽃을 피우는 자그마한 늘 푸른 나무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협죽도(夾竹桃)란 나무다. 중국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잎은 대나무를 닮았고 꽃은 복숭아꽃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꽃이 복사꽃을 닮았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잎은 바라보는 질감이 댓잎과 너무 달라 대나무와 닮았다는 것은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약제의 이름으로 쓰이던 협죽도를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으로 짐작한다. 그 보다는 우리가 만든 유도화(柳桃花)란 이름이 나무의 특성을 훨씬 잘 나타내었다. 자라는 모습과 나뭇잎은 버들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공식 이름은 유도화가 아니라 협죽도이다.
협죽도는 인도가 원산지인 키 작은 나무로서 중국이나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바깥에서 그대로 월동이 되지만 중부지방에서는 실내에서만 키울 수 있다.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820년 유희가 쓴 최초의 사전인 물명고(物名攷)에 협죽도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아마 이 보다는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협죽도는 아열대지방 식물로서 높이 2~3m정도이며, 크게 자라도 5m를 잘 넘기지 않는다. 자라고 있는 모양은 땅에서부터 많은 줄기가 올라와 포기를 이루는 전형적인 관목의 형태다. 잎은 셋씩 나와 돌려나기하고 가늘고 긴 타원형이며, 손가락 한두 개 길이에 나비도 손가락 굵기 정도이다. 잎에는 약간의 광택이 있고, 가느다란 잎맥이 촘촘하게 좌우로 뻗어 있어서 표면에서도 잎맥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꽃은 새로 자란 가지 끝에서 우산모양으로 6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늦가을 까지 이어진다. 꽃 하나하나는 작은 달걀크기만 하며 꽃잎에는 약간씩 얕은 주름이 잡혀진다. 붉은 색이 대부분이지만 백색, 핑크, 연한 황색 및 꽃잎이 서로 겹쳐진 만첩협죽도까지 여러 품종이 개발되어 있다. 여름날의 짙푸른 잎과 너무나 대비가 명확한 붉은 꽃이 이국적인 정취를 가져다주며, 강한 향기는 꽃의 아름다움에 더욱 취하게 만든다. 그래서 남부지방에는 흔히 심는 정원수로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서양협죽도(Nerium oleander)도 들어오고 있으나 향기가 없다. 향기이외에는 인도 협죽도와 거의 구분이 안될 만큼 모양이 비슷하다. 꽃이 귀한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오랫동안 꽃이 피며,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도 비교적 잘 자라므로 도로가나 공원 등에 널리 심고 있다.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고 포기나누기, 꺾꽂이 등으로 쉽게 번식을 시킬 수 있다.
협죽도는 우리나라에 자라는 1천여 종의 나무 중에 거의 유일하게 잎, 줄기, 뿌리에서 꽃까지 모두 알칼로이드 계열의 ‘강심배당체(cardiac glycosides)’라는 성분을 가진 유독식물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꺾어 즉석 나무젓가락으로 사용한다거나 잎을 씹고 꽃잎을 먹는 일은 절대로 해서 안 된다. 협죽도가 불에 탈 때도 연기에 중독될 수도 있으니 야외 바베큐나 캠핑를 할 때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나무의 독성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식품회사의 광고판에는 협죽도 잎이 배경 나무로 깔려 있을 정도이다. 협죽도를 건강에 좋은 식물로 오해할까봐, 회사에다 사실을 알려주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협죽도는 이렇게 유독식물이면서 동시에 병을 치료하는 약제이다. 잎이나 줄기를 말려서 심장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강심제나 오줌을 잘 나오게 하는 이뇨제로 쓴다.
92. 밤나무
여름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는 6월 중순을 지나면서 숲속 여기저기에는 희뿌연 꼬리모양의 꽃들이 매달리는 나무와 만난다. 갸름한 초록색 잎은 유난히 윤기가 자르르한데 비하여 마치 가발을 쓴 것처럼 어울림이 맞지 않은 꽃, 가을이면 밤송이를 매달 밤꽃이 이렇게 생겼다. 꽃의 모양이 독특하듯 꽃내음 또한 특별하다. 대부분의 꽃은 한창 피어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꽃 냄새는 향기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밤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살짝 쉬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시큼하기도 한 묘한 냄새가 난다. 바로 인간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정액냄새와 영락없이 같단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를 흔히 양향(陽香), 남자의 향기라 했다. 이 냄새를 부끄러워한 옛 부녀자들은 밤꽃이 필 때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더욱 근신하였다 한다. 하지만 밤꽃은 흐드러지게 많이 피고 꿀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밤 꿀을 생산하는 중요한 밀원식물이기도 하다.
밤알 속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달큼함을 느낄 만큼의 당분도 들어있어서 예부터 식량자원의 하나였었다. 밤나무란 이름도 필자는 밥이 달리는 나무라 뜻으로 ‘밥나무’에서 밤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한다. 밤은 제물(祭物)로서도 중히 여긴다. 밤알이 보통 3개씩 들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출세의 대명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온 집안에서 나란히 나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임경빈 교수는 보다 구체적인 해석을 밤이 싹이 틀 때의 모양에서 찾아냈다. 밤 껍질을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은 나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제사상의 맨 앞줄은 대추다음에 밤을 놓는다. 우리의 재래종 밤은 예부터 굵기로 유명했다. 중국의 진나라 때 편찬된 삼국지에 마한에서는 배만한 밤이 생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밤송이는 ‘고슴도치야 게 섰거라’ 할 만큼 완벽해 보이는 방어 구조를 갖고 있다. 날카로운 침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안에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싸고 그 안에는 또다시 떫은맛이 잔뜩 든 안 껍질이 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비를 하고도 벌레침입을 억제하는 물질을 껍질에 살짝 섞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밤을 치다 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벌레 때문에 사람들은 질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밤을 수확할 무렵부터 껍질에 붙어 있던 벌레 알이 보관 과정에 부화되어 껍질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한 소금물을 만들어 4~5일정도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얼지 않은 음지에 모래와 함께 묻어두면 다음 해 까지도 밤벌레 공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밤나무 목재는 각종 제사 용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이다. 사당의 위패(位牌), 제상(祭床) 등으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널리 이용된 나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이르기도 한다. 경산 임당의 신라초기 무덤에서 밤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더 널리 쓰인 것 같다. 밤나무는 수많은 재배 품종이 있으나 크게 나누어 우리가 흔히 보는 밤나무와 북부지방과 중국을 고향으로 하는 약밤나무가 있다. 밤의 굵기가 약밤나무는 더 작고 고소한 맛이 더 있다.
밤나무의 잎은 갸름하고 길쭉하며 잎 가장자리의 톱니 끝은 짧은 침처럼 생겼다. 꽃이나 밤이 아직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밤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이 닮았다. 밤나무는 녹색의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 침 끝까지 들어있어서 침이 파랗게 보이는데 비하여 상수리나무의 잎 침에는 엽록소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연한 갈색으로 보인다.
93. 뽕나무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속담이 있다.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여름날의 무성한 뽕나무 잎은 연인들의 감추고 싶은 모습들을 항상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카페도 피시방도 없던 그 옛날 청춘남녀가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에 뽕나무밭보다 더 적당한 곳은 없었을 것 같다. 2,500~3,000년 전쯤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 고전 ‘시경(詩經)’ 용풍에는 상중(桑中)이란 노래가 있다.
‘보리 베러 간다고 마을 북쪽으로 갔다네/누구를 생각하며 갔을까/
익(弋)씨 집 큰딸이지/만나자 한곳이 뽕나무 밭 가운데라서 상궁(上宮)에서 나를 맞이하였고/
올 때엔 기수까지 바래다주네.’라고 했다.
역시 뽕나무밭에 가서 연인을 만나는 내용이다. ‘뽕’이란 에로 영화로 우리에게 각인 되어 있듯이 뽕과 남녀의 사랑은 조금 엉큼한 구석이 있다.
예부터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고구려 동명왕 때와 백제 온조왕 때 농상을 권장하였고, 초고왕 때는 양잠법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한다. 1933년에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에도 뽕나무재배 기록이 있다. 고려 때에도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가 거행되었으며, 또한 잠실(蠶室)이라 하여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어주던 곳을 따로 설치할 만큼 나라의 귀중한 산업이었다.
세종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뽕나무는 경복궁에 3,590그루, 창덕궁에 1,000여 그루, 밤섬에 8,280그루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기록대로라면 궁궐이 온통 뽕나무밭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를 증명하듯이 오늘날 궁궐 안에 아름드리 뽕나무가 남아 있기도 하다. 창덕궁의 가장 굵은 뽕나무는 얼마 전 천연기념물 471호로 지정되었다.
뽕나무는 단순히 잎을 따서 누에치기에만 쓰인 것은 아니다. 열매인 오디를 상실(桑實) 혹은 상심(桑椹)이라 하는데, 이를 건조시켜 한약재로 쓴다. 이뇨효과와 함께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강장작용이 있으며 기타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뽕나무 껍질도 상백피(桑白皮)라 하여 약으로 쓴다. 열매의 즙액을 누룩과 함께 섞어 발효시킨 술을 상심주(桑椹酒)라 하며 정력제로 쓰인다고도 한다.
뽕나무에는 흔히 보는 늘푸른 겨우살이가 아니라 귤잎 모양의 낙엽성 ‘꼬리겨우살이’가 드물게 자란다. 이를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는데, 광해9년(1616) 전라 좌수사 이흥립이 2근을 진상하였다. 임금은 신하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홍립의 벼슬을 올려 주었고 품질을 감정한 의사 손몽상도 동반(東班)에 임용하였다. 꼬리겨우살이 한두 근에 벼슬은 물론 신분이 변할 정도로 임금도 귀중하게 여기던 약제이었다. 최근에는 오래된 뽕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상황(桑黃)버섯을 비롯하여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 그 자체도 바로 약제로 쓰일 만큼 뽕나무는 양잠에 필요한 나무일뿐만 아니라 약나무로 각광을 받고 있다.
뽕나무는 작은 나무로 알기 쉬우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지름 1m가 넘는 아름드리가 된다. 겉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안 껍질이 노란 것이 특징이다. 잎은 갸름하며 밑은 심장모양에 가깝고, 끝은 꼬리모양으로 길고 뾰족하며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잎에 따라서는 가끔 깊게 패여 있어서 한 나무에 모양이 다른 잎이 같이 달려있다. 나무의 속은 황색 빛을 띠고 있어서 독특한 정취가 있고 단단하며 질기고 잘 썩지 않는다. 경북 경산시 임당리에는 삼국이 자리를 잡기 전에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출토된 나무 관은 직경이 1m가 넘는 뽕나무로 만들었다. 뽕나무 무리에는 잎의 끝이 점점 뾰족해 지는 뽕나무와 거의 비슷하나 잎의 끝이 꼬리처럼 긴 산뽕나무가 있으나 구분하기가 어렵다.
94. 자귀나무
꽃은 멋 부리는 방법이 다르다. 색깔로 외모로 향기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벌을 꼬여내어 수정을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꽃은 공통의 모양이 있다. 타원형의 아름다운 꽃잎과 가다란 꽃술을 가진 모습이다. 자귀나무 꽃은 평범함을 거부했다. 초여름의 숲 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채 살처럼 펼쳐 놓은 꽃, 화장 솔을 벌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우리와 만난다. 꽃잎은 퇴화되어 버리고 3cm나 되는 실은 수술이 모인 것이다. 실의 끝은 붉은 빛이 강하므로 대체로 붉게 보인다. 잎의 모양도 독특하다. 길쭉길쭉한 쌀알처럼 생긴 작은 잎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깃털모양으로 촘촘히 달려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소가 특히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 혹은 소쌀나무라고도 한다.
자귀나무란 자는데 귀신같은 나무를 줄인 이름인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다. 초등학교 앞 노점 판의 인기품목이었던 미모사(신경초)를 건드리면 금세 펼쳐져 있는 잎이 닫혀버리는 모양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광합성을 할 때 이외에는 잎을 닫아 버려 날아가는 수분을 줄여보자는 대책이다. 자귀나무는 경망스럽게 건드리는 정도로 일일이 반응은 아니 하고 긴 밤이 되어야 서로 마주 붙어 정답게 깊은 잠이 들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50~80개나 되는 작은 잎이 짝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상대를 찾지 못한 홀아비 잎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합환수(合歡樹) 혹은 야합수(夜合樹)라 하여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뜻으로 정원에 흔히 심는다. 그러나 대낮에는 두꺼운 구름이 끼여 아무리 컴컴해도 잎이 서로 붙지 않는다. 자귀나무 잎의 수면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절제된 부부생활을 하라는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도 모른다.
옛날 중국의 두양이라는 선비의 부인은 말린 자귀나무 꽃을 베개 속에 넣어두었다가, 남편의 기분이 언짢아하는 기색이 보이면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서 한잔씩 권했다. 이 술을 마신 남편은 금세 기분이 풀어졌으므로 부부간의 사랑을 두텁게 하는 신비스런 비약으로서 다투어 본받았다 한다. 하기야 이런 감동서비스를 받고 어느 남편이 기분이 풀어지지 않겠는가?
겨울이 되면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수없이 달린다. 세찬 바람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가만히 들어보면 꽤나 시끄럽다. 옛 양반님들은 이 소란스런 열매 부딪침 소리를 빗대어 여설수(女舌樹)란 이름을 붙였다. 물론 지금이라면 어림없는 이름이다. 조선조 제일의 석학 퇴계 이황마저 ‘무릇 여자란 나라이름이나 알고 이름 석자나 쓸 줄 알면 족하다’고 일갈하여도 무방하던 시절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껍질은 합환피(合歡皮)라 하여 동의보감에 보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서 만사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또 민간에서는 갈아서 밥에 개어 타박상, 골절, 류머티즘에 바르면 잘 듣고 나무를 태워 술에 타서 먹으면 어혈 등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황해도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그렇게 크게 자라지도 않고 줄기가 곧 바르지도 않다. 깊은 산 속에서는 키가 10여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갈색바탕에 녹색이 들어간 색깔인데 나이를 먹어도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다만 작고 동글동글한 숨구멍만 촘촘히 생긴다. 잎자루는 가지에 어긋나기로 붙어 있는데, 큰 잎자루에서 또 한 번 더 갈라져서 두 번 갈라진 셈이 된다. 줄기가 굽거나 약간 드러눕는 모양이어서 목재로서의 큰 가치는 없다.
95. 위성류
중국대륙 중북부 섬서성(陜西省) 서안(西安)에서 동북으로 약25km떨어진 곳에 함양(咸陽)이란 옛 도읍지가 있다. 지난날의 이름은 위성(渭城)이며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수도를 삼았던 곳이다. 이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 당나라를 거치면서 바로 옆의 서안이 융성하여 위성은 차츰 쇠락의 길을 걷는다.
‘위성에 아침 비 내려 먼지를 씻어내니(渭城朝雨浥輕塵)/객사의 버들잎은 더욱 푸러지네(客舍靑靑柳色新)/그대에게 술 한 잔 권해 올리니(勸君更進一杯酒)/양관을 떠나 서역으로 가면 옛 친구는 아무도 없어지네(西出陽關無故人)’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왕유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친구와의 이별을 다른 유명한 시다. 필자가 감히 뜻 번역을 해 본 것이다. 시의 내용처럼 위성에는 버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 버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수양버들인지는 잠시 망설여지게 한다. 왜냐하면 생김새가 비슷한 위성류라는 ‘짝퉁 버들’이 있어서다.
위성류는 아름드리가 되지는 않지만 높이 5∼7m에 한 뼘 정도 자라는 낙엽수다. 이 나무의 얼핏 본 바깥 모습은 가지가 늘어지는 수양버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버들과는 인연이 먼 식물임을 금세 찾아 낼 수 있을 만큼 다르다. 우선 넓은 잎이 보이지 않고 가지가 수없이 갈라지며, 어린가지는 실처럼 가느다랗다. 버들도 흔히 우리가 세류(細柳)라 할 만큼 가는 가지를 갖지만 위성류에는 미치지 못한다. 식물분류학이란 학문을 알지 못했던 옛 시인들은 머리 썩힐 일 없이 간단히 버들의 종류에 넣었다. 그래서 첫 이름은 위성에서 흔히 보는 버들이란 뜻으로 위성류로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위성류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류(柽柳)라고 하며. 우리의 ‘물명고’에도 같은 한자를 쓰고 ‘당버들’이란 한글명을 병기하였다. 다른 이름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란 뜻으로 우사(雨師)라고도 한다. 중국의 최초 백과사전 ‘이아’에는 위성류는 비가 내일 기색이 있으면 생기가 돌고 가지가 뻣뻣해진다고 했다. 일본은 御柳(ギョリュウ)라 하며 영어이름은 Tamarisk, 잎갈나무를 일컫는 Tamarack과 거의 같은 철자다. 두 나무 모두 노랗게 물드는 가을 단풍의 모습이 비슷하여 유사한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타마르 강 유역에 많이 자라서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이 나무의 특징 중에 하이라이트는 잎이다. 향나무의 비늘잎처럼 2mm남짓한 작디작은 잎이 겹쳐지면서 가느다란 가지를 감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녹색가지로 보일 따름이다. 건조지역에 자랄 때 쓸데없이 잎을 넓게 펼쳐 수분이 달아나는 것을 막아보자는 설계인 것 같다. 분명히 잎이 넓다는 뜻의 활엽수에 들어가는 나무인데, 아무래도 잎 모양으로는 침엽수처럼 느껴진다.
꽃은 늦봄과 여름에 2번 핀다. 연분홍의 작은 꽃이 어린가지 끝에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그러나 꽃대가 옆으로 혹은 밑으로 처지므로 오히려 이삭모양의 꼬리꽃차례 모습이다. 봄에 피는 꽃이 여름 꽃보다 약간 크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다. 여름 꽃은 10월경에 삭과로 익고 씨에는 작은 깃털이 있다. 버들처럼 물기가 많은 곳에 잘 자라나 건조한 곳에서도 잘 버틴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도 흔히 자란다고 한다. 소금기에도 강하므로 바닷가나 해안 매립지 등에도 심을 수 있다. 그래서 ‘salt cedar’라는 다른 이름을 갖기도 한다.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위성류는 잎이 떨어진 나목의 모습은 엉성하고 볼품이 없다. 잎이 나오고 꽃이 핀 다음이라도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무의 모습이 독특하여 여기 저기 조경수로 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96. 망개나무
망개나무, 경상전라도의 남부지방에서는 청미래덩굴을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지방사투리일 따름이고 식물학적인 공식이름 망개나무는 청미래덩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청사조, 먹넌출과 함께 갈매나무과 망개나무속에 들어가는 전혀 별개의 나무다. 우선 이 나무의 내력을 잠시 알아본다. 1935년 우리나라 식물분류학의 선구자인 정태현 선생은 속리산에서 처음 망개나무를 찾아내어 특산종으로 학회에 보고 한다.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우리나라 특산나무로 알았으나 사실은 오래 전에 이미 일본에서 발견되어 학명까지 붙여져 있는 상태였다. 학술정보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일본 현대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노도미타로(牧野富太郎)씨가 1894년 그의 고향 시코쿠의 고지현(高知県) 횡창산(横倉山)에서 처음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국남부에도 자람 터가 있다고 알려졌다.
이처럼 동양3국에 모두 자라니 평범한 나무로 알기 쉽지만, 세계적인 희귀수종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한 아름 남짓에 나이가 백년만 넘어도 벌써 천연기념물 반열에 오를 만큼 그는 귀한 존재다. 속리산의 탑골암 앞 및 제천 송계리 충북대 연습림에 자라는 망개나무는 각각 천연기념물 207호와 337호로 지정되어 있고, 괴산 사담리에는 망개나무가 자라는 계곡전체가 천연기념물 266호이다. 최근에는 포항의 내연산에서도 아름드리 망개나무가 발견되었다.
망개나무는 원래 석회암지대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주된 자람 터는 속리산, 월악산, 주왕산, 내연산을 잇는 중부내륙지방의 지극히 한정된 지역이다. 또 자연 번식이 어려워 집단으로 자라는 곳이 거의 없고 혼자씩 다른 나무와 경쟁하느라 나무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자연히 가까운 친척의 꽃가루를 받아 종자를 만드는 일이 잦아진다. 자기 꽃가루에 의한 교배가 반복된다. 흔히 말하는 ‘자식약세(自殖弱勢)’ 현상이 자꾸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자는 자람이 나쁘고 번식력이 약하여 자연 상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산림청 자료에는 약 2백만 개의 종자 중 겨우 한 그루만이 큰 나무로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주위의 다른 나무에 밀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보호를 받아야만 할 운명에 처해 있다.
나무는 줄기가 곧 바르며 높이 15m전후까지 자라는 낙엽교목이다. 가지는 붉은빛을 띤 갈색이며 피목이 흩어져 있으나 나이를 먹으면 세로로 긴 그물모양으로 갈라지며 회흑색이 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긴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손가락길이보다 약간 길다. 잎 표면은 다른 활엽수보다 맑고 짙은 녹색이면서 잎맥이 뚜렷하며 가장자리는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거나 밋밋하다.
꽃은 6∼7월 경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같이 피며, 동시에 일제히 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오랫동안 이어진다. 1/2새끼손톱크기의 작은 연노랑 꽃이 짧은 꽃대를 뻗어 총상꽃차례에 달린다. 꽃이 적은 시기에 비교적 많은 꽃이 오래 피므로 밀원식물로 값어치가 높다. 열매는 핵과로서 팥알크기의 긴 타원형으로 황갈색을 거쳐 8∼9월에 붉게 익는다. 늦가을에 황백색의 깔끔한 단풍도 볼만하다.
망개나무는 환공재(環孔材)로서 비중 0.8이 넘고 단단한 나무이다. 가지가 곧게 뻗고 자람도 비교적 빠르다. 또 재질이 질겨서 농기구 만들기가 좋으며 비중이 높아 땔감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잘려나갈 0순위 나무일 수밖에 없었다. 번식력마저 약하니 망개나무는 이래저래 만나기 어려운 희귀수종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97. 모감주나무
짙푸른 녹음에 웬만한 꽃들은 모두 묻혀버리는 여름날, 대체로 7월 중순이면 모감주나무는 화려한 노랑꽃으로 자신을 뽐낸다. 왕관을 장식하는 깃털처럼 우아하게, 긴 꽃대를 타고 자그마한 꽃들이 줄줄이 달린다. 따가운 여름 태양에 바래버린 듯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랑이라기보다 동화 속의 황금 궁전을 연상케 하는 고고한 황금빛에 가깝다. 작은 꽃이 수없이 모여 꽃방망이를 만들고 있다가 하나 둘 떨어진다.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리 듯, 영어 이름은 아예 ‘golden rain tree’라고 했다.
태양과 경쟁하듯이 버티던 수많은 황금색 꽃은 수정이 되고 나면 이어서 세모꼴 초롱 모양 열매를 맺어, 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크기를 부풀려 간다. 작은 달걀 크기만큼이나 굵어지면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진다. 안에서는 새까만 종자 세 개가 귀여운 얼굴을 내민다. 굵은 콩 크기의 윤기가 자르르한 이 종자는 완전히 익으면 돌처럼 단단해진다. 망치로 두들겨야 깨질 정도이다. 만질수록 반질반질해지기까지 하므로 염주의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감질나게 몇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54염주는 물론 108염주도 몇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매달린다. 모감주나무의 열매는 금강자(金剛子)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은 특성에서 유래되었겠으나, 불가에서는 도를 깨우치고 지덕이 굳으며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트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염주는 원래 피나무나 무환자나무 열매, 율무, 수정, 산호, 향나무들로 만든다. 그 중에서도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는 큰스님들이나 지닐 수 있을 만큼 귀한 염주이었다.
모감주나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중국 선종의 중심 사찰인 영은사 주지의 법명이 ‘묘감(妙堪)‘이었고, 불교에서 보살이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묘각(妙覺)‘이라 한다. 열매가 고급염주로 쓰이는 모감주나무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처음 묘감이나 묘각에 구슬을 의미하는 주(珠)가 붙어 처음 ‘묘감주나무‘나 ‘묘각주나무‘로 부르다가 모감주나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경남 거제시 연초면 한내리에는 ’묘감주나무‘라 불리는 모감주나무 군락이 있다.
모감주나무는 북한의 압록강 하구, 황해도 초도와 장산곶에서 남한의 백령도와 덕적도, 안면도 등 주로 서해안에 자람 터가 있다. 그래서 한때 우리나라 나무가 아니라 중국에서 파도를 타고 종자가 건너온 수입나무로 알아왔다. 그러나 이곳 완도를 비롯하여 거제도, 포항으로 이어지는 남동해안에서도 자람 터가 발견되고, 내륙지방으로는 충북 영동과 월악산, 대구의 내곡동 등지에도 자라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아직도 명확한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은 분포로 보아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더 실린다.
모감주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우람한 모양새를 자랑할 만큼 커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크기로 자라고 단아하게 가지가 뻗은 모습이 고매한 학자풍의 나무다. 실제로 옛날 중국에서는 왕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에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주었는데,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모감주나무를 심게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잎, 황금 깃털처럼 솟아오른 금색 꽃, 열매가 맺을 무렵이면 루비 빛 또는 연노랑 단풍까지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그래서 갈수록 조경수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한방에서는 모감주나무 꽃잎을 말려두었다가 요도염, 장염, 치질, 안질 등에 쓴다고 알려져 있다.
98. 능소화
여름이 깊어 가는 계절에는 주변이 온통 초록의 바다가 된다. 늘 푸름도 너무 오래가면 조금은 신물이 나서 화사한 봄꽃의 색깔이 그리워진다. 이를 즈음 꽃이 귀한 여름날 아쉬움을 달래주는 능소화란 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고즈넉한 옛 시골 돌담은 물론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담, 붉은 벽돌담까지 담장이라면 가리지 않고 능소화의 잔치가 벌어진다. 담쟁이덩굴처럼 빨판이 나와 무엇이던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아름다운 꽃 세상을 연출한다. 가장자리가 톱날처럼 생긴 여러 개의 잎이 한 잎자루에 달려있고 회갈색의 줄기가 꿈틀 꿈틀 길게는 10여m이상씩 담장을 누비고 다니는 사이사이에 꽃이 얼굴을 내민다.
꽃은 그냥 주황색이라기보다 노랑 빛이 많이 들어간 붉은 빛이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 든다. 5개의 꽃잎이 얕게 갈라져 정면으로 보면 작은 나팔꽃 같다. 옆에서 보면 깔때기 모양의 기다란 꽃 통의 끝에 꽃잎이 붙어 있어서 마치 트럼펫 같다. 영어이름은‘Chinese trumpet creeper‘이다. 꽃이 질 때는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날아가 버리는 보통의 꽃과는 달리 동백꽃처럼 통 채로 떨어진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흔히 처녀꽃이란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꽃은 감질나게 한두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다.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붙어 한창 필 때는 잎이 찾아지지 않을 만큼이다. 한번 시작하면 거의 초가을까지 피고 지고 이어간다. 능소화(凌霄花)란 '하늘을 업신여기고 능가하는 꽃‘이란 의미가 들어있다. 헷갈리기 쉬운 가운데 자를 소(宵)로 써보면 밤을 능가하는 꽃이 된다. 한마디로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의 밝음은 물론 깜깜한 밤에도 화려한 꽃으로 주위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띠는 꽃이다.
중국의 시경(詩經) 소아(小雅)편에 소지화(笤之華)란 이름의 꽃나무를 능소화로 짐작한다. 그러니 적어도 3천 년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능소화는 시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짐작할 뿐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19C초 유희가 쓴 물명고(物名攷)에 보면 능소화는 자위(紫葳)라 하였으며 ‘야생의 덩굴나무로 영산홍과 같이 붉은 황색을 띠며 꽃에 작은 점이 있고 8월에 콩꼬투리 같은 열매가 달린다’는 기록이 있다. 아주 드물게나마 산속에서도 어쩌다 만날 수도 있다. 들어온 지가 오래된 식물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 자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 옮겨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동의보감에도 자위라 하였으며 줄기, 뿌리, 잎 모두 약제로 기록되어 있다. 처방을 보면 ‘몸 푼 뒤에 깨끗지 못하고 어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과 자궁출혈 및 대하를 낫게 하며 혈을 보하고 안태시키며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한다’는 내용이다. 부인병에 널리 쓰이는 한약제로 일찍부터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귀한 약나무에서 지금은 관상용, 간단히 말하면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기생나무로 타락한 셈이다.
원래 남부지방에 주로 심던 나무다. 하지만 옛날 보다 훨씬 따뜻해진 탓에 서울을 포함한 중부지방에서도 충분히 자라고 있다. 수술 끝에 달리는 꽃가루의 끝이 갈고리처럼 생겨서 눈에 들어가면 심한 통증을 가져온다고 한다.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겨울에 들어서서 잎이 지고나면 마치 가느다란 실을 세로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 같은 회갈색의 줄기가 특별히 눈에 띤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아도 고목줄기의 느낌을 준다. 능소화는 겨울 줄기가 볼품없고 앙상함이 아니라 나름대로 기품을 잃지 않는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능소화 외에 최근에 들여온 미국능소화가 심겨지고 있다. 꽃의 크기가 작고 꽃이 거의 밑으로 처지지 않으며 더 붉은 색을 띠는 것이 보통 능소화와 차이점이다.
99. 청미래덩굴(망개나무)
삼천리금수강산의 옛 사람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평평한 땅이 조금만 있으면 오순도순 모여 살았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을 것, 입을 것 서로 주고받아야 하니 더우나 추우나 산길을 수없이 넘어 다닌다. 청미래덩굴은 사람들이 잘 다니는 산속 오솔길 어디에서나 만나는 흔하디흔한 우리 산의 덩굴나무다. 청미래덩굴은 책에 쓰이는 공식 이름이고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 전라도에서는 맹감나무 혹은 명감나무다. 망개나무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어서 충북 및 경북 일부지방에 자라는 희귀수종 진짜 망개나무와 혼란을 일으킨다.
청미래덩굴의 잎은 젖살 오른 돌잡이 아이의 얼굴 마냥 잎은 둥글납작하고 표면에는 윤기가 자르르하다. 기다란 잎자루의 가운데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한 쌍의 덩굴손은 손끝에 닿는 대로 나무나 풀이나 닥치는 대로 붙잡고 '성님! 나도 같이 좀 삽시다'고 달라붙는다. 잡을 것이 없으면 끝이 도르르 감겨진다. 덩굴줄기를 여지저기로 뻗기 시작하면 고약한 버릇이 생긴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를 여기 저기 내밀어 자기 옆으로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 다니는 것을 훼방 놓는다. 나무꾼의 바짓가랑이를 찢어놓고 그도 모자라 속살까지 생채기를 만들어 놓는가하면, 친정나들이 아낙의 치맛자락을 갈기갈기 벌려놓는 심술을 피우기도 한다. 화가 난 사람들이 낫으로 싹둑 잘라 놓아도 되돌아서면 '약 오르지?'를 외치듯 새 덩굴을 잔뜩 펼쳐 놓는다. 청미래덩굴의 가시는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산속의 날쌘 돌이 원숭이도 꼼짝 못한다는 뜻으로 일본인들은 아예 '원숭이 잡는 덩굴(サルトリイバラ)'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미래덩굴은 이 처럼 몹쓸 식물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좋은 일도 많이 한다. 어린잎을 따다 나물로 먹기도 하며, 다 펼쳐진 잎은 특별한 용도가 있다. 잎으로 떡을 싸서 찌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쉬지 않으며 향기가 배어 독특한 맛이 난다.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시골장터에서 흔히 듣던 떡장수의 '망개- 떠억' 외침은 지나간 세대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망개떡은 청미래덩굴의 잎으로 싼 떡을 말한다.
줄기는 땅과 닿는 곳에서 바로 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처럼 땅속을 이리저리 뻗쳐나가는 땅속줄기(地下莖)를 갖는다. 굵고 울퉁불퉁하며 오래되면 목질화 된다. 마디마다 달려있는 수염 같은 것이 진짜 뿌리다. 뿌리 부분에 어떤 원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가끔 굵다란 혹이 생기는데, 토복령(土茯岺)이라 한다. 속에는 흰 가루 같은 전분이 들어 있어서 흉년에 대용식으로 먹기도 하였으며, 선유량(仙遺糧) 혹은 우여량(禹餘糧)이란 이름도 갖는다. 그외 주요한 쓰임새는 약재이다. 옛 사람들이 문란한 성생활로 매독에 걸리면 먼저 토복령 처방부터 시작하였다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하며 해독작용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봄의 끝자락에 이르면 잎겨드랑이 덩굴손의 옆에는 긴 꽃대가 올라와 우산모양 꽃차례를 펼친다. 노란빛이 들어간 풀색 꽃이 모여 피고 나면 초록색 동그란 열매가 달렸다가 가을에는 빨갛게 익는다. 다 익은 열매는 속에 황갈색의 씨앗과 주위에는 퍼석퍼석하게 말라버린 약간 달콤한 육질이 들어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옛 시골 아이들은 '망개 열매'가 신맛이 지독한 초록일 때부터 눈독을 들인다. 익은 열매는 그 쪼끔의 달콤한 맛을 보려고 오가며 가끔 입 속에 넣어본다. 항상 조금 더 맛있고 씹히는 부분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유년을 보낸 기억이 새롭다. 육질이 거의 메말라버린 열매는 덩굴에 매달린 채로 겨울을 넘겨 다음해 봄이 되어도 그대로다. 줄기의 뻗음이 멋스러워 꽃꽂이 재료로 우리들의 주변에서 만나기도 한다.
100. 오구나무(조구나무)
오구나무, 이 나무는 흔히 알려진 나무는 아니다. 중국 남부를 고향으로 하며 남부지방에 가로수로 어쩌다 심겨지는 나무라서다. 오구(烏桕)라는 중국이름을 그대로 따왔는데, 오(烏)를 조(鳥)로 잘못 읽어서 가끔은 조구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30년대에 처음 우리나라에 들여왔다고 하나, ‘물명고’라는 조선후기에 편찬한 사전에 오구목(烏臼木)으로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나무로 짐작된다. 오구나무의 씨는 목랍이라는 일종의 식물성 왁스로 덮여 있다. 이것으로 초와 비누를 만들 수 있으며 불을 밝히는 기름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영어명 'chinese tallow tree' 역시 많은 지방을 가지고 있는 나무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래서 난대에서 열대에 걸쳐 널리 재배되고 있는 자원식물이다. 우리나라에도 처음 들어올 때는 목랍을 얻기 위한 목적일 터이나 지금은 가로수나 공원에 심는 관상용나무가 되었다. 여름에 피는 노란 꽃과 가을에는 붉은 빛에 자주가 들어간 적자색의 단풍이 아름답다.
아름드리로 굵게 자라지는 않지만 높이 15m정도에 이르는 나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마름모꼴에서 삼각형이고 두꺼우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아이 손바닥 반 정도의 크지 않은 평범한 잎을 갖고 있다. 특징은 꽃에 있다. 6월에서 7월에 걸쳐서 손가락 길이보다 좀 긴 꼬리모양 꽃차례가 하늘을 향하여 꼿꼿이 선채로 일제히 올라온다. 위쪽은 대부분 수꽃이고 맨 아래에 몇 개의 암꽃이 붙어있다. 쳐다보다 얼핏 다가오는 느낌은 탱탱한 남성의 심벌과 쉽게 연결된다. 꽃대의 위쪽으로 뻗침이 힘차고 도발적이다. 1~2주 쯤 지나면서 수없이 붙어있던 작은 꽃들은 노랗게 피기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기세 좋게 하늘을 향하고 있던 꽃 꼬리들은 밑으로 쳐지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모든 나무가 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나무에 따라서는 끝까지 꼬부라지지 않는 꽃대도 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더 있다. 하나의 꼬리 꽃차례에서 수꽃과 암꽃의 피는 시기가 다른 것이다. 수꽃이 먼저피면 암꽃이 뒤에 핀다. 즉 웅화선숙(雄花先熟)이다. 반대로 피면 자화선숙(雌花先熟)이 된다. 나무 하나하나 마다 암꽃과 수꽃의 ‘선숙’이 다르다. 같은 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의 꽃가루받이를 하여 적어도 남매간 수정은 막겠다는 차원 높은 배려의 결과다. 오구나무의 영특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매수정을 막겠다고 이런 조치를 너무 철저히 하였을 때는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 나무 밖에 없거나 기타 여러 이유로 다른 나무 꽃가루받이가 불가능해지면 대가 끊기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암꽃과 수꽃을 동시에 피운다. 아쉬울 때는 조금 불량한 종자라도 만들어 두어서 적어도 대는 이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 식물이 하는 일이지만 어찌 보면 사람보다 더 영특한 것 같아 무섭기까지 하다.
열매는 녹색으로 시작하여 가을에 완전히 익으면 껍질이 말라 까맣게 되면서 안에서 하얀 종자가 3개씩이 얼굴을 내민다. 열매는 잘 떨어지지 않아 다음해에 다시 열매가 달릴 때까지도 오랫동안 남아있다. 나무 이름 오구(烏桕)에서 새 먹이통쯤으로 해석할 수 있듯이 새가 좋아하는 나무다. 종자는 겨울날 새들의 먹잇감으로 손색이 없어서다. 오구나무의 줄기와 뿌리껍질은 말려서 이뇨제로 쓰이고 종자는 기름을 짜서 피부병에 바르기도 하는 민간약이다. 종자 기름이나 수액은 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대극과의 사람주나무속(Sapium)에 들어가며,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서는 사람주나무가 꽃이나 열매의 모양이 오구나무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다.
101. 배롱나무(백일홍나무)
장마가 끝난 여름날의 햇살은 쇠뿔도 녹이려 드는 땡볕이라 한다. 봄부터 햇빛에 잘 구슬려진 푸른 나뭇잎마저도 축 늘어져 버리는 계절이다. 이를 즈음 여름 꽃의 대명사 배롱나무 꽃은 비로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식물학적인 공식 이름은 배롱나무,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은 백일홍(百日紅)나무다. 백일홍나무를 조금 빨리 부르면 배기롱나무가 되니 배롱나무의 어원은 결국 같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붉다는 뜻의 홍(紅)이 들어갔으니 진분홍 빛 꽃이 기본이고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다. 연보라 꽃도 가끔 있으며 흰 꽃은 비교적 드물다.
배롱나무는 콧대 높은 미인처럼 자못 고고하다. 다른 나무들과 섞여서 살아남겠다고 아우성대지 않는다. 조용한 산사(山寺)의 앞마당이나 이름난 정자의 뒤뜰 등 품위 있는 길지(吉地)에 사람이 심어 주어야만 비로소 자람을 시작한다. 가지의 끝마다 원뿔모양으로 마치 커다란 꽃 모자를 뒤집어 쓴 듯이 수많은 꽃이 핀다. 굵은 콩알만 한 꽃봉오리가 나무의 크기에 따라 수백 수천 개씩 매달려 꽃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살포시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바글바글 볶아놓은 파마머리 마냥 온통 주름투성이 꽃잎을 6-7개씩 내민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도 타고난 주름을 펴주기에는 역부족이라 주름꽃잎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배롱나무는 잠깐 피었다가 금세 져버리는 대부분의 꽃들과는 달리여름에 시작하면 가을이 무르익어 갈 때까지 계속하여 핀다. 대체로 백일 쯤 핀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란 이름이 붙었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풀 백일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과연 백일을 피어있는 것인가? ‘花無十日紅’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보통의 꽃은 피고 난 다음 열흘가기가 어렵다. 배롱나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꽃 하나하나가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다. 작은 꽃들의 피고 짐이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꼭 같은 꽃이 계속 피어있다는 착각으로 보일 따름이다. 먼저 핀 꽃이 져버리면 여럿으로 갈라진 꽃대의 아래에서 위로 뭉게구름이 솟아오르듯이 계속 꽃이 피어 올라간다.
원산지 중국에서는 연보라 빛 꽃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중국이름은 자미화(紫微花)이며 우리도 흔히 그대로 따랐다. 당나라 때는 중서성(中書省)에 많이 심어놓아 아예 자미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백거이를 비롯한 중국의 옛 문사(文士)들은 이 꽃을 두고 글을 쓰고 시를 읊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강희안의 양화소록, 충신 성삼문의 한시에도 등장한다. 처음 들어 올 때는 분명 보라 꽃 배롱나무가 많이 들어왔을 것인데, 지금은 왜 대부분 붉은 꽃 배롱나무인지는 불가사의다.
오늘날도 배롱나무 옛터의 명성을 잃지 않는 곳이 여럿 있다. 소쇄원, 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광주천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고창 선운사, 다산초당과 이어진 강진의 백련사,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경주 서출지(書出池) 방죽의 배롱나무 등은 아직도 꽃자랑이 대단하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 말고도 껍질의 유별남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끼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발바닥이나 겨드랑이의 맨살을 보면 간지럼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이 배롱나무 줄기를 보고 중국 사람들은 자미화 이외에, 파양수라 하여 간지럼에 부끄럽다고 몸을 비꼬는 모양과 비유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껍질의 매끄러움에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진다고 '원숭이 미끄럼 나무'로 이름을 붙였다.
102. 녹나무
이글거리는 열대의 햇빛 아래 짙푸름의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아름드리의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아열대의 대표적인 큰 나무가 녹나무다. 한자 이름은 장(樟)이며 예장(豫樟), 향장목(香樟木)으로 불리며 예부터 좋은 나무로 널리 이용되었다. 높이가 4~50미터, 지름은 장정 열 사람이 팔을 뻗어 맞잡아도 될 만큼 둘레가 15미터가 넘게 자란다. 세계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의 하나이다. 원래 자라는 곳은 열대와 아열대이며 일본이나 중국의 양자강 남부에 거대한 나무가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섬 지방은 녹나무가 자랄 수 있은 최북단 경계의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몇 아름씩 되는 큰 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녹나무는 크게 자라고 목재는 비교적 단단하며 물속에서 잘 썩지 않으므로 예부터 배를 만드는데 널리 쓰였다.1991년 진도 벽파리라는 옛 항구의 갯벌에서 길이가 19미터 중앙 지름이 자그마치 2.3미터나 되는 녹나무로 만든 송원대의 중국 통나무배가 발굴되었으며, 신안 앞 바다에서 인양된 같은 시기의 무역선에서도 선체의 격벽(隔璧)이 녹나무이었다.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에 보면 그들의 잡다한 시조(始祖) 신의 한 사람인 스사노 오노미고도는 신체 각 부위의 털을 뽑아 여러 가지 나무를 만들었는데, 눈썹의 털로 녹나무를 만들고 배를 만드는데 쓰라고 하였다. 녹나무 자원이 많은 탓도 있겠으나 그래서 일본인들은 선박에는 물론 여러 용도로 쓴다. 그들이 자랑하는 백제관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불상은 녹나무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체적인 선박재로 사용한 예는 없으나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 전함의 외판을 보강하기 위한 재료로는 녹나무가 가장 적당하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2004년 경남 창녕에서 발굴된 6C경 가야고분의 목관이 녹나무였다. 일부에서는 무덤의 주인이 평소 배로 타고 다니다가 죽어서 관으로 재활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관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겨서 이다. 녹나무는 배를 만드는 데 이외에도 여러 쓰임새가 있다. 고려 원종 14년(1273) 원나라에서 황제의 용상을 만들 향장목(香樟木)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10여년 뒤인 충렬왕 9년(1283)에는 특별히 탐라도의 향장목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다. 유럽까지 정벌하여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만들었던 원나라 임금의 용상을 만든 재료가 될 만큼 녹나무는 우량재이다. 나무속에는 장뇌향(樟腦香, Camphor)이라는 일종의 방충제를 함유하고 있어서 녹나무로 만든 옷장은 좀이 옷을 갉아먹지 않으므로, 예부터 고급 가구재로도 쓰였다. 또 흔히 우리가 캄폴 주사를 떠올리듯이 의약용으로는 강심제로 쓰이고 무연화약의 제조 등 공업원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에서의 복숭아나무와 마찬가지로 녹나무를 집안에 심지 않는 풍습이 전해온다. 녹나무가 있으면 귀신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또 녹나무 잎은 예로부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갑자기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녹나무 잎이 깔린 온돌방에 눕히고 불을 지핀다. 강심제로 쓰이는 장뇌가 나와 환자에게 충격을 주므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긴 타원형인데 윤기가 있고 두꺼우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거나 희미한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어린 가지는 황록색이고 윤기가 자르르하며 어긋나기로 달린다. 어릴 때는 붉은 빛이 돌므로 봄부터 여름까지 전체가 특이한 붉은 빛으로 보인다. 잎맥은 아래쪽의 3개가 가장 뚜렷하게 보이고 뒷면은 약간 희끗희끗하다. 열매는 콩알 크기 남짓하고 처음에는 초록색으로 달려 있다가 가을이 되면 흑자색으로 익는다.
103. 칠엽수(마로니에)
칠엽수의 또 다른 이름 마로니에(marronnier)는 바로 불란서를 연상한다. 파리 북부의 몽마르트 언덕과 세느강의 북쪽 강가를 따라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 낙원의 들판이라는 뜻의 샹젤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가로수는 파리의 명물이다. 그래서 칠엽수(七葉樹)란 이름은 어쩐지 촌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마로니에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엄밀한 의미의 마로니에는 유럽을 고향으로 한 유럽마로니에를 말하고, 칠엽수란 일본 원산의 일본마로니에를 가리킨다. 그러나 수만리 떨어져 자란 두 나무지만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여 서로를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굳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마로니에는 잎 뒷면에 털이 거의 없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가시처럼 발달해 있는 반면에 칠엽수는 잎 뒷면에 적갈색의 털이 있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있으나 가시처럼 되지는 안는다.
긴 잎자루의 끝에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처럼 7개의 잎이 달리므로 칠엽수란 이름이 생겼다. 가운데 잎이 가장 크고 옆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 둥글게 모인다. 길이가 한 뼘 반, 너비가 반 뼘이나 되며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든다.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역시 한 뼘 정도 되는 커다란 원뿔모양의 꽃차례가 나오며, 꽃대 1개에 100~300개의 작은 꽃이 모여 핀다. 질이 좋은 꿀이 많으므로 원산지에서는 꿀을 생산하는 밀원식물로도 각광을 받는다. 가을에는 표면에 혹 같은 돌기가 있고 크기가 탁구공만 한 열매가 달리며 3개로 갈라져 한두 개의 갈색 둥근 종자가 나온다.
이 열매는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치질․자궁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응용범위가 더욱 넓어져서 동맥경화증, 종창(腫脹) 등의 치료와 예방에도 쓰인다한다. 생김새가 밤처럼 생겨서 먹음직해 보이나 독을 가지고 있으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열매의 영어이름은 horse chestnut, 즉 말 밤이란 뜻이다. 이 나무의 원산지인 페르시아에서 말이 숨이 차서 헐떡일 때 치료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와, 잎이 가지에 붙었던 자리(葉痕)가 말발굽 모양이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느낌은 아무래도 굵은 열매를 보고 붙였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지름이 두 아름정도로 자랄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란다. 나무속은 연한 황갈색으로 가볍고 부드러우면 작은 물관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 마로니에가 들어온 것은 20C초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한 것을 덕수궁 뒤편에 심은 것이 처음이며, 지금은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고 있다.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는 마로니에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가면서 이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고 동숭동의 대학로 일대는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시원시원한 잎, 마로니에라는 낭만적인 이름에다 서양인들은 그들의 샹송에도 나올 만큼 좋아하는 나무다. 서양문화에 쉽게 가까이 가있는 우리도 가로수, 공원 등에 널리 심고 있다. 그 도가 지나쳐 민속촌에서 촬영한 역사극에 마로니에가 용인 민속촌의 한 초가 옆에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는 어울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의 역사성도 고증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TV사극에 서양 사람이 임금으로 분장하여 나온다면 온통 난리가 나겠지만, 수입나무든 우리나무든 나무는 나무로 보면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104. 무화과나무
보리수가 부처님에 관련된 나무이듯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과 관련된 나무다. 성경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자기도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라는 창세기의 구절이 있다. 성경의 나무를 조사한 분들은 60여 회나 무화과나무가 등장한다고 한다.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정말 꽃이 없이 열매가 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화과는 꽃이 없이도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만고의 진리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꽃이 필 때 꽃받침과 꽃자루가 길쭉한 주머니처럼 비대해 지면서 수많은 작은 꽃들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꼭대기만 조금 열려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자기네들끼리만 은밀하게 이루어져 수정이 되고 깨알 같은 씨가 생긴다. 사람들이 주머니 꼭대기의 작은 구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꽃이 피는 것을 보지도 못하였는데 어느 날 열매가 익기 때문에 그만 꽃 없는 과일이 되어 버렸다. 들어온 시기는 1920년대라는 설도 있으나 그 보다는 훨씬 앞선다고 생각한다. 중종 때인 1521-67년 사이에 간행된 식물본초(植物本草)에 무화과가 등장한다하며 꽃이 피지 않은 과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동의보감에도 무화과는‘꽃이 없이 열매가 열리는데 그 빛이 푸른 자두 같으면서 좀 길쭉하다. 맛이 달고 음식을 잘 먹게 하며 설사를 멎게 한다’고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시기가 13C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니 우리나라에는 조선조 초에 중국을 통하여 들여온 것으로 생각된다.
70년대 암울하던 독재시절,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 등으로 용감하게 정권에 맞섰던 시인 김지하는 ‘무화과’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토한 뒤 눈물 닦고 코풀고 나서/우러른 잿빛 하늘/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이봐/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어떤가/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이것 봐/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그게 무화과가 아닌가/어떤가/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비틀거리며 걷는다/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개굴창을 가로 지른다’
문학평론가로 90년에 작고한 김현은 ‘내 마음의 움직임과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한 시인이 '수정의 메아리'라고 부른 수면의 파문처럼 겹쳐 떨린다. 나는 최근에 그런 떨림을 느끼게 한 한편의 시를 읽었다.’다고 이 시를 극찬해 마지않았다.
지중해 연안이 고향이고 이란 이락을 비롯한 중동지방에 예부터 재배하였다. 우리나라는 남해안의 따뜻한 지방에서 충청도까지 자랄 수 있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과일나무다. 나무껍질은 연한 잿빛으로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변하고 많은 가지가 나온다. 잎은 양손을 펴서 합친 만큼이나 크고 넘는 넓은 달걀모양이다. 어긋나기로 달리고 3~5개로 깊게 갈라진다. 열매는 8~9월에 흑자색 및 황록색으로 익는다.
열매는 1년에 두 번 달리기고 하는데 가을에 다시 달리는 열매는 크기고 작고 맛도 덜하다. 전라남도 남서 해안에 과일을 생식하거나 잼으로 만들기 위하여 많이 재배하고 있다. 열매는 작은 달걀크기이나 요즈음 개량종이란 이름으로 거의 주먹만 한 것이 시장에 나온다. 달큼하며 아삭아삭 씹히는 씨앗이 이 과일의 매력 포인트다. 그러나 거의 보관성이 거의 없어서 유통에 한계가 있다.
105. 개오동나무
본래의 나무보다 격이 떨어지거나 비슷하기는 하나 다른 나무일 때 흔히 ‘개’자를 앞에 붙인다. 개머루, 개다래, 개산초, 개벚나무, 개살구나무, 개박달나무, 개비자나무, 개서어나무, 개옻나무 등 잠깐 생각해 보아도 개가 들어간 나무는 10여 가지가 넘는다. 개오동나무는 잎이 오동나무 잎처럼 크고 꽃마저 닮았으니 오동나무와 무슨 ‘깊은 사연’이 있지 않나 오해를 살만도 한데 사실은 오동나무 가(家)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오동나무보다 못한 나무, 오동나무처럼 생겼으나 아닌 나무라고 알려진 것 자체가 개오동나무로 볼 때는 개자를 머리에 뒤집어 쓴 만큼 억울한 노릇이다.
한자 이름은 재(梓) 혹은 목각두(木角豆), 때로는 추(楸)라고도 하는데 재와 추는 가래나무를 나타낼 때도 있다. 북한 이름은 향오동나무이다. 본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오동나무이었는데, 92년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이 ‘향기가 좋고 모양도 아름다운 나무를 왜 하필이면 개오동으로 부르는가?’ 앞으로는 향오동나무로 부르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한다. 이후 북한의 나무이름에는 개가 접두어로 붙은 나무는 모두 바뀌었다. 개나리만 그대로다. 아마 개나리의 ‘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와 달리 해석한 것 같다.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북 청송에 천연기념물 401호 개오동나무는 300년도 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에 도입된 것을 짐작한다. 중국 원산으로 중부 이남에 심고 있는 낙엽활엽수로서 키가 20m, 지름이 한두 아름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뭇가지가 굵고 수가 적으므로 겨울에 보면 좀 엉성해 보이고 작은 가지에는 잔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잎은 마주나거나 돌려나고 넓은 타원형으로 어른의 손바닥을 완전히 편만큼이나 넓다. 대개 3~5갈래로 얕게 갈라지고 갈라진 조각은 끝이 뾰족하다.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가지 끝의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넓은 깔때기모양의 꽃이 여러 개 달린다. 꽃은 연한 황색이고 안쪽에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으며 끝이 얕게 5개로 갈라지고 가장자리는 물결모양으로 주름이 잡힌다.
꽃이 진 다음 바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데, 굵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땅을 향하여 무한정 길어지기만 한다. 그것도 하나씩이 아니라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지름이 딱 연필 굵기만 하고 길이는 한 뼘이 넘는다. 때로는 두 뼘, 세 뼘(60cm)에 이르기도 하여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열매이다. 삭과의 한 종류인데 다이어트에 생명을 거는 아가씨들이 부러워할 ‘빼빼로‘이다. 빼빼 열매는 다음 해에 다시 꽃이 필 때까지도 달려있어서 겨울에도 개오동나무는 금세 알아 볼 수 있다. 긴 열매가 길이로 갈라지면서 명주 같은 털을 단 종자가 나온다. 열매는 이뇨제로서 신장염. 부종. 단백뇨 등에 쓰인다. 아울러서 나무의 속껍질은 신경통. 간염. 황달. 신장염 등 각종 염증약으로 처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개오동나무는 자람이 빨라 목재는 가볍고 연하다. 그러나 큰 물관세포가 나이테의 한쪽에 몰려 분포하는 환공재(環孔材)이므로 무늬가 아름답다. 오동나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중국에서 들어온 개오동나무 외에 1905년 평북 선천에 있던 선교사가 미국에서 들여온 미국 개오동나무를 우리는 꽃개오동나무라 한다. 두 수종 모두 모양이 매우 비슷하나 꽃개오동나무는 잎이 갈라지지 않고 꽃이 흰색이며 종 모양의 꽃 안쪽에 2개의 황색 선과 자갈색 반점이 있다.
106. 칡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두고두고 충절을 굽히지 않는 정몽주에게 태조 이방원이 던진 시한 수다. 만수산 칡넝쿨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듯이 풍진 한 세상 별스럽게 굴지 말고 서로 협조하여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이 시는 오늘날도 적당히 부정하여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다 같이 나쁜 짓 하자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칡의 생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착각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칡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살지 않는다.
콩과식물에 들어가는 칡은 아무 곳이나 잘 자라고, 생명력이 왕성하여 숲 속에 웬만한 틈만 보이면 얼른 자리를 잡고 나서는 것부터 문제다. 일단 터만 잡으면 하는 짓마다 망나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웃 나무줄기를 빙글빙글 감고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간다. 광합성을 위하여 피나는 경쟁으로 확보해 놓은 공간을 몽땅 점령해 버린다. 조금의 나눔도 없이 혼자 전부를 갖겠다는 놀부의 심통보가 들어있다. 넓적한 잎을 수 없이 펼쳐 단 한 줄의 햇빛도 들어가지 못하게 거의 완전히 광선차단을 해버린다. 당한 나무는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린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트리는 주범이 칡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숲의 가장자리 나무들을 이 녀석이 몽땅 뒤덮어 버린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칡을 일일이 캐내어야 한다. 죽이는 약제도 있지만 돈도 많이 들고 효과도 절대적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다. 시골길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전선을 얼기설기 엮어놓는다. 비 오는 날 전기합선을 일으키는 못된 짓을 서슴없이 한다. 고육지책으로 전봇대를 지탱하는 철사 줄에 커다란 고깔모자를 뒤집어 쉬워 못 올라가게 하는 수고를 끼치게도 한다. 오늘날 칡은 나무 키우는 일에 매진하는 삼림공무원에게나 한국전력회사의 직원에게나 악명 높은 훼방꾼일 따름이다. 말 그대로 ‘칡과의 전쟁’을 벌리고 있으나 워낙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녀석이라 언제나 사람이 약세다.
그러나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잎,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다.
질긴 껍질을 가진 칡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고, 크게는 다리와 배를 만들고 성을 쌓은 데도 활용된 예가 있다. 세종15년(1433) 정흠지는 다리를 만드는 데에는 갈대와 칡을 많이 쓰며, 숙종37년(1711) 북한산의 축성을 논의하면서 ‘성을 쌓는 역사를 할 때에 숯과 칡 등을 수납하였다‘한다. 정조17년(1793) 배다리를 놓은 방법으로 ’두 배의 종보 머리를 서로 마주 잇닿게 하고 말뚝을 마주 세워 박은 다음 칡 밧줄로 야무지게 묶는다‘고 하였다. 나라를 지키는 군수물자로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기타 임금이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을 때 상복의 허리띠는 다듬어진 칡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전국 어디거나 양지바른 곳이면 잘 자라는 덩굴나무이다. 줄기는 흑갈색인데, 갈색 또는 흰빛의 털로 덮여있다. 잎은 3개씩 나오고, 각 각의 잎은 달걀모양으로 어른 손바닥을 편만큼이나 크다.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얕게 셋으로 갈라지고 잎자루가 길고 털이 있다. 원뿔모양의 꽃차례가 잎겨드랑이에서 나서 곧추서고 짧은 꽃자루가 있는 많은 꽃이 달린다. 꽃은 8월에 붉은 보랏빛으로 핀다. 열매는 길이 5~10cm의 콩꼬투리로서 갈색의 거친 털로 덮여 있고 가을에 익는다.
107. 치자나무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 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있는 네 모습/...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는가‘
청마 유치환의 ‘치자 꽃‘이란 시의 일부다.
으스름의 치자 꽃은 새하얗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살짝 우유 빛이 들어간 도톰한 꽃이 6장의 꽃잎을 달고 있어서 마치 예쁜 아기 풍차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순백의 순수함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꽃은 아니다. 새치름한 눈매에서도 가버린 이에 대한 아쉬움을 찾아낼 수 있는 소복의 여인 마냥, 언제까지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 노오란 꽃술 무더기에서 퍼져 나와 코끝을 살짝 스칠 때 느껴지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더더욱 기다리는 이를 감질나게 하는 꽃이다.
치자(梔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불가에서는 흔히 담복(薝蔔)으로 쓴다. 영어로는 ‘Cape jasmine’이라 하는데, 재스민과 비유할 만큼 향이 진하기 때문이다. 유마대사가 대승의 진리를 설명한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치자나무 숲에 들어가면 치자 향기만 가득하여 다른 향기는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강희안은 그의 원예전서 양화소록에서, 치자는 꽃 가운데 가장 귀한 꽃이며 4가지 이점이 있다고 하였다. 꽃 색깔이 희고 기름진 것이 첫째이고 꽃향기가 맑고 풍부한 것이 둘째이다. 겨울에도 잎이 변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열매로 황색 물을 들이는 것이 넷째라고 하여 치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꽃이 지고나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치자나무는 이런 아픔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듯, 쓰임새가 무궁무진한 열매를 매달아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 놓았다. 붙잡아 놓았다. 치자 열매에는 크로신과 크로세틴이라는 황색색소를 가지고 있어서 천연염료로 먼 옛날부터 널리 쓰여 왔다. 열매를 깨뜨려 물에 담가두면 노란 치자 물이 우러나온다. 농도가 짙을수록 노란빛에 붉은 기운이 들어간 주황색이 된다. 삼배 모시 등의 옷감에서 종이까지 옛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었다. 걸핏하면 발암물질이 들었다고 난리가 나는 지금의 인공색소와는 다르다. 그래서 무공해 천연색소의 으뜸자리에 있다. 옛날에는 각종 전(煎) 등 전통 식품의 색깔을 내는데 빠질 수 없는 재료였다.
열매의 또 다른 쓰임새는 한약제다. 동의보감에 ‘가슴과 대장과 소장에 있는 심한 열과 위 안에 있는 열기, 그리고 속이 답답한 것을 낫게 한다. 열독을 없애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하고 황달을 낫게 하며 소갈을 멎게 하며 입안이 마르고 눈에 피서며 붓고 아픈 것도 낫게 한다.’고 소개할 정도다.
치자는 중국원산의 나무다. 삼국유사 탑상 제4의 만불산 이야기에 담복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적어도 삼국시대에 우리 곁에 자리 잡은 셈이다. 늘 푸른 나무로서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주로 남해안과 도서지방에 심어야 잘 자라며 기껏 높이 2~3m정도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긴 타원형이고 표면이 반질반질하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흰빛으로 피어 짙은 향기를 풍긴다. 열매는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정도의 긴 타원형이고 세로로 6~7개의 능선이 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주황색으로 익는다.
치자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꽃이 작고 꽃잎이 만첩의 여러 겹으로 된 것을 꽃치자라고 한다. 향기가 너무 강하여 가까이서 맡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은은한 향을 즐기려면 홑꽃을 달고 있는 치자를 심는 것이 좋다.
108. 플라타너스(버즘나무)
버즘나무는 플라타너스(platanus)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1910년경 수입한 나무다.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서양나무로 알았는데, 머나먼 옛날에는 우리 땅에도 버즘나무가 자랐다. 경희대 공우석교수에 따르면 중생대 백악기 층에서 버즘나무 화석이 발견된다고 한다.
공해에 강하여 자동차 매연이 심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넓적한 잎은 시끄러운 소리를 줄여주는 방음나무의 역할과 함께 한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가려줌으로 가로수로 제격이다. 그래서 벌써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서 버즘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고 한다. 지금은 영국의 런던을 비롯한 세계의 이름난 대도시 가로수에 버즘나무는 빠지지 않는다. 한때 잎 뒤에 난 털이 기관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말썽이 되기도 했고, 아주 최근에는 이소프렌이란 물질을 많이 배출하여 공기 중의 오존을 증가시킨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일부학자들의 주장일 뿐, 넓은 잎은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다른 어떤 나무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버즘나무란 이름에 대하여 말이 많다. 가난하던 60년대의 어린이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다. 영양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흔히 마른버짐(버즘)이 얼룩덜룩 생긴 경우가 흔하였다. 버즘나무 껍질은 갈색으로 갈라져 큼지막한 비늘처럼 떨어지고, 자국은 회갈색으로 남는다. 마치 버짐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 이름을 붙일 때 버즘나무라고 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에델바이스니 물망초니 하며 낭만적인 식물이름이 많다. 우리는 하필이면 아름다운 나무에 지저분한 피부병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냐고 사람들은 불평한다. 차라리 영어이름 그대로 플라타너스가 오히려 낫다고 하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나무 껍질의 특징으로 나무를 보지 않았다. 낙엽 진 겨울날 기다란 끈에 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그란 열매를 보고‘방울나무’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버즘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이므로 세월이 지나면 가로수로서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가을이면 마치 몽둥이를 세워 놓은 것처럼 일정한 높이로 잘라 버린다. 겨울의 을씨년스런 풍경과 함께 삭막하고 섬직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흔히 보는 몽당비 버즘나무와는 달리, 경북고속도로 청주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국도에는 가지를 잘라내지 않은 양버즘나무가 터널을 만들어 놓아 여름 내내 시원함을 더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를 고향으로 하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원산지에서는 지름이 몇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잎은 손바닥 넓이만큼 크며 꼭지 쪽이 3~5개로 갈라지고 잎자루는 반 뼘이나 될 만큼 길다. 잎자루와 나뭇가지가 붙은 자리에는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작디작은 잎(탁엽)이 또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암꽃과 수꽃이 5월경 한 나무에 피며 암꽃은 가지의 꼭대기에 달린다. 열매는 기다란 대궁에 1개씩 달리며 뽕나무의 오디처럼 생긴 종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탁구공 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10월이면 익어서 이듬해 봄까지 나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흔히 버즘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에는 진짜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 및 단풍버즘나무의 3종류가 있다. 버즘나무는 열매가 한 대궁에 2~3 달리고 잎이 깊게 갈라지는 것이며, 양버즘나무는 한 대궁에 열매가 1개씩 달리고 잎이 깊게 패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만나는 것은 거의 모두가 양버즘나무다. 단풍버즘나무는 이름 그대로 잎 모양이 단풍처럼 생겼다.
109. 음나무(엄나무)
생물사회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전쟁터다. 크게 자라는 나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음나무는 이른 봄날 초식동물이 좋아하는 부드럽고 쌉쌀한 새싹을 내민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남아 날 수가 없다. 특별 보호 대책으로 음나무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지를 촘촘히 완전히 둘러싼다. 감히 범접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현상을 이런 가시가 어릴 때만 갖고 있다. 나무가 자라 굵기가 굵어지면 차츰 차츰 가시는 없어진다. 큰 나무 꼭대기 까지 올라올 녀석들이 없기 때문이다. 엄나무라고도 한다. 가시가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엄나무가 특징을 더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음나무는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처럼 생긴 커다란 잎이 특징이다. 언뜻 봐서는 고로쇠나무의 잎과 헷갈린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오동나무 잎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다 가시가 있다는 뜻으로 자동(刺桐)이라 하였다. 다른 이름 해동목(海桐木)도 역시 오동나무 잎과 비유한 이름이다. 그 외 개두릅나무라고도 한다. 봄에 새싹이 돋아 날 때 두릅나무처럼 음나무의 새순은 식도락가의 입맛을 돋우는 나물로 각광을 받는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흔히 가시가 듬성듬성한 음나무 가지를 문설주 위에다 가로 걸쳐놓은 관습이 있었다. 잡귀의 들락거림을 막기 위함이다. 귀신도 갓 쓰고 도포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조선조의 전형적인 양반 차림이라면 음나무 가시에 펄렁이는 도포자락이 쉽게 걸리기 마련이다. 귀신이 귀찮아서도 들어오지 않을 터이다.
음나무 껍질은 해동피(海桐皮)라 하여 알려진 한약제이다. 고려 문종 33년(1079) 가을 송나라에서 백 가지의 약품을 보내왔는데 여기에도 음나무 껍질은 포함되어 있다. 세종지리지에는 전라도, 제주목, 평안도의 토산물로 되어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에 보면 ‘허리와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과 마비되고 아픈 것을 낫게 한다. 이질, 곽란, 옴, 버짐, 치통 및 눈에 핏발이 선 것 등을 낫게 하며 풍증을 없앤다’고 하였다. 그 외 민간약으로도 음나무는 널리 쓰이는 약나무이다. 그래서 옻닭을 먹듯이 ‘엄닭’도 한 여름의 보양 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쁜 귀신을 몰아내는 나무이면서 여러 가지 약제로 귀히 여겨온 음나무는 행운을 가져오는 길상목(吉祥木)으로도 알려졌다. 그래서 집안에 음나무 연리목(連理木)을 만들어 두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만복이 깃든다고 한다. 만들기는 간단하다. 4~5년 생 정도의 어린 음나무 두 그루를 구하여 한 걸음 정도 떨어지게 심는다. 뿌리가 완전히 내린 다음, 두 나무의 껍질을 약간 긁어내고 탄력성이 있는 튼튼한 비닐 끈으로 묶어두면 두 나무가 한 나무되는 연리목이 만들어진다.
음나무의 목재는 황갈색을 띠면서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있어서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나이테를 따라 커다란 물관이 딱 한 줄로 분포한다. 다른 어느 나무와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음나무만의 특징이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지도 오동나무처럼 너무 무르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를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무늬마저 있다. 가구를 만드는 재료나 조각, 악기 등 쓰임새가 고급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로서 지름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다. 어릴 때 자람이 빨라 숲에서 우선 높이 생장부터 먼저 하므로 다른 나무 보다 우뚝 올라온 경우가 많다. 광합성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겠다는 계략이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불규칙하게 세로로 갈라진다. 어릴 때는 가시가 촘촘하게 달리나 직경이 커지면 차츰 가시가 없어진다. 암수 한 나무이고 7~8월에 걸쳐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수 없이 달린다. 꽃에는 많은 꿀을 함유하고 있어서 토종꿀 따는 나무로 심기도 한다. 열매는 10월에 콩알처럼 검게 익는다.
110. 느티나무
나지막한 동산을 뒤에 두르고 널찍한 들판을 내려다보는 곳, 시골 마을 어귀에 서있는 아름드리 고목나무 한 그루는 서정적인 우리 농촌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불리는 이런 나무의 대부분은 느티나무가 차지한다. 아늑한 그의 품안은 뙤약볕 여름농사에 지친 농민들의 안식처이며,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여론광장이 되기도 한다.
느티나무는 위로는 임금님의 산림 집 궁궐에서,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활 터전에 까지 심고 가꾸는데 낯가림이 없다. 모두를 다 함께 편안하게 보듬어 주는 넉넉하고 편안한 나무다. 아름드리 굵기에 이야기꺼리라도 얽혀있는 느티나무라면 짧게는 조선왕조, 길게는 고려나 신라인과 삶을 같이 해온 역사속의 나무다. 긴긴 세월을 이어 오면서 맞닥뜨린 민족의 비극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오면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 없이 많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는 술에 취하여 잔디밭에 잠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는 '개나무'란 이름의 느티나무가 있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현고수(懸鼓樹)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당산 지킴이로서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나무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은 쓰임새가 너무 많아서이다. 목재는 나무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무늬도 아름답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다.
흔히 보는 당산나무처럼 가지만 잔뜩 뻗고 키 크기를 게을리 하는 나무를 느티나무의 참모습으로 알았다면 큰 착각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랄 때는 곧바르고 우람한 덩치로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두세 아름은 보통이다. 그래서 과거는 화려하다.
경산 임당의 원삼국시대 고분과 부산 복현동 가야고분 및 천마총 관재로도 쓰였다. 죽어서 임금님의 시신을 감싸고 영생의 길을 함께한 영광의 나무였던 셈이다. 또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 화물운반선의 배 밑바닥 판자 등에도 느티나무가 들어있다. 건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시(행사 때 쓰는 큰 나무 밥통), 절의 기둥, 나무 불상도 현미경 검사를 해본 결과 상당부분 느티나무였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흔히 나무로 가꾸어진 우리문화를 말할 때 거리낌이 없이 ‘소나무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옛 사람들의 나무쓰임에서 알아 본 것처럼 삼국시대로 올라가면, 우리의 나무 문화는 ‘느티나무 문화‘이었다. 사실 소나무가 민족의 나무로 우리 주변을 차지하게 된 것은 내우외환으로 국토가 황폐해 지면서다. 몽고 침입이후 고려 말에 걸쳐 사회적인 혼란으로 산림이 자꾸 파괴되자, 척박한 땅에서도 자랄 수 있고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가 득세한 것이다. 대체로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산에는 소나무가 점점 많아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느티나무와 참나무를 중심으로 한 활엽수가 우리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11. 팽나무
가난하던 시절의 시골아이들은 놀이터와 장난감이 따로 없었다. 주위의 모두가 놀이터고 장난감 재료일 뿐, 팽나무는 아이들과 친근한 나무였다. 초여름이면 콩알만 한 굵기에 약간의 탄력을 가진 파란 열매가 장난감으로 개발되었다. 열매를 따다가 작은 대나무 대롱의 아래위로 한 알씩 밀어 넣은 다음, 위에다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오른손으로 탁 치면 공기 압축으로 아래쪽의 팽나무 열매는 팽-하고 멀리 날아가게 된다. '팽총'이라고 하는데, 이때 ‘팽‘이 매달리는 나무란 뜻으로 팽나무란 이름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팽나무에서 오는 느낌은 한번 쓰고 버린다는 어감이 강하다. 날랜 토끼가 잡히고 나면 부리던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의 ’팽‘에 연관 지워지는 것이다. 한때 우리의 정치현실과도 맞아 떨어져 권력에서 밀려나기만 하면 흔히 '팽'당했다는 말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팽나무는 오래 살고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고 가지를 많이 뻗어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펼친다. 그래서 느티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농사일에 지친 사람들의 쉼터인 당산나무로 유명하다. 자연히 나무의 자람 상태를 보고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나무이기도 했다. 봄에 일제히 잎이 피거나 위 부분이 먼저 싹이 틀 때가 풍년이며, 그 반대일 때는 흉년이라는 등 기상목(氣象木)의 역할을 했다.
늦봄에 자그마한 팽나무 꽃이 지고 나면 금세 초록색 열매가 달리고 가을에 가서는 붉은 끼가 도는 황색으로 익는다. 가운데에 단단한 핵이 있고 주위에 약간 달콤한 육질로 싸여 있다. 이렇게 잘 익은 열매는 배고픈 시골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학명 ‘Celtis sinensis’에서 앞부분은 달콤한 열매가 달리는 나무란 뜻의 희랍어에서 온 것이며 뒷부분은 중국이란 뜻이다. 팽나무는 이렇듯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을 고향으로 하는 동양의 나무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특히 바닷가에서 항상 소금바람이 부는 곳에도 끄떡없다. 그것도 두툼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이 되어도 울퉁불퉁하게 갈라지지 않는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갖고 그대로 버틴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 부르는 팽나무의 이름은 포구나무다. 배가 들락거리는 갯마을, 포구(浦口)에는 어김없이 팽나무 한 두 그루가 서 있는 탓이다. 나무의 특성은 물론 자라는 곳을 그림처럼 떠 올릴 수 있는 포구나무란 이름이 팽나무란 정식 이름보다 훨씬 더 정겹다. 팽나무는 곰솔과 함께 짠물과 갯바람을 싫어하지 않는 내염성(耐鹽性)이 강한 나무로 유명하다. 바닷가에 심고 가꾸는데 가장 적합한 나무이다.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 넓은 평야 가운데에는 내륙지방으로는 드물게 팽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김 아무개, 박아무개 하듯이 황목근(黃木根)이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1948년 마을기금을 털어 827평의 논을 그 앞으로 등기해 주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이 팽나무는 연한 황색 꽃이 피고 가을에는 노란 단풍이 들므로 '황'이란 성을 따고, 나무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작년에는 1만440원씩의 종합토지소득세를 부과하였는데, 한 번도 지방세를 체납하지 않은 모범납세자(?)라 한다. 예천군에는 황목근 말고도 석송령이라는 세금을 내는 소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팽나무 무리는 풍게나무, 검팽나무, 폭나무, 산팽나무 등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할 만큼 종류가 많다. 또 남.서해 안의 따뜻한 지방에 자라는 푸조나무도 팽나무의 사촌쯤 되는 나무로서 흔히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된다.
112. 소태나무
음식의 간이 맞지 않아 너무 짜거나 쓴맛이 나면 흔히 소태맛이라고 한다. 알려진 그대로 소태나무는 지독한 쓴맛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과 수목채집을 가면 소태나무만은 그냥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처음 나무 공부를 할 때 선생님한테 배운 방법을 그대로 쓴다. 나란히 붙어 있는 잎을 하나씩 따서 나누어주고 어금니로 꼭꼭 씹어보라고 한다. 눈치 빠른 학생들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앞니로 조금씩 깨물어 본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 말 그대로 했다가 "애 퉤퉤!"하고 온통 난리가 난다. 이때 즈음 비로소 '이게 바로 소태나무'라고 일러준다. 아무리 물로 헹궈도 1~2시간은 족히 잎 속에 쓴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한번 그 ‘쓴맛’을 보게 되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나무다. 아울러서 긴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태맛을 볼 때가 한 두 번은 꼭 있다는 것도 강조한다. 쓴맛을 알아야 진정한 단맛도 알 수 있다.
쓴맛의 근원은 콰신(quassin) 혹은 콰시아(quassia)라고 부르는 물질 때문이다. 잎, 나무껍질, 줄기, 뿌리 등 소태나무의 각 부분에 고루 고루 들어 있으나 줄기나 가지의 안 껍질이 가장 많다. 콰신은 위장을 튼튼히 하는 약제, 살충제, 또는 염료로도 사용하였으며 맥주의 쓴맛을 내는 호프대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아이 젖을 뗄 때도 이용하였다. 동생을 보고도 좀처럼 젖이 떨어지지 않은 아이가 있다. 엄마는 소태나무로 즙을 내어 젖꼭지에 발라둔다. 사생결단 엄마 젖에 매달리던 녀석도 소태맛에 놀라 젖꼭지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 전만 하여도 도시의 엄마들은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키니네나 심지어 마이신까지 사용하였다. 소태나무 즙은 아이에게 해롭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위장을 튼튼하게 까지 하니 그야 말로 일석이조이다. 본초도감에는 봄, 가을에 채취하여 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위장염에 쓰거나 화농, 습진, 화상을 비롯하여 회충구제에도 쓰인다고 하였다. 민간약으로 건위제, 소화불량, 위염 및 식욕부진 등 주로 위장을 다스리는 약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소태나무는 우리 주변에도 비교적 흔한 나무로서 소태골, 소태리 등의 지명이 들어간 지역은 소태나무가 많이 자랐던 지역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라며 한때 껍질을 벗겨 섬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위에 큰 나무를 보기가 어렵다. 소태나무로서는 유일하게 안동시 길안면 송사동 길안초등학교 길송분교 뒷마당에 자라는 천연기념물 174호로 지정된 소태나무는 지름이 거의 한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다.
소태나무의 어린 가지는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의 매끄러운 바탕에 황색의 작은 숨구멍 흩어져 있고 가지는 흔히 층층나무처럼 층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잎은 작은 달걀모양으로 한 대궁에 12~3개씩 붙어있고 가지에는 어긋나기로 달린다. 암수 딴 나무로서 꽃은 초여름에 피며 황록색의 작은 꽃이 둥그스름한 꽃차례에 여럿이 모여서 핀다. 열매는 콩 알만 하고 초가을에 붉은 빛으로 익는다. 가을의 노란 단풍이 아름답다.
113. 굴피나무
나무나라의 생존 경쟁도 녹녹치 않다. 한때 나무나라의 귀족으로 영광을 독차지 했을지라도 이웃에 밀려나면 아예 없어지거나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굴피나무라는 익숙하지 않는 나무가 있다. 그는 아스라이 먼 옛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부터 한반도의 중부 이남지역에는 일찌감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수천 년 전에는 지금의 참나무처럼 우리 강토 여기저기에 자랐었다. 고고학적인 발굴현장에서 수없이 굴피나무가 출토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울산 옥현리의 청동기 유적지, 일산 신도시 개발지역, 대구 칠곡 아파트 지역 등 대체로 3~4천년 전의 유적지에서 그의 존재는 확인되기 시작한다. 역사시대로 넘어와서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출토된 원삼국시대 목관, 해상왕 장보고의 유적지가 있는 완도군 장도를 둘러싼 목책(木柵) 통나무에 비자나무와 함께 섞여있다. 좀 더 후세로 와서는 1985년 완도군 약산도에서 발견된 고려 초기 화물선을 만드는 선박재의 일부로서 굴피나무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때 그 시절의 굴피나무는 지금처럼 한 아름도 채 안되어 잡목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이름 속에 섞여 있는 그런 나무가 아니었다. 두세 아름은 거뜬히 넘기는 큰 나무이면서 재질이 좋은 나무이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느티나무나 참나무와 같은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임금님의 시신을 감싸는 목관으로 선택되고, 중요한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였는가 하면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선박의 몸체가 되는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 찬란하였던 영광의 세월은 역사의 영겁에 묻어버리고 산 속에서 띄엄띄엄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처지라서 정확하게 굴피나무를 알고 있은 사람도 흔치 않다.
중부 이남에 자라는 낙엽활엽수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으로 세로로 길고 잘게 갈라진다. 어린 가지는 황갈색 또는 갈색의 눈금이 드문드문 보인다. 잎 대궁 하나에 작은 잎 여러 개가 달리는 복엽(複葉)이고 가장자리에 깊은 톱니가 있다. 흔히 만나는 가중나무의 잎과 비슷하여 경남 일부 지방에서 산가중나무라고도 부른다.
암수 같은 나무로 초여름에 작은 꽃이 피며 엄지손가락 보다 약간 짧은 크기의 열매가 처음에 연한 노랑 빛으로 출발하여 가을에 진한 갈색으로 익는다. 모양은 마치 솔방울 같으나 좀 더 날렵해 보인다. 열매는 낙엽이 져버린 겨울에도 그대로 매달려 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수 천 개씩 하늘을 향하여 꼿꼿이 선 채로 이다. 그 많은 종자는 어떡하고 차츰 밀려나 버렸는지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알기에는 과학적인 지식이라는 것이 턱없이 모자란다. 열매는 황갈색 물을 드리는 염료로 이용되고, 가지 채로 꺾어 다가 꽃꽂이 재료로 쓴다. 또 나무의 안 껍질은 질겨서 줄 대용이며 어망을 만들기도 한다. 잎을 찧어서 물에 풀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굴피나무는 흔히 굴피집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를 받는다. 굴피집의 ‘굴피‘는 굴참나무 껍질이 준 말로서 지붕으로 쓰인 것은 멀리 고려사의 기록에도 나올 만큼 오래 되었다. 글자 한자 차이지만 굴피나무와 굴참나무는 서로 쓰임새가 전혀 다를뿐더러 아예 족보를 달리한 별개의 나무다. 비슷한 이름의 중국굴피나무는 굴피나무의 4촌쯤 되고 잎 대궁 양쪽으로 조그만 날개가 나 있는 점이 다르다.
114. 구기자나무
전래 나무타령에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란 대목이 있다. 웃음부터 나오는 재미있는 가사다. 하지만 어느 구석에도 마음 놓고 깔고 앉을 만큼 만만함이 있는 나무는 아니다. 반드시 달리는 것은 아니나 흔히 가시가 붙어 있으니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구기자의 근원을 찾아보면 중국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원래의 이름은 탱자(枸)와 같이 가시가 있고, 고리버들(杞)처럼 가지가 길게 늘어진다는 뜻으로 ‘구기’라고 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열매를 뜻하는 자(子)를 더 붙여 구기자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의 순수 한글이름은 ‘괴좃(괴좆)나무’다. 이 이상한 이름의 어원을 찾을 수 없으나 어쨌든 부르기가 좀 거북살스럽다.
먼 옛날 중국에서 들어온 키 작은 낙엽나무다. 보통 1~2m정도 높이로 자라며 기댈 곳이 있으면 4m에 이르기도 한다. 땅에서부터 많은 줄기가 뻗어 자라면서 바로 서지 못하고 밑으로 늘어진다. 마치 덩굴나무처럼 보이며 흔히 심는 개나리의 가지 뻗음과 비슷하다.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 보라색 꽃이 하나씩 피며 바로 열매가 익는다. 양지바른 돌담 자락, 땅이 비옥하고 물 빠짐이 잘 되는 곳이 구기자나무가 좋아하는 터전이다. 초가지붕과 나지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전통 시골에서 구기자나무가 만들어 내는 생 울타리는 어울림이 좋다. 열매는 앵두나 산수유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붉은 입술을 연상케 할 만큼 매혹적이다.
이 나무가 우리 가까이 살아가게 된 것은 빨간 열매가 약용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経)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동의보감까지 구기자의 쓰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열매의 이름이 구기자이며 간장에 지방이 쌓이는 것을 막아주고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노화를 늦추는 묘약이라고도 한다. 술을 담그면 강장 및 피로회복에 좋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로 열매의 약리 효과가 알려져 있으나, 잎과 뿌리도 약용으로 큰 자리를 차지한다. 새싹이 나올 때쯤의 어린잎을 따다가 차를 만들어 먹으면 동맥경화와 고혈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지골피(地骨皮)라는 이름의 뿌리는 혈압과 혈당을 낮추고 해열작용도 있다고 한다. 가히 만병통치의 효능을 갖춘 약제인 셈이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나 구기자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구기자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은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중국 강서지방의 한 선비가 길을 가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열일곱 여덟 남짓한 앳된 소녀가 호호백발노인을 매질하고 있었다. 소녀에게 사연부터 물어 보았다. ‘실은 이 노인이 내 아들인데, 약 먹기를 싫어하여 이렇게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내 이 녀석 약을 먹이려고 매질 중입니다’ 고 했다. 소녀의 나이를 물었더니 3백95살이라는 것이다. 놀란 선비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소녀에게 절하고, 그 비법을 알려 달라고 애걸하였더니 구기자라고 일러 주었다. 선비도 구기자를 상비약으로 먹고 3백년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구기자에 대한 여러 비슷한 이야기 중에서 최영전씨의 ‘한국민속식물’에 실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구기자의 효능을 강조하기 위한 누군가 만들어 낸 말일 터이지만 적어도 건강식품으로서 예부터 널리 쓰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가을날 구기자나무의 빨간 열매는 약용식물 만이 아니라 관상용으로도 값어치가 있다. 그러나 구기자의 가장 큰 단점은 탄저병과 흰가루병에 너무 약하여 그대로 두어서는 제대로 된 모습을 관찰하기 어렵다. 전문 구기자나무 제배 단지가 아닌 곳의 구기자나무는 대부분 병든 상태로 가을 날 우리를 마주한다.
115. 귤나무
귤이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사기(古事記)라는 일본 역사책에는‘서기 60년경 다지마 모리란 이가 제주의 감귤을 가지고 왔다’하였으며 고려사지에 `백제 문무왕 때인 476년 탐라에서 지역 특산물로 헌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주도에 재배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흔해빠진 겨울 과일이지만 한 세대 전만 하여도 귤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멀리 고려 때에는 팔관회에 귤을 쓴 것을 비롯하여 조선조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하였다.
세조 원년(1455) 제주도 안무사에게 보낸 공문에는‘금귤과 유감(乳柑)과 동정귤(洞庭橘)이 상품이고, 감자(柑子)와 청귤(靑橘)이 다음이며, 유자와 산귤(山橘)이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귤의 종류는 이외에도 당귤(唐橘), 왜귤(倭橘), 황감(黃柑)등 여러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제주도는 귤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세정이 문란해지고 관리의 수탈이 심해지자 제주 귤은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갔다. 심지어 여름에 관리가나와 익지도 않은 귤의 숫자를 세어 두었다가 가을에 받치도록 하는 일 까지 있었다. 그래서 귤 제배를 꺼렸고 아예 나무를 자르고 뽑아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차츰 좋은 품종은 거의 없어지고 개화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시작된 귤 제배는 1911년에 일본에서 수입한 귤이 제주를 덮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제주 귤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제주도에서 가져간 귤을 다시 개량하여 들어온 온주밀감이란 이름의 일본 귤이다.
옛날에는 귤이 너무나 귀한 과일이라서 백성들은 감히 구경도 할 수 없었으며 임금님도 끔찍이 아꼈다. 중종19년(1524) 임금이 황감을 한 쟁반씩 내리고 ‘설중황감(雪中黃柑)’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바치라고 한다. 귤 한 쟁반이 10여 개 남짓할 터, 임금님께 바치는 시를 짓느라 머리 썩히고 한쪽씩이나 제대로 맛보았는지 의심스럽다. 명종 2년(1547) 홍문관 교리 이원록이 사표를 내고 어머니의 병 바라지를 떠나려 하니, 임금이 밀감 40개를 노모에게 주라고 하였다. 적어도 임금님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귤이라면 아무리 귀하더라도 한 궤짝은 되어야 체면이 설 것 같다. 쩨쩨하게(?) 40개를 세어서 주라고 할 만큼 귀한 과일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명종 19년(1564)부터는 제주도에서 귤을 진상하면 성균관의 명륜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뒤, 유생들을 시험하는 황감제(黃柑製)를 매년 시행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하나로서 황감과(黃柑科)라고 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있었다.
동의보감에는 귤껍질은‘가슴에 기가 뭉친 것을 풀리게 하고 입맛이 당기게 하며 소화를 잘 시키고 이질을 멎게 한다. 구역질을 멈추게 하며 대소변을 잘 보게 한다. 가래를 삭혀주고 기침을 낫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민간요법으로 감기가 들면 귤껍질 차를 달여 마신다.
늘 푸른 작은 나무로서 키가 5m정도까지 자란다. 줄기는 가지가 많으며 나무껍질은 갈색으로 잘게 갈라진다. 잎은 흔히 보는 사철나무 잎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잎자루에 가느다란 잎이 또 붙어 잎 두 개가 하나의 잎 대궁에 이중으로 달려있다. 이런 모양을 이름하여 단신복엽(單身複葉)이라 한다. 귤나무나 유자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모양이며, 다른 나무와를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여름의 초입에 들면 흰빛으로 피며 짙은 향기가 있다. 가을에 둥글고 노란 열매가 익는다.
귤과 유자는 비슷하나 가지에 가시가 없고 열매가 단맛인 것이 귤나무, 가지에 가시가 있고 열매는 신맛인 것이 유자나무이다.
116. 능금나무
능금은 배, 감,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주요한 옛 과일이었다. 세계적으로는 약 25종이 유럽, 아시아 및 북아메리카에 걸쳐 자라고 있다. 중국의 기록으로는 1세기경에 임금(林檎)이라 불렀던 능금을 재배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 능금보다 길고 큰 열매를 가진 과일나무를 남쪽에서 들어왔는데 이것을 내(奈)라 했다 한다. 임금은 중국의 과일이고 내는 오늘날의 서양사과를 말하는 것으로도 추정한다.
대체로 삼국시대 쯤 임금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기록으로는, 송나라의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1103)에‘내빈과(奈蘋果)는 임금을 닮고 크다‘ 하였고 고려도경(1124) 권23 잡속 토산(土産)에 보면 일본에서 들어온 과일에 능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처음이다. 동국이상국집 고율시에는 ‘...붉은 능금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아마도 그 맛은 시고 쓰리라‘라 하여 구체적인 생김새와 맛까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태종 12년(1412)과 13년 종묘에 올리는 햇과일로 능금이 등장한다. 쪼개고 깎아서 쓸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올릴 것인지를 두로 대신들의 논란이 있었다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랏일에 신경써야할 분들이 정말 하찮은 일을 가지고 쓸데없는 논쟁을 한 것 같다. 지금도 이런 일이 있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외 조선왕조실록에는 엉뚱한 계절에 능금 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있다.
이처럼 능금은 우리의 주요한 과일로서 명맥을 이어왔고 개화 초기까지만 하여도 개성과 서울 자하문 밖에 흔히 재배하고 있었으나 다른 과일에 밀려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능금으로 알고 있는 이 과일이 중국의 임금이 들어와서 능금이 된 것인지 아니면 경북, 경기, 황해도 등지에 야생상태로 자라는 순수 토종 능금나무의 열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능금과 같은 과일로 흔히 알고 있는 사과(沙果)는 무엇인가? 훈몽자회에 보면 금(檎)은 능금 금으로 읽고 속칭 사과라고 한다하여 벌써 오백 년 전에도 뒤섞어 쓰인 것 같다. 지금도 능금과 사과의 명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으나,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시험장을 개설하고 각종 개량 과수묘목을 보급할 때 선교사나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능금이 달리는 나무‘를 일단 사과나무로 보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다.
사과는 유럽인들이 즐겨한 과일로서 얽힌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 사과를 따먹다가 쫓겨난다. 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 한 개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줌으로서 급기야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분쟁을 가져오는 불씨를 ‘파리스의 사과‘라고 한다. 그 외 활쏘기의 명수 윌리엄 텔의 사과, 만류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등 서양 문화에 비친 사과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이다.
능금나무는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 10m정도에 이르고 어린 가지에는 털이 많다. 잎은 타원형이고 어긋나며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분홍색으로 피고 5장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가을에 노란빛이 도는 열매가 붉게 익으며 겉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두 나무는 매우 비슷하여 구분이 어려우나 능금은 꽃받침의 밑 부분이 혹처럼 두드러지고 열매의 기부도 부풀어 있다. 사과는 꽃받침의 밑 부분도 커지지 않고 열매의 기부도 밋밋하다. 또 능금은 사과에 비해 신맛이 강하고 물기가 많으며 크기도 작다.
117.무환자나무
무환자(無患子)나무는 환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환상의 나무다. 중국에서는 무환수(無患樹)라 하여 근심과 걱정이 없는 나무로 통한다. 늙어서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원죄가 없어진다니 수많은 세상나무 중에 이보다 더 좋은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본래 중국에서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즐겨 심던 나무로서 무환자란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이 있다. 옛날 앞날을 기막히게 잘 알아맞히는 이름난 무당이 있었는데, 그는 무환자나무 가지로 귀신을 때려 죽였다한다. 그래서 나쁜 귀신들은 이 나무를 보면 도망을 가고 싫어하였다. 이를 안 사람들은 다투어 무환자나무를 베어다 그릇을 만들고 집안에 심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무환자나무가 알려졌으며 산해경(山海經)이란 책에는 옛 이름이 환(桓)이었다한다. 도교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이 나무는 자연스럽게 ‘무환’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한 그루의 무환자나무를 뜰에다 심어두고 온갖 근심걱정을 다 떨쳐버리면, 나무와 함께 자연히 무병장수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본남부, 타이완, 중국남부, 인도 등 난대나 아열대를 고향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무환자나무는 인도 원산으로서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따뜻한 것을 좋아하여 경남 및 전남과 남부 섬 지방에 주로 심는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잎나무로서 키가 20m, 지름은 한 아름이 넘게 자란다. 잎은 아카시나무 잎 마냥 9~13개의 작은 잎이 한 대궁에 붙어있다. 잎 끝으로 갈수록 뾰족하며 뒷면에 주름살이 많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가을에 만나는 샛노랗게 물든 단풍은 품격 있는 정원의 운치를 한층 더 높여준다.
늦봄 원뿔모양 꽃차례에 팥알 크기 정도의 작은 꽃이 적갈색으로 핀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2cm 전후로서 가을이 짙어 갈 때 황갈색으로 익으며 마치 고욤처럼 생겼다. 꼭지 부분에는 작은 딱지(心皮)가 살짝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아 귀엽고 깜직하다. 안에는 지름 1cm 가량의 새까만 종자가 1개씩 들어 있다. 돌덩이 같이 단단하고 만질수록 더욱 반질반질하여 스님들의 염주 재료로 그만이다. 불교 경전인 목환자경에, 무환자나무 열매 백여덟 개를 꿰어서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씩 헤아려 나가면 마음속 깊숙이 들어있는 번뇌와 고통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나무의 다른 이름은 아예 염주나무, 때로는 보리수라고도 한다. 또 이수광의 지봉유설 훼목부에도 ‘열매는 구슬과 같아서 속담에 이것을 무환주(無患珠)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무환자나무 무리를 나타내는 속(屬)의 이름 sapindus는 ‘인도의 비누‘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이고, 영어이름 soapberry는 아예 비누열매란 뜻이다. 열매 껍질과 줄기나 가지의 속껍질에 사포닌이라는 일종의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어서 인도에서는 빨래를 할 때 우리나라의 잿물처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열매껍질은 머리를 감는 데도 쓸 수 있다하니 머리털을 건강하게 하고 환경보존을 위하여도 무환자나무의 열매를 이용해 봄직 하다. 민간에서 술을 담궈 감기치료제로 쓰며 열매껍질은 거담제나 주근깨를 없애는 등 한약제로도 사용하였다.
경남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의 응석사라는 작은 절에 자라는 경남 기념물 96호로 지정된 무환자나무 노거수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큰 나무다. 나이는 250년 정도이나 알려지기로는 신라말경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118. 차나무
우리말의 다반사(茶飯事)란 말은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적으로 흔히 있는 일이란 의미이고 뜻이다. 또 명절을 맞아 간략하게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차를 마셔왔다. 차의 원료가 되는 차나무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남부 지방에 자라고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말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의 백월사에 있는 죽로차는 김수로왕 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에서 비롯되었다하였으니 사실이라면 가장 오래된 차일 수도 있다. 보다 믿을 만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차에 관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에 보면, 신라 경덕왕 19년(760) ‘월명은 도솔가를 지어 태양이 두 개 생기는 변괴가 사라지니 왕은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하사했다‘고 하였다. 또 같은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경덕왕 이야기에, 왕24년(765) 충담이란 중은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했다. 따라서 차는 서기 760년 전후 벌써 상류사회에서는 널리 마신 것으로 짐작되므로 실제 보급되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으로 인정받은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3년(828)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780~785)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때를 차가 전해진 원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차를 가져온 사람인 '사신 대렴'에 '사신 김대렴'으로 성을 붙여 놓아 김씨 이외의 타성들로부터 심한 논박을 당하고 있다. 김씨가 된 근거는 당시에 중국에 사신으로 갈 정도면 김씨일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란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차나무는 중국에서 수입하여 널리 심기 시작한 것이나 현재는 전남. 경남의 남부 지방에 야생상태도 상당히 있다. 늘 푸른 잎을 가진 작은 나무로 높이 4~5m가 고작이다. 좁고 긴 타원형의 잎이 어긋나기로 달리고 두꺼우며 표면이 반질반질하다. 늦가을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이 떨어져 버린 날 차나무는 계절을 잊어버린 듯 꽃을 피운다. 옛날 엽전 크기에 6~8장의 새하얀 꽃잎이 노란 꽃술을 살포시 감싸고 있는 모습은 꽃나무로도 손색이 없다. 다음 해 11월에 가야 열매가 맺는데 다갈색으로 익는다. 속에는 굵은 구슬크기의 둥글고 단단한 종자가 들어 있다.
예부터 차 한 잔을 같이 마시면서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차 문화는, 인생을 관조하고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길이라고 한다. 지배계층인 승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천년을 이어오든 차 문화는 조선조에 들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쇠퇴의 길을 걷는다. 거의 맥이 끊겨오다 싶이 하다가 최근 차에 항암효과와 치매예방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 나오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경험론들이 퍼지면서 차를 즐기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물이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도, 찻잎을 너무 많이 넣거나 적게 넣어도 안 되며 우려내는 시간이 너무 길거나 짧아도 제 맛을 낼 수 없다는 그 까다로운 다도(茶道)를 꼭 배우지 않더라도 차는 차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기호식품이 되어 가고 있다.
119. 곰솔(해송)
곰솔의 다른 이름은 해송(海松)이다. 자라는 곳이 바닷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감히 살아갈 엄두도 못내는 모래사장, 바닷물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에서도 지평선이 아련한 바다의 풍광을 즐기면서 거뜬히 삶을 이어간다. 파도가 포말(泡沫)이 되어 날라 다니는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은 강인함은 곰솔이 아니면 다른 나무는 감히 넘나볼 수도 없다. 수 십 그루가 모여 자라면서 억센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고 농작물이 말라 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그래서 바닷가에 떼 지어 자라는 소나무는 틀림없이 곰솔이다.
남해안과 섬 지방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강릉, 서쪽은 경기도까지 남한의 바다를 끼고 대체로 십여 리 남짓한 사이에 벨트 모양으로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강인한 생명력은 본래 소나무의 생활터전인 내륙 깊숙이까지도 들어가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와 해송이라는 그의 별명이 무색해 지는 경우도 흔하다. 일본 남부와 중국의 일부에도 분포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닷가에 자란다. 그러나 옛 문헌에 나오는 해송은 지금의 곰솔이 아니라 잣나무를 말한다. 신라 때 당나라로 유학 가는 학생들이 학비에 보태 쓸 요량으로 가져간 잣을 두고 중국인들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의미로 해송자(海松子)라 한 것이다.
같은 나무를 두고 곰솔과 해송이란 이름은 거의 같은 빈도로 쓰인다. 소나무의 줄기가 붉은 것과는 달리 해송은 새까만 껍질을 가지므로 한자 이름으로 흑송(黑松)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순수 우리말로 고쳐 부르면 검솔, 세월이 지나면서 곰솔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름풀이를 해본다. 자라는 곳으로 보아서는 내륙에도 흔히 자라므로, 해송이라는 이름 보다는 곰솔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소나무와 곰솔은 유전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흔히 소나무 종류를 이야기 할 때 이 둘을 묶어서 한 다발에 바늘잎이 둘씩 붙어 있다고 이엽송(二葉松), 나무의 성질이 단단하다하여 경송(硬松)이라 부른다. 여러 가지 비슷한 면도 있으나 따져보면 자기 개성이 비교적 명확하여 둘을 구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곰솔의 껍질은 강렬한 자외선에 타 버린 듯 까맣게 보인다. 또 바늘잎은 너무 억세어 손바닥으로 눌러보면 찔릴 정도로 딱딱하고 새순이 나올 때는 회갈색이 된다. 반면에 소나무는 아름다운 붉은 피부를 갖고 잎이 보드라우며 새순은 적갈색이다. 이런 특성을 두고 강인해 보이는 곰솔은 남성적이고 소나무는 여성적이라고 말한다.
곰솔과 소나무의 꽃가루를 받아 교배를 시키면 두 나무의 중간쯤 되는‘중곰솔’이란 트기가 생긴다. 자연 상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양부모의 좋은 점을 물려받아 더 빨리 자라고 더 곧게 되는 성질을 갖기도 한다. 물론 못된 점만 닮은 망나니도 태어나는 것은 동물의 세계나 마찬가지다. 곰솔은 어릴 때 생장이 대단히 빨라서 소나무를 능가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 추월당하고 만다. 또 나무의 성질은 소나무 보다 못하나 곧게 자라는 경향이 있어서 남부지방의 바닷가에는 심을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곰솔은 제주시 아라동의 천연기념물 160호이며, 그 외 익산 신작리의 188호, 부산 수영동의 353호, 전주 삼천동의 355호, 장흥 관산의 356호, 해남 군청 앞의 430호, 제주 수산리의 441호 곰솔이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20. 주목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을 타고 점봉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바다건너 한라산까지 태산준령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런 명산의 꼭대기에는 어디서나 포근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나무가 있다. 바로 늙은 주목들이다. 비틀어지고 꺾어지고 때로는 속이 모두 썩어버려 텅텅 비워버린 몸체가 처연하다. 그런 부실한 몸으로 매서운 한 겨울 눈보라도 여름날의 강한 자외선에도 의연히 버틴다. 굵기가 한 뼘 남짓하면 나이는 수백 년, 한 아름에 이른다면 지나온 세월은 벌써 천년을 넘나본다.
강원도 정선 사북읍을 못 미쳐 철쭉꽃으로 이름이 알려진 두위봉이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 중에 가장 오래 살아온 주목 세 그루가 자란다. 가운데 맏형의 나이는 자그마치 1천4백년, 지름은 세 아름에 이른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한반도를 반쪽 통일하는 역사적 대 격변기에 이곳 두위봉 한 구석에서 가녀린 싹을 내밀었던 바로 그 주목이다. 같이 태어나 삼국통일의 소망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도 백제의 최후를 몸으로 저항하던 계백 장군도 모두 영욕의 세월을 뒤로한 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주목 세 그루는 두 번째의 밀레니엄의 거의 중반에 이르는 지금도 두위봉의 터줏대감이다. 살아서 천4백년의 풍상을 거뜬히 넘나들고 있으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상하게 내려다 볼 것 같다.
오래 산 주목 모두 우리가 높은 산에서 만날 때처럼 육신이 병들고 허허 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몸 관리를 잘한 주목의 육체는 빈속 없이 꽉꽉 채워져 있다. 이름대로 껍질도 속도 붉은 색이 자르르 함은 물론이다. 옛 사람들에게 붉은 주목은 잡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나무였다. 아울러서 몸체 일부에서 탁솔이라는 항암물질을 만들어 내는 만큼 나무를 썩게 하는 미생물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금상첨화로 나무의 질이 좋기로도 이름이 나 있다. 혹시 세포의 종류가 너무 많으면 저들끼리 싸움 날까봐, ‘헛물관’과 ‘방사조직’이라는 딱 두 종류의 세포만으로 나무 몸체를 만들었다. 천천히 세포 속을 다져가면서 필요할 때는 향기도 조금씩 넣어 가면서 정성스레 ‘명품’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주목의 속살이 명품임을 먼저 알아준 이는 바로 절대 권력자 들이었다. 살아생전에 누리던 기득권을 저승길에도 주목과 함께 가져가고 싶었다. 우선은 자신의 주검을 감싸줄 나무 널로 주목을 따를 나무가 없다. 중국의 지리지 성경통지(盛京通志)란 옛 책에 ‘주목은 향기가 있고 목관으로서 가치가 높아 아주 귀하게 쓰인다’하였다. 서양에서도 주목을 관재로 쓴 예는 여럿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 낙랑고분, 경주 금관총, 고구려 무덤인 길림성 환문총의 나무 관(棺) 등에 모두 주목이 쓰였다.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왕비의 나무 베개가 주목으로 만들어 졌다. 귀하신 몸과 땅속에는 같이 들어갔지만, 주인의 간절한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2천년 된 낙락고분에서처럼 주목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고, 권력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부질없는 욕심은 이렇게 허망하다. 그 외에 우리 주목과 모양이 조금 다른 중국주목(Taxus chinensis)은 톱밥을 물에 우린다음 궁중에서 쓰는 붉은색 물감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급 활을 만드는 재료에서 임금을 알현 할 때 손에 드는 홀(笏)에 이르기까지 주목은 육신을 나누어주어야 할 곳이 너무 많다. 주목의 대명사,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가 소속하는 집안은 대부분 솔방울을 달고 있는 구과(毬果)식물인데, 이웃들과는 달리 특별한 모양의 열매를 만들어냈다. 고운 분홍빛 갸름한 열매 가운데 흑갈색 씨앗을 담아둔, 그만이 갖는 고유설계다. 분홍 빛 말랑말랑한 껍질은, 탐내는 누구나 따 잡숫고 멀리 가서 볼일을 봐 달라는 희망이 담긴 것이다. 딱딱한 씨앗 속에는 독성이 강한 성분을 넣어둔다. 소화시키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라는 사전경고다.
주목은 아스라이 먼 3억만년 전부터 지구상에 자리를 잡아오다가, 한반도에서 새 둥지를 마련한 세월만도 2백 만년이 훨씬 넘는 다고 한다. 몇 번에 걸치는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자자손손 삶을 이어왔다. 오늘날의 터전처럼 원래부터 산꼭대기가 좋아서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땅 힘 좋고 아늑한 산자락에 살기를 그도 바란다. 정원의 조경수로 심어보면 싫다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이 증거다. 그러나 주목은 진화란 이름으로 약삭빠르게 환경적응을 못한 탓에, 차츰 차츰 이웃들에 밀려 경쟁자가 적은 꼭대기로 쫓겨 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그는 악착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많은 햇빛을 받아들여 더 높이, 더 빨리 자라겠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숲 속의 그늘에서 적어도 몇 세기는 내다보는 여유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성급한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어느새 수명을 다할 것이니 그날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하루 종일 ‘바쁘다 바빠’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목이 주는 메시지는 한번쯤 곱씹어 볼만하다.
121. 금강소나무(강송)
태백산맥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경상북도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 주위의 꼬불꼬불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학자들은 이름을 붙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나무다.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쌓여서 나무의 속이 진한 황갈색을 나타낸다. 이 부분을 옛 사람들은 황장(黃腸)이라 하였으며 가장자리의 백변(白邊)에 비하여 잘 썩지 않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황장이 넓고 백변이 좁은 금강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서 왕실에 널리 쓰였다.
세종 2년(1420) 예조에서 ‘천자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데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나, 백변은 내습성이 없어 속히 썩는데 있습니다. 대행 왕대비의 재궁(梓宮)은 백변을 버리고 황장을 서로 이어서 만들게 하소서’ 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 내내 좋은 소나무 보호를 위하여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세우고 경국대전에 좋은 소나무의 벌채를 법으로 금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금강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어 멀리 태백산맥의 오지까지 가서 벌채를 하여 한강을 타고 서울로 운반하였다. 한강 수계(水系)로의 운반이 불가능한 울진, 봉화지역의 소나무는 그래도 생명을 부지하여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영주-봉화-태백으로 이어지는 산업철도가 놓이면서 이들도 무차별로 벌채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권세 있는 양반이 아니면 지을 수도 없었던 소나무 집을 너도나도 짓기 시작하자 급격한 수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잘려 나온 금강소나무는 춘양역에 모아두기만 하면 철마(鐵馬)라는 괴물이 하룻밤 사이 서울까지 옮겨다 주었다. 사람들은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란 뜻으로 춘양목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진 수탈에도 그나마 남아있는 곳은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이다. 이곳은 1981년 유전자 보호림, 1985년 천연보호림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소나무와 금강소나무는 별개의 나무인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소나무라는 성씨를 가진 종가 집의 자손에는 반송, 금강소나무, 황금소나무 등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모양새가 같지 않은 몇 종류가 있다. 그렇다고 다른 성바지로 볼만큼 전혀 닮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애매하게 ‘씨‘를 의심받기도 하나 틀림없는 한 자손이므로 이럴 때 우리는 품종(品種)이라고 한다. 금강소나무는 한마디로 조상인 일반 소나무보다 더 잘생긴 소나무의 한 품종이다.
일본의 국보1호인 반가사유상은 대부분의 일본 목불(木佛)이 녹나무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재질이 소나무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소나무를 가져가서 만들었다고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금강소나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불상의 나무 세포를 분석하여 불상 재료의 원산지가 한반도인지 일본인지를 아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일본에도 불상하나 만들 정도의 큰 소나무는 충분히 있어서다. 제작기법이라던가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다른 각도에서 검토할 문제일 뿐이다.
122. 가시나무
가시나무라면 가시가 삐죽삐죽 나온 험상궂은 나무를 떠올린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가시나무’란 말은 특정의 나무가 아니다. 가시가 달린 나무 모두에 대한 포괄적으로 쓰이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나무이름으로서 실제로 가시나무란 나무가 있다. 가시가 전혀 달리지 않은 늘 푸른 잎 참나무의 한 종류다. 참나무 무리에는 온대지방에 자라는 상수리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낙엽 참나무와 난대에서 아열대에 자라는 상록참나무가 있다. 여러 종(種)의 상록참나무를 대표하는 나무가 바로 가시나무다.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난대지방에 주로 자라는 나무들이다. 제주도의 돈네코 계곡 등 보호받고 있는 상록 숲에 집단으로 자란다. 키가 20m, 지름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이며, 무겁고 단단한 좋은 재질을 갖고 있다.
긴 타원형의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두꺼우며 반질반질하다. 암수 같은 나무로 봄에 수꽃은 꼬리처럼 길게 늘어져 피고 암꽃은 곧추서서 달린다. 가을에 익는 열매는 뾰족한 원뿔모양으로 도토리보다 훨씬 작고 날씬하다. 낙엽 참나무들과 다른 점은 도토리를 담고 있는 컵의 바깥 면이 가락지를 차곡차곡 얹어 둔 것처럼 6∼9개의 나이테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가시나무란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종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만한 재목이고 가서목(哥舒木)은 더욱이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기(軍器)의 중요한 수요인데 유독 이 섬(완도)에서만 생산됩니다. 단단한 나무는 자라는 것이 매우 느려서 한 번 잘라 버리고 나면 금세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애석하게 여기고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들과 마찬가지로 땔나무가 되어버리니 앞으로는 각별히 금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목민심서 권3 권농(勸農)에는 가사목(加斜木) 심기를 권장한 대목이 있고 물명고에도 가서목은 ‘가셔목‘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훈몽자회에는 가시나무 우(栩, 허)로 나타내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도토리를 ‘가시‘라하며 나무는 가시목으로도 부른다. 어쨌든 가서목(哥舒木)이나 가사목(加斜木)이 가시나무로 된 것은 틀림없는데,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들도 우리와 꼭 같은 발음으로 ‘가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문화가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무엇이던 기를 쓰고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만, 아무래도 가시나무만은 우리 이름이 그대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상록참나무는 가시나무를 비롯하여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개가시나무 및 일본에서 들여와 주로 조경수로 심는 졸가시나무 등 종류도 많고 생김새도 서로 비슷비슷하다. 잎의 모양으로 서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붉가시나무는 잎의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고, 종가시나무는 잎 길이의 1/2이상에만 톱니가 있으며 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 및 개가시나무는 잎 가장자리 모두에 톱니가 있다. 졸가시나무는 잎 끝이 둥그스름하다.
이런 가시나무 종류는 물관의 크기가 작고 수가 훨씬 적으며 배열도 방사상이어서 물관크기가 크고 환공상인 낙엽참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재질은 참나무보다 더 단단하고 고르다. 그래서 튼튼한 병기를 만드는 데는 안성맞춤이었으며, 남부지방에서는 다듬이 나무, 방망이 등 내륙지방의 박달나무와 맞먹는 쓰임에 널리 이용되었다.
123. 노각나무
노각나무는 소박하면서 은은한 꽃, 비단결 같이 아름다운 껍질과 가장 품질 좋은 목기(木器)를 만들 수 있는 나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낯가림이 심하여 사람이 많이 다니는 야산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다. 아름드리로 자랄 수 있는 큰 나무이나 깊은 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자태를 숨기고 조용히 살아간다.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 학명에 'koreana'라는 지역이름이 들어간 순수 토종나무이니 더욱 우리의 정서에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나무는 아직까지 값어치만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산의 나목(裸木)은 나무마다의 모습을 그대로 들어 내놓는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어서 봄이 돌아와 앙상한 뼈대에 볼 품 없는 겨울 줄기가 나뭇잎에 감추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노각나무는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달리 아름다운 몸매자랑에 짧은 겨울 해가 원망스럽다. 곧바르게 쭉쭉 뻗은 줄기에 금빛이 살짝 들어간 황갈색의 알록달록한 조각 비단을 이어 두른 것 같은 그녀의 피부는 누가 보아도 황홀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조각 부분 부분을 찬찬히 뜯어보면 갓 돋아난 사슴뿔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그래서 나무 이름은 처음에 녹각(鹿角)나무라 부르다가 노각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 다른 이름 금수목(錦繡木)도 비단을 수놓은 것 같다는 뜻이다. 아예 비단나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어쨌든 이 나무껍질의 아름다움은 나무나라 제일의 섹시한 ‘피부 미목(美木)‘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새봄이 돌아와 잎이 피기 시작하면 아기 손바닥 크기의 갸름한 잎이 어긋나기로 달린다. 어릴 때는 약간 노르스름하며 잎맥을 따라 골이 진 것처럼 보이고 가장자리에 물결모양 톱니가 있다. 잎 모양은 그저 평범한 나뭇잎 수준일 따름이다. 그러나 꽃이 피는 시기는 미인의 체면을 살릴 수 있도록 다분히 계산적이다. 온갖 봄꽃들이 향연을 벌릴 때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다른 꽃들이 없어진 다음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에 들어서야 작은 주먹만 한 하얀 꽃이 잎 사이를 헤집고 하나씩 매달린다. 주름진 다섯 장의 꽃잎이 겹쳐 피고 가운데 노란 꽃술을 내미는 꽃 모양은, 뒤 배경으로 펼쳐지는 푸른 잎사귀와 잘 대비되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잘 나타내는 멋쟁이다. 커다란 흰 꽃의 청초함은 조경수나 가로수로 제격이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로수의 대부분이 은행나무와 버즘나무라고 한다. 이처럼 특색 없는 가로수에서 탈피하여 각 지역적 특성에 맞는 자생수종으로 바꾸어 간다면 남부지방에는 노각나무가 가장 바람직하다. 한국에만 있는 특산수종이고 여름에는 녹음과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비단결 같은 고운 껍질이 일품이고 가을의 노랑 단풍은 노각나무가 주는 또 하나의 보너스이기 때문이다. 목재는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바로 목기를 만드는 나무로 예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오늘날 남원 일대의 목기 유래는 지리산의 노각나무를 재료로, 발달하였던 실상사의 스님들로부터 기술이 전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나무세포의 벽이 두꺼워 재질이 단단하며 물관의 수가 적고 그것도 나이테안에 고루고루 분포한다. 또 습기를 잘 빨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생활목기로 따라갈 나무가 없다.
노각나무가 분포하는 지역은 좀 독특하다. 북한의 평안남도 양덕온천 지역, 소백산 희방사 부근, 내려와서는 지리산, 가야산, 가지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건너 띄어 남해에서 찾아진다. 어느 지역에 집중적으로 자라지 않고 이처럼 띄엄띄엄 나타나는 것은, 목기를 만들기 위한 남벌로 다른 지역은 없어지고 오늘날 섬처럼 남게 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계적으로는 7종의 노각나무 무리가 있고 이중에 일본노각나무는 우리 것과 비슷하여 조경수로 심는다. 이래저래 노각나무는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 볼만한 나무다.
124. 삼나무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해당하는 역사책 일본서기의 신대(神代)를 보면 ‘소전명존(素戔鳴尊)‘이라는 신은,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고,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가 되었으며 가슴의 털을 뽑아 흩으니 편백이 되었다. 삼나무는 배를 만드는데 쓰고 편백은 서궁(瑞宮)을 짓는 재료로 하라’는 기록이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들의 개국신화에 나올 만큼 삼나무는 일본인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일본의 나무이다. 이처럼 그들의 시조 신(神) 이야기는 물론 시조(俳句)나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에까지 삼나무는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일본에 흔한 나무이면서 나무로서의 좋은 점은 다 가지고 있는 나무다. 줄기는 항상 곧 바르게, 집단으로 모여서 아름드리로 잘 자라주고 없어서 못쓸 만큼 쓰임새가 넓다.
그래서 섬나라에 필요한 배 만들기를 비롯하여 집 짓고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제몫을 톡톡히 하는 나무이다. 특히 삼나무 술통은 나무속의 성분이 녹아 나와 술의 향기를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에게는 신이 내린 축복의 나무이다. 삼나무하나 만으로도 충분하련만 불공평하게도 하느님은 편백, 화백, 금송 등 좋은 나무를 또 보태어 일본열도에만 심어주셨다.
바로 바다 건너의 이런 좋은 나무에 대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약용의 아언각비에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개화 이전의 조선왕조 때는 일본삼나무를 남부지방에 따로 심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공주의 무열왕릉에서 나온 목질유물의 일부, 부여 궁남지의 목간(木簡) 등 우리의 문화유적에 가끔 삼나무로 만든 유물이 나온다. 옛날 한반도에 삼나무는 심지 않았으니 모두 일본에서 직접 만들어서 가져왔다고 추정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고려도경 제29권 공장(供張)의 삼선(杉扇)에 보면, 일본백삼목(日本白杉木)을 종이처럼 얇게 쪼개서 부채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때에도 일본에서 삼나무 자체는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나 나무 자체를 가져다 심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삼나무를 우리나라에 대량으로 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부터이다. 곧게 빨리 자라는 나무이니 재목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다만 추위를 싫어하므로 경남과 전남의 해안지방에서 섬 지방에 주로 심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목재생산보다는 귤 밭의 방풍림으로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남해안 지방에서는 우리의 고유 수종인 곰솔이나 비자나무를 제치고 가장 널리 퍼져있는 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대표 침엽수이며 일본의 나무이다. 이런 사연을 잘 모르는 분들이 우리의 문화유적지, 특히 한산도를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에도 삼나무를 심어댄다. 나무 생산 목적으로 산에 심는 것이야 시비를 걸 생각이 없지만 적어도 항일유적지에는 삼나무 심기를 삼가야 옳을 것 같다.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 높이 40m, 지름 두 세 아름은 보통인 거목이다. 잎은 약간 모가 나고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정도로 송곳처럼 차츰 가늘어져 끝이 예리하다. 암수 한 나무이고 꽃은 초봄에 피고 열매는 가을에 익는다. 솔방울은 적갈색으로 직경 2cm정도로 둥글며 종자는 각각의 실편에 3~6개씩 들어있다.
같은 일본특산 나무로서 삼나무에 뒤지지 않는 편백이 있다. 모양새는 측백나무처럼 잎이 비늘모양으로 눌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랄 수 있는 곳은 삼나무와 비슷하고 나무는 약간 강도가 높아 건축재나 배를 만드는데 많이 쓴다. 편백 무리에는 역시 일본 원산의 화백이 있다. 편백과 화백 모두 우리나라에 널리 심겨져 있다.
125. 거제수나무
깊은 산골의 높은 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가지 않은 원시상태로 숲이 보존되어 있었다. 최근 건강을 지키려는 등산객이 늘면서 감추고 있던 숲의 모습들은 하나 둘 고스란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곳에는 사람과 낯가림이 심한 나무들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간다. 거제수나무가 이런 나무의 하나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의도와는 달리 거제수나무는 껍질부터 사람들의 눈에 확 들어온다. 멀리서 보아 다른 나무들처럼 칙칙한 흑갈색이 아니라 하얗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를 잘 아는 이라면 거의 구분할 수 없이 비슷한 모습이다. 가까이 가보면 얇은 껍질 하나하나가 종이 짝처럼 벗겨지고 너덜너덜 할 때도 있다. 색깔은 흰 색을 자주 만나지만 약간 황갈색을 띠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한자로는 황화수(黃樺樹)이라고 한다. 황자작이란 뜻이며 황단목(黃檀木)라고도 부른다. 일본에는 아예 자라지 않으며 중국이름은 석화(碩樺), 자작나무보다 더 크게 자란다는 뜻으로 짐작된다. 자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높은 산에서 시작하여 멀리 아무르 지방에 이르는 넓은 땅에 걸쳐진다. 얇고 흰 껍질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겨울 날 그와의 만남은 보기가 애처롭다. 저런 얇은 옻 하나 달랑 걸치고 몰아치는 찬바람을 어떻게 버티는 지?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많은 기름 끼를 가진 얇은 껍질을 이용하여 수십 겹 옻으로 만들어 입고 있으니 방한효과를 톡톡히 내는 샘이다. 우리나라 안의 자람 터는 남쪽으로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가야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두위봉, 가리왕산, 오대산, 설악산으로 이어진다. 높은 산으로 알려진 유명한 산들의 대부분이 그의 안식처이다. 하지만 이런 산의 밑자락부터 자리 잡은 일은 흔치 않다. 적어도 중복이상의 높은 지대를 좋아한다. 산 높이 별로 보면 90%이상의 거제수나무는 표고 600m보다 더 높은 곳에 자라며 1,000m 전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람 터라고 한다.
자람의 방식도 혼자가 아니라 형제자매를 주위에 거느리고 함께 터전을 잡는다. 능선보다는 바람막이가 되고 땅 힘이 있을 만한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을 좋아한다. 작게는 3~40그루, 많게는 수백그루가 무리를 이룬다. 그래도 거제수나무 무리는 소나무나 젓나무처럼 철저히 자기들끼리만 살아가겠다고 다른 나무가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는 얌체는 아니다. 동족들 사이사이에 사촌나무인 물박달나무나 박달나무, 사스래나무를 비롯하여 근처의 물푸레나무, 신갈나무, 산벚나무 등 족보가 한참 멀어도 별로 탓하지 않는다. 무리는 이루지만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고 있다. 어쩌다 여러 피해를 받아 동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한두 그루씩 고군분투하는 거제수나무가 만나지기도 한다.
크게 자라면 높이 30m, 굵기 두 아름이 넘는다. 자작나무 종류 중에는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의 하나다. 이 나무는 4월말이나 5월초쯤의 곡우 때가 되면 줄기에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신다. 곡우물이라는 이 물을 마시면 병 없이 오래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들은 여기에다 재앙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하나 더 부여하여 거제수나무를 ‘去災水’로 나타내기도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한자 이름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의 한자 이름 혼란이 있다. 거제수나무를 ‘巨濟樹’라하여 거제도에서 많이 나오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관련 문헌 중에 이거인의 ‘개간인유’에 보면 거제도에서 가져온 거제목(巨濟木)이란 말이 들어있어서 혼란이 생긴 것 같다. 거제목이란 거제도에서 나오는 나무란 일반명사이지 거제수나무란 특정 수종을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또 거제도는 최고 높이 가라산이 585m에 불과하며, 거제수나무가 이렇게 따뜻한 남부지방에 자랄 수는 없다.
126. 팔손이나무
손바닥을 펼친 모양의 커다란 잎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상록수다. 키 2~3m에 아무리 굵어도 어른 발목 굵기를 넘지 않는다. 잎의 갈라짐은 손가락에 해당하는 7~9개정도이나 대부분은 8개다. 손가락이 여섯인 사람을 육손이라고 하듯이 여덟 개의 손가락을 가진 나무란 뜻으로 ‘팔손이’란 이름이 붙었다. 접미어 ‘-이’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어근에 붙어 사람·동물·사물을 만드는 말이라고 했다.
손가락에는 톱니가 있고 깊게 갈라지며 가운데가 약간 통통해 보인다. 잎자루가 길고 잎의 표면은 약간 윤기가 난다. 잎 전체는 손바닥 두세 개를 펼친 만큼이나 크다. 원래의 자람 터는 동아시아, 일본에서 중국남부, 타이완을 거쳐 인도까지 주로 아열대지방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거제도와 남해도의 남부 및 비진도를 잇는 선이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다. 옛날에는 흔히 있는 나무이었으나 사람들의 무분별한 채취로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비진도 바닷가의 작은 숲이 천연기념물 63호로 지정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무의 특성이 음지에서 잘 버티고 널찍한 잎이 시원하게 보여 집안에 기르는 나무로 제격이다. 실내 식물로 지금은 북쪽지방에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흔히 만 날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 잎이 떨어진 자국, 엽흔(葉痕)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이 나무는 두릅나무, 음나무, 황칠나무와 가까운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잎이 팔손이가 된 이유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옛날 인도에 한 공주가 있었다. 공주의 열일곱 번째 생일날 어머니가 예쁜 쌍가락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공주의 한 시녀가 공주방을 청소하다 반지를 보고 너무 탐이 나서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각각 한 개씩 껴 보았다. 이런 일에는 마가 끼여야 이야기가 제 맛이 나는 법, 반지가 빠지지 않는다. 겁이 난 시녀는 그 반지 위에 헝겊을 감아 감추고 다녔다. ‘반지도난 사건’으로 난리가 난 궁궐에서는 왕이 직접 한 사람씩 조사를 한다. 차례가 된 시녀는 두 엄지를 밑으로 꼬부려 버리고 두 손을 합쳐서 여덟 개의 손가락뿐이라고 손등을 내밀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시녀는 한 순간에 팔손이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엄지를 숨기고 두 손을 맞붙여보면 팔손이 잎과 영락없이 닮았다. 전남 영광의 불갑사 참식나무도 인도 공주와 경운스님의 사랑이야기에 등장한다. 유독 인도 공주와 우리 나무와 인연이 전해지는 것은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 전설과 함께 우리 역사의 어느 부분에 인도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팔손이나무는 초겨울이 되면 나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원뿔모양의 꽃대에 우윳빛 꽃이 수없이 매달린다. 암수가 같은 나무이면서 암수 꽃이 따로 있지 않다. 처음 수꽃으로 출발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암꽃으로 변한다. 먼저 수술이 자라서 꽃가루를 만들고 꿀을 분비한다. 수꽃으로서의 기능이 다하면 수술아래 지금까지 작은 흔적처럼 잘 보이지 않던 암술이 자라 다시 꿀을 분비하는데, 당도가 굉장히 높다. 꽃피는 시기가 겨울이므로 몇 안 되는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한 강력한 유인방책이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암꽃과 수꽃이 동시에 피어 남매가 수정을 피하기 위함이다. 근친교배로 열성인자를 가진 자손이 생기는 것을 막겠다는 식물의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다. 다음해 4~5월경에 콩알 굵기의 새까만 열매가 달린다.
생약이름으로 팔각금반(八角金盤)이라 하며 잎과 새싹을 삶은 물은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사포톡신이라는 일종의 유독성분이 들어 있으므로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127. 비자나무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은 좋은 바둑판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다. 은행나무나 피나무 바둑판만 서재에 하나 놓여 있어도 가문의 자랑이다. 그러나 최고급품은 비자반(榧子盤)으로 친다. 나무에 향기가 있고 연한 황색이라서 바둑돌의 흑백과 잘 어울리며 돌을 놓을 때 들리는 은은한 소리까지 그만이란다. 처음에는 표면이 약간 들어가는 듯 하다가 돌을 쓸면 다시 회복되는 탄력성이 다른 나무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이 나무는 남해안 및 제주도에 드물게 자라기는 하지만 큰 비자나무가 분포하는 지역은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비자나무 바둑판은 전혀 만들 수 없다. 보존상태가 좋고 잘 다듬어진 비자나무 바둑판은 소위 명반(名盤)이라고 알려지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 94년 일본의 한 소장자가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피살되기 직전까지 가지고 있던 바둑판을 한국기원에 기증하였다. 이 바둑판이 비자나무로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고급 비자판은 아니고 중질정도이나 역사성 때문에 명반의 대열에 들어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흔히 자라는 나무의 하나이었을 뿐이다. 이는 문헌이나 출토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에 보면 원종 12년(1271)에는 원나라의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비자나무판자를 보냈다하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비자나무의 분포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 1983년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기의 화물운반선 선체의 밑바닥 일부와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목책(木柵), 4~6세기 무덤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관재의 대부분을 비자나무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나무가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습기에 잘 견디므로 예부터 바둑판 이외에도 관재나 배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 좋은 나무이다.
이처럼 고려 이전만 하여도 비자나무는 널리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벌써 세종, 예종, 성종 때 여러 번에 걸쳐 비자나무 판자의 수탈에 관한 지적이 있었으며, 영조39년(1762)에는 제주도에서 받치는 비자나무 판자 때문에 백성들이 폐해가 심하므로 일시 중지시킨 기록도 있다. 그래서 우리와 가까이서 삶을 함께 하여온 비자나무 숲은 아깝게도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곳만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현실이다.
남해안 섬 지방 및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육지는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백양산과 내장산이 살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다. 그러나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고,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 창경궁 온실 옆의 비자나무는 십년 넘게 잘 자라고 있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늘 푸른 잎을 가진 큰 나무로서 어릴 때 생장은 매우 느리나 크게 자라면 지름이 2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잎은 납작하며 약간 두껍고 끝은 침처럼 날카롭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봄에 꽃이 피어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크기는 손가락 마디만 하며 새알 모양으로 생겼다. 껍질을 벗겨내면 연한 갈색에 딱딱하고 얕은 주름이 있는 종자가 들어있다. 아몬드와 닮은 씨가 들어 있는데 떫으면서 고소하다. 그러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고 예부터 회충, 촌충 등 기생충을 없애는 약으로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비자 열매를 하루에 7개씩 7일 동안 먹이면 촌충은 녹아서 물이 된다고 하였다.
비자나무는 숲 속 그늘에 자라는 자그마한 개비자나무와 잎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구별은 손바닥을 펴서 잎의 끝 부분을 눌러보았을 때 딱딱하여 찌르는 감이 있으면 비자나무, 반대로 찌르지 않고 부드러우면 개비자나무이다.
128. 편백
우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란 책이 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란 신(神)이 자기 몸의 털을 뽑아 여러 나무를 만들었다고 적어 놓았다. 가슴의 털을 뽑아 날려 보낸 것이 편백이 되었다고 하며, 궁궐을 짓는데 쓰라고 했다. 임금님의 집짓기에 쓰라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좋은 나무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궁궐을 비롯한 일본의 전통 건축물은 대부분 편백으로 지어진다. 그들이 섬기는 신사의 대표적 건물인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무 불상의 상당 부분도 역시 편백이다. 삼나무와 함께 일본의 나무 문화를 대표한다. 이외에도 일본에는 삼나무, 금송, 너도밤나무 등 재질이 좋은 나무가 우리보다 훨씬 많다. 비가 많이 와서 공중습도가 높고 기온이 따뜻한 곳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를 하면서도 우리 눈에는 부러움으로 남는다.
편백(扁柏)은 이 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 중의 하나다. 잎이 납작한 늘 푸른 나무라는 뜻이 이름에 들어 있고, 실제 모양도 무엇엔가 눌려진 듯 편평한 잎을 가진다. 높이 30~40m, 지름 두세 아름을 넘겨 자라는 큰 나무로서, 잎 모양은 사뭇 달라도 흔히 보는 소나무와 같이 침엽수로 분류한다. 20세기 초 일제의 음흉한 손길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조금씩 가져다 심겨졌다. 추위를 싫어하여 주로 남해안을 선택했다. 원래 땅 가림이 심하지 않아 너무 메마른 땅만 아니면 웬만한 곳에서는 잘 자라 주었다. 광복이 되고 산림자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좋은 나무로 알려진 편백은 차츰 널리 심겨졌다. 남해의 편백 자연휴양림, 독림가 임종국씨가 심은 전남 장성의 편백 숲이 아름다운 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편백은 수천수만 그루가 떼를 이루어 모여 자라기를 좋아한다. 자기네들끼리 높이 경쟁을 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다.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미인의 기준은 슈퍼모델처럼 작은 얼굴과 늘씬한 큰 키이듯이, 나무나라의 미목(美木)도 가지 달림이 적고 긴 몸체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를 잘라 쓸 때 옹이 없이 이용할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동료와 선의의 경쟁으로 자기 몸을 달궈온 탓에, 우리가 만나는 편백은 대부분 미목의 조건을 모두 갖고 있다. 이 나무는 이렇게 미목이 되는 것으로만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나무는 자라는 과정에 상처를 입어 병원균이 침입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내 뿜는다. 그러나 편백처럼 떼거리로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다보면 섞여 사는 것 보다 병충해에 더 약하기 마련, 그래서 더 많은 자기방어물질이 필요하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소나무나 향나무와 같은 다른 침엽수보다 3배나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한다고 한다. 실제로 편백 숲 속에서 심호흡을 해보면 다른 나무의 숲보다 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편백 숲은 산림욕장으로 각광을 받는다.
편백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안을 들여다보면 가운데는 연한 붉은 끼가 돌고 가장자리는 거의 흰색에 가깝다. 나무질은 약간 단단한 편이며, 봄 세포와 여름 세포의 모양변화가 적어서 매끈하고 균일한 맛이 난다. 독특한 향기가 있고 잘 썩지 않는다. 어디에 쓰던 나무가 갖추어야 할 장점은 모두 갖추고 있다. 살아서는 피톤치드로, 죽어서는 나무 몸체를 통째로 사람에게 보시하는 고마운 나무다.
넓은 뜻으로 편백이라 부를 수 있는 나무는 북아메리카와 대만에도 있으며 6수종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편백의 원조는 히노키(ヒノキ)라 불리는 일본의 편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 들여와 심은 나무 중에는, 편백의 사촌뻘이 되는 화백도 있다. 추위 버틸 힘이 편백보다는 훨씬 강하여 꽤 북쪽으로도 올라온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도 잘 자라고 있는 화백을 흔히 만날 수 있다.
편백, 화백, 측백나무는 이름만큼이나 모양새도 서로 닮았다. 편백은 잎 뒷면 숨구멍이 명확한 Y자 모양으로 하얗게 나타나며, 화백은 뭉개진 W자로 보인다. 측백나무는 잎 뒷면의 숨구멍이 육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이 셋을 서로 구별할 수 있는 포인트다.
129. 가래나무
가래는 럭비공처럼 생겼으나 더 갸름하고 양끝이 뾰족하다. 망치로 두들겨야 깨질 만큼 단단하고 표면은 깊게 패인 주름투성이다. 끝을 조금 갈아버리고 두 개를 손안에 넣어 비비면 딱 알맞을 크기다. 그래서 가래 알은 옛사람들의 먹을거리에서 지금은 무료함을 달래고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고 엉뚱하게 우리들 손아귀에서 고생하는 과실이 되었다.
가래나무는 우리 땅 약간 추운 중북부에 원래부터 자라고 있던 토종나무다. 더 맛이 좋은 호두가 들어와 자리를 빼앗기기 전에는, 가래는 고소하고 영양가 높은 간식거리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동기시대나 삼국초기의 옛 생활터전에서 흔히 가래가 다른 유물과 함께 널리 출토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가래나무의 원래 한자 이름은 추자(楸子)다.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면 옛 농기구 가래를 나타내는 초(鍬)에서 쇠금 변을 나무목으로 바꾸면 가래가 추(楸)가 된다. 이는 가래 알이 농기구 가래와 모양새가 비슷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한다. 가래는 호두와 모양이 비슷하고 쓰임도 같아 옛 문헌에서 쓰이는 글자가 서로 혼동된다. 호두나무는 호도(胡桃)나 당추자(唐楸子)로 가래나무는 추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고려 숙종 6년(1101) 평안도 평로진 관내의 추자 밭을 떼어내어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가래나무가 맞다. 반면에 세종실록지리지에 천안군의 토산물로서 추자가 들어있다. 이때의 추자는 호두나무로 보아야 한다. 또 경상도에서는 추자란 바로 호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호두와 가래를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아서 옛 문헌을 읽을 때 약간의 혼란이 있다.
가래나무는 열매를 식용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나무만은 아니다. 옛 중국에서는 임금의 시신을 넣는 관을 재궁(梓宮)이라 하는데, 재는 가래나무를 뜻하므로 재궁이란 가래나무로 만든 관이라고 한다. <한서>곽광전이란 책에 가래나무(梓木)는 ‘천자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또 <후한서> 명제기에도 ‘천자의 관은 가래나무로 만들므로 이를 재궁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실제 발굴에서도 장사 마왕퇴 한묘에서 가래나무 관이 출토된 바 있다.
가래나무는 재질이 굳고 잘 썩지 않으며 아름다운 무늬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월낫(walnut)이라 하여 고급 가구를 만드는데 많이 쓰인다. 아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이니 천자의 관으로 만들어질 만하다. 그러나 임금의 관을 꼭 가래나무로만 만든 것은 아니다. 《잠부론》 등 다른 기록에 의하면 측백나무, 녹나무, 넓은잎삼나무, 소나무 등도 쓰인 예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재궁이란 말은 나무의 재질에 상관없이 임금님의 관을 일컫는 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임금님의 관을 재궁이라고 하며 주로 소나무로 만들었다.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는 씨앗을 먹는 것도 비슷하지만 재질이나 다른 특징도 매우 닮은 형제나무다. 둘 다 잎은 한 개의 잎자루에 작은 잎이 여러 개 달리는 복엽(複葉)인데, 잎의 모양과 달리는 개수로 서로 구분한다. 작은 잎의 수가 7~9개 이하이고 잎 모양이 약간 둥근 타원형이면서 가장자리에 톱니가 거의 없으며 열매가 둥글면 호두나무이다. 작은 잎의 수가 7~17개 정도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열매는 양끝이 뾰족한 달걀모양이면 가래나무다. 가래와 호두는 모두 부스럼을 치료하는 민간약으로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130. 동백나무
대부분의 꽃은 가지에 매달린 채 시들어 버린다. 화려하고 아름답던 시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탓이리라. 그러나 동백꽃은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지나면 새빨간 꽃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꽃 전체가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 그 모습이 마치 남자에게 농락당하고 내 버려지는 아름다운 여인과 대비된다. 그래서 동백꽃은 예부터 이루지 못한 사랑의 소재이었다. 멀리는 고려의 시가(詩歌)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백꽃’처럼 언제나 여인과 함께 등장한다. 원래 동양의 꽃인 동백은 서양에 건너가서도 여인과 비련으로 이어져 있다. 프랑스 소설가 뒤마가 1848년 발표한 ‘춘희(椿姬)’는 마르그리트 고티에라는 여주인공의 별명을 따 일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원래제목은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창녀이면서 동백꽃을 매개로 순진한 청년 뒤발과 순수한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버린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은 5년 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각색되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다.
동백이란 이름 외에 산다화(山茶花), 탐춘화(探春花)라고도 하였다. 동백나무는 원래 따뜻한 기후를 좋아 한다. 육지로는 서해안의 충남 서천에서 남부지방과 동해안의 울산에 걸쳐 자라고, 섬 지방은 대청도와 울릉도까지 육지보다는 더 북으로 올라온다. 늘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굵기 한 뼘 남짓 크기의 아담한 나무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활동을 멈추고 겨울잠 준비에 여념이 없는 늦가을부터 조금씩 꽃 봉우리를 만들어간다. 차츰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 깊어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 둘씩 꽃 피우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게 시작하여 봄의 끝자락에 이르도록 꽃이 이어진다. 윤기가 반지르르한 초록빛 잎사귀를 캔버스 삼아 진한 붉은 꽃을 수놓은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 놓는다.
너도 나도 꽃피우기에 여념이 없는 춘삼월 좋은 시절에서 늦둥이 국화가 설쳐대는 가을까지 내내 무얼 하고 있다가 하필이면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가? 동백나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다. 엄청난 정력을 쏟아부어야하는 꽃피우기에서 경쟁자를 따돌리고 종족보존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벌도 나비도 없는 겨울날에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할 것인가이다. 이 어려운 숙제를 아주 작고 귀여운 동박새와의 ‘전략적인 제휴’를 함으로서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우선 잎사귀 크기에 버금가는 큰 꽃에다 많은 양의 꿀을 생산 하도록 만들었다. 꽃통의 맨 아래다 꿀창고를 배치하고 위에는 노란 꽃술로 가득 덮어 두었다. 동박새로서는 추운 겨울을 나기위하여 열량 높은 동백나무 꿀을 열심히 따먹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꿀을 가져갈 때는 깃털과 부리에 꽃 밥을 잔뜩 묻혀 여기 저기 옮겨달라는 주문이다. 동백꽃의 진한 붉은 꽃잎과 샛노란 꽃술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새는 색채인식 메커니즘이 사람과 비슷하여 붉은 색에 특히 강한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초록바탕에 펼쳐지는 강열한 붉은 색깔의 동백꽃을 금세 알아보듯이 동박새도 쉽게 눈이 띄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렇게 새에게 꿀을 제공하고 꽃가루받이하는 꽃을 조매화(鳥媒花)라고 한다.
동백나무는 외톨이로 자라기보다 여럿이 모여 숲을 이룬다.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여수 오동도, 서천의 마량리,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 등은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동백나무 숲이 다. 꼭 이런 이름 있는 곳이 아니라도 좋다. 서남해안 지방은 물론 섬지방 어디를 찾아가더라도 겨울 동백꽃은 반갑게 맞아준다. 꽃이 필 때만이 아니라 질 때의 모습도 장관이다. 동백꽃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날, 동백나무 아래는 맨발로 사뿐사뿐 걸어가고 싶을 만큼 보드라운 붉은 카펫이 깔려진다. 이래저래 동백꽃은 우리에게 겨울의 낭만을 안겨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꽃으로서의 임무가 끝나면 밤톨 굵기의 열매가 달린다. 익은 씨앗을 발라 기름을 짜면 고급 머릿기름이 된다. 옛 여인들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 윤기 나고 단정히 하는데 필수품이다. 우리의 토종동백꽃은 모두 붉은 홑꽃잎으로 이루어진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분홍동백과 흰동백은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을 따름이다. 겹꽃잎에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갖는 동백이 널리 심겨지고 있지만, 자연산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원예품종이 대부분이다. 품격으로 따진다면 토종 홑 동백이 한 수 위다.
131. 버드나무
버들은 물을 좋아하여 개울이나 호숫가에 터를 잡는다. 봄을 알리는 아름다운 꽃들이 얼굴치장으로 여념이 없을 때 버들은 간단히 물세수하고 가느다란 몸매하나로 승부수를 던진다.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늘어진 버들가지는 이리 저리 산들바람에 실려 몸을 비튼다. 관심을 끌려는 독특한 몸짓이다. 부드러움과 연약함에 사람들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킨다. 가냘픈 여인을 상상해서다. 자연스레 버들과 여인의 신체특징을 비교한 여러 말이 생겼다.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유요(柳腰), 예쁜 눈썹을 유미(柳眉), 빼어난 자태를 유태(柳態)라는 것이 대표적 예다. 평양을 유경(柳京)이라고도 하였다. 대동강을 따라 버들을 많이 자라기도 하였으나 색향이란 이미지가 더 강하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는 버들에 얽힌 사랑으로 영웅을 잉태한다. 그녀는 버들 꽃 부인, 바로 유화부인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보면, 물의 신 하백(河伯)의 장녀였던 유화는 두 동생들과 함께 압록강 가에서 놀았다. 평소에는 둔치로 있다가 장마 때면 물이 차는 곳, 여기에는 갯버들이란 버들이 잘 자란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버들강아지다. 딸을 귀여워한 하백은 예쁜 갯버들의 꽃을 보고 유화(柳花)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해모수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바람둥이 해모수는 얼마 뒤 홀로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는 그만이었다. 바람난 딸에 화가 난 하백은 유화를 추방해버린다. 마침 동부여의 금와왕이 유화를 발견하고 왕궁으로 데려갔더니 알 하나를 낳았다. 이 알에서 나온 아이가 뒷날 주몽이 된다. 시대를 한참 뒤로하여 고려의 태조 왕건은 유(柳)씨 성을 가진 신혜왕후를 버드나무 밑에서 만난다.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는 거사를 망설일 때 갑옷을 입혀주면서 용기를 북돋아 준다. 버들과 유난히 인연이 많은 그녀지만 버들허리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을 갈아 치운 대단한 여장부이었다.
이렇게 권력의 언저리를 함께한 버들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남녀의 사랑으로 승화된다. 조선중기의 문신 최경창과 관기(官妓) 홍랑의 사랑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닫는다. 그는 북도평사라는 벼슬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둘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남의 사랑을 들여다보는 입장에서는 이별이 있어야 감칠맛이 있 법, 오래지 않아 최경창은 임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관에 매인 몸이라 따라 나설 수 없었던 홍랑은 그를 배웅하고 이슬비 내리는 저문 날,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시 한수를 건넌다.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님 에게 드리오니/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옵소서/밤비 내릴 때 새 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버들가지 하나를 두고 신분을 초월한 연인사이의 안타까운 이별이 절절히 베어있다. 옛 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질 때 배웅을 할 수 있는 마지막은 나루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헤어짐의 마지막 순간 가시는 님에게 물가에 흔히 자라는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것으로 아픔을 가슴에 묻는다. 이렇게 이별의 징표로 버들을 건너 주는 데는 숨겨진 또 다른 뜻이 있었다 한다. “빨리 돌아오세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내 마음은 나도 몰라요.”라는 은근한 투정이 배어있어서다.
버들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도 이어진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괴로울 때 구원을 청하면 자비로써 사람들을 구해 준다. 그래서 흔히 옛 탱화는 관음도가 잘 그려지는데, 양류관음도와 수월관음도가 대표적이다. 모두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다 꽃아 두고 있는 형식이다. 이는 버들가지가 실바람에 나부끼듯이,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도 귀 기울여 듣는 보살의 자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울러서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관세음보살의 물병 속에 든 감로수는 고통 받는 중생에게 뿌려주기도 한다. 버들의 뿌리는 감로수를 깨끗이 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다.
그러나 버들에 꽃이 섞인 ‘화류(花柳)’는 뜻이 달라진다. 순수하고 애틋한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금은 육감적이거나 퇴폐적이 된다. <춘향전>을 보면, 봄바람에 글공부가 싫어진 이몽룡이 광한루로 바람 쐬러 나간다. 성춘향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그려져 있다. ‘저 건너 화류 중에 오락가락 희뜩희뜩 어른어른 하는 게 무엇인고?. 자세히 보고오너라!’고 방자를 재촉한다. 역시 봄바람이 잔뜩 들어간 성춘향도 그네를 타고 있었으니 둘의 만남은 다분히 의도적인지 모른다. 늘어진 버드나무에 그네를 매고 복사꽃 오얏 꽃을 배경으로 치맛자락을 펄럭이었으니 숫총각 이몽룡으로서야 정신이 ‘몽롱’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몸을 파는 여인을 두고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도 한다. 길가에서나 흔히 만나는 버들이나 담 밑에서 핀 꽃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빗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은 아예 화류계라 하였다. 역시 꽃과 버들이 섞인 탓이다. 봄날이 가기 전 다소곳이 늘어트린 가녀린 버들가지를 만져보면서 우리 곁에 살아온 긴긴 세월 동안의 여러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
132. 왕버들
왕버들은 가지가 굵고 튼튼하며 버드나무 종류이면서도 거의 늘어지지 않는다. 가느다란 가지가 길게 늘어져 산들바람에도 하늘거리는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과는 사뭇 다르다. 왕버들은 수백 년을 거뜬히 살 수 있으며 아름드리로 자라고 모양새가 웅장하여 우리나라에 자라는 30여종의 버드나무 어느 것도 갖지 못하는 왕이란 접두어를 갖는 영광을 얻었다. 버드나무의 왕이란 뜻으로 왕버들이 되었다.
이‘버들의 임금님’은 이름 그대로 숲 속에 들어가서 다른 잡스런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아예 개울가, 호수가 등 유난히 물이 많은 곳만을 선택하여 어릴 때 빨리 자라버림으로서 다른 나무들을 압도하고 왕으로서 위엄을 자랑한다. 왕버들은 습기가 많은 곳, 때로는 거의 물속에 잠긴 채로 수백 년을 넘게 삶을 이어 간다. 대표적인 곳이 경북 청송 주산지의 왕버들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물속에 완전히 잠겨 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사람들이 둑을 막아 갇히게 된 것이다. 1년이 한번 씩 물을 빼주는 시기에 잠시 뿌리 호흡을 하고나면 일 년 내내 물속이다. 나무의 자람이 시원치 않을 수밖에 없다. 나무가 오래 오래 살 수 있는 대책이 강구되었으면 싶다.
이렇게 왕버들은 물을 가까이 하면서도 오래 살다보니, 나무속이 잘 썩어 버리고 줄기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많다. 구멍 속은 수많은 동물들의 삶의 터전이다. 개중에는 잘못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죽어 버린 곤충이나 설치(楔齒)류도 있다. 몸속에 있던 인(燐)은 비 오는 여름날의 밤에 전설을 만들어 낸다. 아름드리 왕버들의 줄기에서는 푸른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름하여 도깨비불이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가 다 그러하듯이 왕버들의 푸른 도깨비도 무섭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혀 잔인성이 없고 장난이나 심술을 부려도 은혜를 잊지 않은 사람과는 친숙한 귀신이었다. 그래서 왕버들의 또 다른 이름은 귀류(鬼柳)이다. 좀 위압적인 왕버들이란 이름보다 도깨비버들 혹은 귀신버들이라 하여도 재미있을 것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혜통 스님 이야기를 보면, 신라 때 효소왕(692~702)이 즉위하여 아버지인 신문왕의 왕릉을 닦고 장사 지내러 가는 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선대의 공신인 정공의 집 앞 왕버들이 길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관리들이 이것을 베려고 했다. 이에 정공(鄭恭)은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고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효소왕은 크게 노하여 정공의 목을 베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렸다. 나무 하나에 목숨까지 버렸으니 나무사랑이 지극한 것인지 아니면 무모한 탓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1938년에 간행된 ‘조선의 임수(林藪)’라는 책을 보면 경주에는 ‘정공의 왕버들’이외에도 계림, 오릉,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의 천경림(天鏡林)등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곳에 어김없이 왕버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이외에도 경치가 빼어난 유원지나 경승지의 하천 가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자라는 곳이 많다. 물가에서 자라는 아름드리 나무의 대부분은 왕버들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버들만도 4그루나 된다.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한 아름이 훨씬 넘게 크게 자랄 수 있다. 가지가 크게 벌어지고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많아 물가의 조경수로 제격이다. 나무껍질은 나이를 먹으면 회갈색으로 깊이 갈라지고 작은 가지는 황록색으로 팥알만 한 겨울눈이 달린다. 잎은 긴 달걀모양이며 새순이 돋을 때는 주홍색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133, 회양목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 졌는지는 우리의 인쇄역사를 아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목판 자체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니 추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이를 밝힐 수 있는 단서 하나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내용 중에 ‘6두품과 5두품은 말안장에 자단, 침향 등의 수입나무는 물론 회양목, 느티나무, 산뽕나무 등의 국산재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관심 있게 보아야 할 나무는 회양목이다. 이 나무는 오늘날 정원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데 불과한 자그마한 나무일뿐이다. 물론 가위질을 한 탓이지만 자연 상태로 두어도 팔목 굵기면 백년을 넘나볼 만큼 자람도 지극히 늦은 나무다.
이렇게 별 볼일이 없는 나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중요한 쓰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판이나 목활자에 가장 좋은 재질을 가지고 있다. 회양목은 나무를 이루는 물관과 섬유의 크기가 거의 같은 작은 세포가 촘촘히 들어 있다. 굵은 물관과 가느다란 섬유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세포 크기가 들쭉날쭉하고 나이테의 한쪽에 몰려있는 보통 나무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구조를 타고 났다. 나무질이 곱고 균일하며 치밀하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글자를 새기는 데는 상아나 옥에도 뒤지지 않는다. 글자새김과 천생연분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이런 나무들을 선조들은 감별해 낼 수 있는 식견을 가졌다. 필자는 삼국사기 기록과 나무의 세포모양을 보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찍은 판자의 나무는 회양목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옛 우리 문헌의 상당부분이 이 나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양목은 크게 자라지도 않고 또 자람의 속도도 너무 늦어 큰 목판이나 많은 양이 필요할 때마다 모두 쓸 수 없다. 이럴 때는 벚나무나 배나무를 회양목 대신 쓴다.
자람 터는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에 걸치는 석회암지대이다.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회양목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옛 이름은 황양목(黃楊木)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회양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손톱크기 남짓하면서 도톰한 잎사귀가 사시사철 달리는 자그마한 나무이다. 대체로 사람 키 정도 크기가 고작이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가 4~5미터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사람들이 기분 나는 대로 이리저리 잘라대어도 금세 가지를 뻗어낸다. 기본형인 둥근 모양에서 날라 가는 새 모양까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다듬어도 한마디 불평이 없다. 그래서 널따란 잔디밭의 가장자리나 고급주택의 오솔길을 보기 좋게 장식하는 나무로 빠지지 않는다. 이른 봄날 산수유와 매화가 꽃 자랑으로 여념이 없을 때 회양목도 꽃을 피운다. 연초록 빛깔에 꽃잎도 없이 꽃을 피워대니 화려한 다른 꽃들처럼 누가 알아 줄 리가 없다.
그러나 옛 쓰임새는 이런 조경수가 아니라 연약해 보이는 자그마한 줄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태종10년(1410) 점을 치는 도구로 황양목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내용을 비롯하여, 녹각 대신에 회양목을 쓰도록 하였고, 궁궐을 출입하는 표신(標信)을 회양목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후 조선조 중후기에 들어와서는 고급 목판활자의 재료로 많이 쓰이면서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20년(1796)에는 정리주자(整理鑄字)을 완성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 ‘임자년에 황양목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회양목은 이 외에도 도장을 새기는 도장나무로도 유명하다. 관인이나 옛 선비들의 낙관도 대부분 이 나무이다. 또 머리 빗, 장기 알 등으로도 널리 쓰였다.
134. 호두나무
경부선 완행열차는 추억 세대에겐 아련한 낭만으로 기억된다. 서울을 출발하여 조금 출출해 질 즈음이면 ‘천안명물 호두과자’란 행상들의 외침에 군침이 돈다. 천안에는 능수버들 축 늘어진 천안삼거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호두과자로 더 유명한 고장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만나는 흔한 과자가 되어버려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호두는 아득한 옛날 멀리 중동 지방에서 처음 중국으로 들어왔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의 무제는 장건이란 외교관을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쯤으로 짐작되는 대월지(大越氏)국으로 파견한다. 제휴하여 흉노를 협공하자는 특사였다. 외교는 실패했고, 오히려 흉노에 붙잡혀 13년간이나 포로 생활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다. 그의 손은 빈손이었지만 괴나리 봇짐 속에는 호두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들어온 호두는 중국 땅에 널리 심겨진다. 오랑캐 나라에서 온, 모양이 마치 복숭아씨처럼 생긴 이 과실을 보고 중국 사람들은 호도(胡桃)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여 원래는 호도다. 다만 오늘 날은 한글 맞춤법에 따라 호도가 아니라 호두가 되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때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한다. ‘신라민정문서’는 경덕왕14년(755)에 만들어진 충청도 어느 지방의 현황조사서인데, 호두나무를 심은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 실린 한림별곡의 가사에 나오는 당추자(唐楸子)란 구절은 호두가 벌써 당나라 때 들어왔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고려 말 천안 광덕면 출신의 유청신이란 문신이 있었다.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왔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가져온 묘목은 천안 광덕사에, 열매는 자신의 고향집인 광덕면 뜰 앞에 심어서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때 심었다는 나무가 절 앞에 천연기념물 398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고 절 안에 들어와서도 노거수 몇 그루가 더 자란다. 언제 어떻게 들어온 지는 논란이 있지만, 유천신과의 인연으로 오늘날 천안일대는 호두나무가 많다고 한다.
호두는 지름 3~4cm, 탁구공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다 딱딱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가 먹는 부분은 씨앗의 속살, 배유(胚乳)라는 것이다. 호두와 비슷한 모습의 잣, 밤, 은행 등을 통틀어 견과(堅果)라고 한다. 정월대보름 날이면 이런 견과를 깨물어 먹는 행사가 부럼이다. 이가 튼튼해지고 부스럼을 앓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호두에는 지방과 단백질 및 당분이 많아 고소하고 약간 달콤하다. 그 외 무기질, 망간, 마그네슘, 인산칼슘, 철, 비타민 등 무기물도 풍부하다. 고단백 웰빙 식품으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특히 성장하는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 씨앗 표면의 몽실몽실한 작은 주름은 뇌를 그대로 닮아 머리가 좋아 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도 한다. 강장제나 변비를 없애는데도 효과가 있다하며, 호도기름은 민간약으로 피부병에 널리 쓰이기도 한다.
호두는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에도 널리 퍼졌다. 영어이름은 ‘Persian walnut’, 서양인들에게도 맛있는 과실나무였다. 유명한 발레 호두까기인형(The Nutcracker)은 호두와 가까이한 그들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예다. 우리나라에는 토종 호두나무에 해당하는 가래나무가 우리 땅 여기저기에서 자란다. 삼국시대 초기의 발굴 터에서 흔히 가래가 출토될 만큼 과실을 애용하였지만, 호두나무가 들어온 이후는 영광을 뒤로 했다. 호두나무와 가래나무 종류는 과실만이 아니라 재질이 좋다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다. 북아메리카가 고향인 흑호두나무를 비롯하여 이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나 조각품은 앞에 ‘고급’이란 접두어가 꼭 붙을 정도이다.
호두나무와 가래나무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잎의 개수로 서로 구분한다. 겹잎 대궁에 달린 잎의 수가 5~9개 이하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으면 호두나무, 잎 수가 이 보다 더 많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면 가래나무다.
135. 앵두나무
앵도나무와 앵두나무 양쪽을 다 쓴다. 그러나 한자 이름에서 온 앵도(櫻桃)나무가 더 맞는 이름이다. 또 열매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앵도(鶯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잘 익은 앵두의 빛깔은 붉음이 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빨간 입술과 흰 이를 아름다운 여인의 기준으로 삼았던 옛사람들은 예쁜 여인의 입술을 앵두 같은 입술이라 하였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고 입술은 관능의 창이라 한다. 표면에는 자르르한 매끄러움마저 있으니 작고 도톰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있는 매력적인 여인의 관능미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조선 초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였으므로 효자인 문종은 세자시절 경복궁 안 울타리마다 손수 앵두를 심고 따다 바쳤다. 세종이 맛보고 ‘다른 곳에서 바친 앵두가 맛있다 하여도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느냐‘고 무척 흐뭇해하였다고 한다. 성종25년(1492) 철정이란 관리가 임금께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하니 그에게 활 1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하였다. 이 관리는 연산3년(1496)에도 또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억!억!하는 돈을 내놓고도 권력자의 눈 밖에 나 하루아침에 망해버린 어느 기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앵두 한두 쟁반에 임금님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을 부러워 할 것 같다.
앵두는 단오 전후 모든 과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익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제물(祭物)로도 매우 귀하게 여겼고, 약제로도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중초(中焦)를 고르게 하고 지라의 기운을 도와주며 얼굴을 고와지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며 체하여 설사하는 것을 멎게 한다.’고 하였다. 앵두나무 잎은 뱀에게 물렸을 때 짓찧어 붙이고, 동쪽으로 뻗은 앵두나무 뿌리는 삶아서 그 물을 빈속에 먹으면 촌충과 회충을 구제할 수 있다하였다.
앵두나무는 수분이 많고 양지 바른 곳에 자라기를 좋아하므로 동네의 우물가에 흔히 심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한 많은 옛 여인네들은 우물가에 모여 앉아 시어머니로부터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온 동네 흉을 입방아 찧는 것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 만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흘러간 노래 ‘앵두나무 처녀’의 가사다. 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초,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로 도망칠 모의(?)를 한 용감한 시골처녀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 것도 역시 앵두나무 우물가이었다.
중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고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이다. 어린 가지에 곱슬곱슬한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가는 톱니가 있고 손가락 길이 정도이다. 4월에 잎보다 먼저 또는 새잎과 거의 같이 엄지손톱만한 꽃이 새하얗거나 연분홍색이며 1~2개씩 모여 핀다.
136. 팥꽃나무
전라남도 해남에서 목포 쪽으로 길쭉하게 나온 화원반도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이다. 70년대 중반쯤 4월 중순의 어느 봄날 뽀얀 먼지를 날리는 털털이 시골버스에 실려 필자는 해남 대흥사에서 목포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나지막한 야산 곳곳에 붉은 자주 꽃방망이를 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예쁘고 느낌이 너무 좋다. 진달래나 산철쭉은 분명 아닌데, 누구네 자손이며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무작정 버스에서 내려 꽃핀 나무 앞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시작한 팥꽃나무와의 첫 만남을 필자는 첫사랑만큼이나 가슴 깊숙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 자라도 허리 춤 남짓한 피그미 나무로서 잎이 나오기 전에 동전크기 남짓한 꽃이 3~7개씩 보송보송한 꽃잎을 선보인다. 작은 가지를 감싸듯이 나무마다 이런 꽃 무리가 수십 개 모여 실타래를 풀어놓듯이 피어 올라간다. 곱고 아름다운 보기 드문 우리 강산의 우리 꽃이다. 작달막한 키에 무리 지어 꽃피는 모습은 정원이나 도로 가의 조경수로 제격이다. 온 나라 여기저기에,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 한산도까지 조경이라면 영산홍으로 뒤덮지 말고 우리의 아름다운 팥꽃나무 심기를 권하고 싶다.
이 나무의 생활터전은 대체로 화원반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올라간다. 장산곶에서 잠깐 외도를 하여 넓은잎팥꽃나무라는 이복동생을 만들어 두고 북으로 평안도까지 이어진다. 모두들 싫다고 질겁하는 바다 갯바람과 마주하기를 좋아하여 일부러 심지 않은 다면 내륙으로는 자진하여 들어와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라는 곳 자체가 걸음 끼라고는 씨알도 없는 황토이니 너무 습하지만 않으면 사람들이 가져다 심어도 투정을 하지 않는다.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 살다보니 땅위의 자기키보다 더 깊이 뿌리를 뻗는다. 줄기는 보라 빛이 들어간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새 가지는 털이 덮여 있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길쭉하고 양끝은 동그스름하며 톱니가 없다. 열매는 한 여름에 흰빛으로 익는다.
팥꽃나무란 이름은 꽃이 피어날 때의 빛깔이 팥알의 색깔과 비슷하다하여 ‘팥 빛을 가진 꽃나무‘란 뜻으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또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 꽃이 필 때쯤 조기가 많이 잡힌다하여 ’조기꽃나무’라고도 한다.
그의 강한 생명력을 이어 받으려는 듯이 잎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서 말린 것을 완화(莞花) 혹은 원화(芫花)라고 하여 귀한 한약제로 쓰인다. 동의보감에는 ‘맵고 쓰며 독이 많다. 옹종, 악창, 풍습증을 낫게 하며 벌레나 생선 물고기의 독을 푼다.’하여 주로 염증의 치료제로 쓴다.
팥꽃나무는 팥꽃나무과의 서향 무리에 들어가며 서향, 백서향, 삼지닥나무, 두메닥나무 등 모두 아름다운 꽃과 향기가 특징인 나무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는 집안이다. 이들 중 팥꽃나무만은 향기가 강하지 않으며 잎이 어긋나기 하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마주나기 하는 것도 특별함이다. 영어이름 다프네(Daphne)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의 끈질긴 구애를 피하여 월계수가 되어 버린 아름다운 여신 다프네에서 따온 것이다.
137. 자두(오얏)나무
자두의 옛 이름은 오얏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람이 많은 이씨는 오얏으로 대표된다. 언제부터 오얏이 자두로 변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국어사전에 보면 자두의 잘못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얏이 더 정겹고 예스러움으로 다가온다. 자두의 어원은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로 변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오얏 꽃을 감상하면서 시 한 수 읊조리고, 여름에 들면서 익은 열매를 따먹는 과일나무로서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史書)에는 꽃피는 시기로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 번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시가(詩歌)로 실린 것만도 20여 회나 된다.
자두나무는 본래 우리나라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고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수입나무이다. 시경(詩經)에 보면 중국에서도 주나라 시대에는 꽃나무로서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한다.
옛 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즉 오얏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얏 밭은 우리 주변에 흔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의심 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꼿꼿한 마음가짐을 엿 볼 수 있게 한다.
고려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는 그의 예언서 도선비기(道詵秘記)에, 5백년 뒤 오얏 성씨(李)를 가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이후는 한양에 오얏나무를 잔뜩 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베어버림을 반복함으로서 왕기(王氣)를 다스렸다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보람도 없이 이성계가 이룬 조선왕조는 5백년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조선왕조가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대접한 적은 없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이왕가(李王家)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도 오얏 꽃을 형상화한 문양이 들어 있다. 조선 말기의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뭇가지, 왼쪽에는 무궁화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지은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의하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오얏나무의 가지 틈에 굵은 돌을 끼워 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하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속이 있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추나무를 대상으로 시집보내기를 한다.
인가 부근에 과일나무로 심고 있으며 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커다란 낙하산 모양을 이룬다. 잎은 달걀크기로 어긋나기하고 끝이 차츰 좁아지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봄에 새하얀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 보통 3개씩 달린다. 열매는 둥글고 밑 부분이 약간 들어간 모양으로서 여름에 자주 빛으로 익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두는 대부분 개량종이고 진짜 중국원산의 옛 오얏은 보기 어렵다.
138. 불두화
메마른 사막의 선인장도 진흙구덩이의 연꽃도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긴긴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기다린다. 꽃이란 바로 식물의 생식기관으로서 암수의 화합이 이루어져 씨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암수가 서로 움직여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자태에다 향기를 내고 꿀을 만들어 곤충을 꼬여 들여야 수정이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런데 암술도 수술도 갖지 않고 꽃잎만 잔뜩 피우는 멍청이 꽃나무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며 사람이 이리 저리 붙이고 떼고 하여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름하여 무성화(無性花)이다.
초파일을 전후하여 대웅전 깊숙이 미소 머금은 금동 불상과 직선으로 혹은 약간 비켜서서 새하얀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꽃나무가 있다. 사람 키 남짓한 높이에 야구공만한 꽃송이가 저들 자신조차 비좁도록 터질 듯한 이 꽃나무가 바로 불두화로서 대표적인 무성화의 하나이다. 자라는 땅의 산도(酸度)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처음 필 때에는 연초록 빛깔이며 완전히 피었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 되고, 꽃이 질 무렵이면 연 보라 빛으로 변한다.
꽃 속에 꿀샘은 아예 잉태하지도 않았고 향기를 내뿜어야할 이유도 없으니 벌과 나비가 처음부터 외면해 버리는 꽃이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꽃을 피워야 할 계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살아있는 꽃’이지만 아무래도 벌과 나비가 없는 불두화는 생명 없는 조화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서글픔이 있다.
다행이 그는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석화(石花)의 서러움을 조금은 면하게 되었다. 심은 곳의 대부분이 절간이고 꽃의 모양이 마치 짧은 머리카락이 꼬부라져 나발형(螺髮形)을 이루고 있는 불상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불두화(佛頭花), 혹은 승두화(僧頭花)란 분에 넘치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씨도 없는 불두화의 자손은 꺾꽂이나 접붙이기로 퍼져나가지만 자신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백당나무이다. 산지의 습한 곳에서 높이 약 3m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인데 잎은 마주나고 끝이 3개로 크게 갈라져서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다. 꽃은 주먹만한 크기로 작은 우산을 펴놓은 것 같은 꽃차례로 둥글게 달린다. 안쪽에는 암꽃과 수꽃을 모두 가지는 정상적인 꽃, 즉 유성화(有性花)가 달리고 바깥쪽에는 새하얀 꽃잎만 가진 무성화가 피어 있어서 달리 보면 전체 모양이 마치 접시를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백당나무에서 돌연변이가 생겼거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수꽃만 달리게 육종(育種)한 것이 바로 불두화이다.
북한에서는 백당나무를 접시꽃나무, 불두화를 큰접시꽃나무라고 부른다.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하여온 북한은 아름다운 우리말 식물이름을 많이 만들었지만 백당나무나 불두화가 북한이름보다 꼭 나쁜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중대가리나무란 이름이 있는데 북한이름은 머리꽃나무이다. 통일의 그 날이 오면 이런 이름들은 그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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